“어머니가 백혈병으로 항암치료를 받다 돌아가셨습니다. 독한 치료제를 맞고 고생하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지요. 암 환자들은 효과를 예측할 수 없어서 실제론 필요 없는 항암제도 많이 맞아요. 제 전공인 유방암에서만큼은 환자들이 고생하는 일을 줄이고 싶었어요.”
백순명 연세대 의대 석좌교수에겐 아픈 사연이 있다. 어머니가 병과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픔을 삼킨 그는 지금 세계 최고의 유방암 유전자 연구자가 됐다. 2004년 유방암 예측검사인 ‘온코타입디엑스(oncotypeDX, 아래 온코타입)’를 개발한 공로로 ‘유방암 분야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코멘 브린커상도 2010년 받았다. 이 검사는 내 몸에 있는 유전자 21개를 분석해 유방암이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하는 기법이다. 항암제를 맞지 않아도 되는 유방암 환자 절반을 골라낼 수 있다. 미국에서만 매년 7만 명이 이 검사를 받는다.
“특히 젊은 환자들이 고마워해요. 항암치료를 받으면 아이를 못 가질 수도 있거든요.” 더구나 항암제를 먹으면 탈모나 구토 같은 부작용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환자 절반을 이런 고통에서 구해준 배경에는 엄청난 양의 빅데이터와, 이를 분석하는 소프트웨어 기술이 있었다.
“당신 미쳤다.” 유방암과 관련된 유전자 250개를 동시에 검사한다고 했을 때 백 교수가 주위에서 들은 말이다. 당시 미국 국립유방암임상연구협회에서 일하던 그는 유방암 고위험군 환자에게서 어떤 유전자가 활동하는지 궁금했다. 백 교수는 유방암 표적치료제를 개발하던 제약사들과 의기투합해 이 무모한 작업에 뛰어들었다.
먼저 엄청난 데이터가 필요했다. 700개 병원에서 10년간 모은 자료를 분석하기 위해 통계분야 교수 5명을 포함해 연구자 180명이 달라붙었다.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 ‘오라클’을 이용해 인근 피츠버그대에서 빅데이터를 다룰 수 있는 특별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환자별 치료방법을 비교하고, 재발 및 생존확률을 기록했다. 통계분석 소프트웨어인 ‘R’과 ‘SAS’를 이용해 마침내 핵심 유전자 21개를 골라냈다. 컴퓨터에 능한 통계학자들이 있었지만 백 교수는 밤을 새워 프로그래밍을 독학했다. 통계학자들과 예측모델을 논의하고 함께 코딩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백 교수의 생각이 새로 개발한 소프트웨어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이렇게 개발한 온코타입 검사는 미국종합암네트워크가 환자들에게 권고하는 유방암 표준검사법이 됐다. 백 교수는 현재 가격이 저렴한 국내형 검사법을 개발하고 있다.
의사 되려면 응용수학 알고리듬 익혀라
환자맞춤형 의학은 이제 대세다. 유전자를 분석해 각 개인에 맞게 치료하고, 앞으로 걸릴 병을 미리 예측해 대비하는 것이다. 안젤리나 졸리가 유방암 고위험유전자 ‘브라카1’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유방 제거 수술을 받은 것처럼, 특정 질병에 취약한 고위험군을 미리 찾아 예방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폐암, 전립선암, 췌장암 등을 맞춤의학으로 치료하려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맞춤의학을 제대로 하려면 의사나 생명과학자들이 생물학 지식만 알아서는 안 된다. 빅데이터를 다루고 컴퓨터를 이용해야 한다.

의학이 소프트웨어와 만나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마이클 J. 폭스 파킨슨병 연구재단은 파킨슨병 치료약이 환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세계적인 소프트웨어 회사 ‘인텔’과 협력하기로 했다고 작년 8월 발표했다.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수집한 환자들의 정보를 관리하기 위해 인텔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플랫폼인 Cloudera® CDH* 등 여러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환자별로 초당 300개 항목을 관찰해서 얻은 데이터를 분석해 파킨슨병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연구자들에게 제공하는 소프트웨어다.
의학과 IT가 융합되고 있는 시대다. 백 교수는 “맞춤의학을 위해서는 데이터 예측 모델링 방법에 능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장 소프트웨어 코딩을 배우라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먼저 수학 이론을 충실히 공부해 알고리듬에 대한 개념을 익히는 것이 좋다. “저는 의대에 오고 싶다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에게 ‘반드시 응용수학을 전공한 다음에 오라’고 추천합니다. 제가 만약 학생 선정에 관여하게 된다면 응용수학을 필수조건으로 만들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