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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 Issue] 고개 숙인 마린보이, 스테로이드의 유혹

고개 숙인 마린보이, 스테로이드의 유혹

샌프란시스코 관광 중에 직접 겪은 일이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홈구장 오른쪽 담장은 바다와 바로 닿아 있습니다. 저 담장을 훌쩍 넘겨 바다에 바로 떨어지는 홈런을 특별히 ‘스플래쉬 히트’라고 부릅니다. 잠자리채를 든 사람이 배를 타고 공을 건지러 가는 모습을 한번쯤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지금까지 50개가 넘는 스플래쉬 히트가 나왔는데요. 가장 많이 스플래쉬 히트를 기록한 사람은….”

처음으로 조그마한 체구의 중국인 가이드는 말끝을 흐렸다. 관광객들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웃어 넘겼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모두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2001년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최다홈런(73개)을 기록하며 신이라 불리던 그 사나이, 배리 본즈다. 하지만 본즈의 영광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신기록을 경신한 지 채 3년도 지나지 않아 ‘본즈가 스테로이드를 복용했다’는 약물 스캔들이 터져 나왔다. 마린보이 박태환이 복용했다고 알려진 테스토스테론도 체내에서 동화작용을 하는 스테로이드의 일종이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AT&T 파크 전경

스테로이드, 우리 집에도 있는데…

스테로이드라는 말은 사실 꽤 익숙하다. 피부과에서 처방하는 연고나 정형외과에서 무릎 통증에 놔주는 약 대부분에 스테로이드 성분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국제 스포츠계가 금지할 정도로 위험한 약물을 함부로 내게 처방한 것이 아니냐’라거나 반대로 ‘동네 의원에서도 흔히 쓰는 약이 그렇게 문제냐’라는 의문이 생긴다.

이것은 스테로이드의 종류를 구분하지 못한 데서 생긴 오해다.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대표적인 스테로이드 의약품은 코티코스테로이드로, 우리에게 익숙한 피부치료제 ‘복합 마데카솔’이 한 예다. 도핑이 문제가 될 때마다 언론에서 언급되는 ‘동화작용 스테로이드’는 완전히 다른 종류다. 스테로이드는 다닥다닥 붙어있는 네 개의 탄소고리를 가진 화합물을 말한다. 같은 스테로이드라도 고리에 어떤 그룹이, 어떤 위치에 붙느냐에 따라 기능이 크게 달라진다. 치료용으로 쓰는 코티코스테로이드와 테스토스테론 같은 동화작용 스테로이드의 구조를 살펴보면 둘의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그림 참조).

자꾸 ‘동화작용’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동화작용이란 몸속에서 지방을 태우고 근육을 합성해 전반적인 신진대사율을 높이는 작용이다. 즉 동화작용 스테로이드는 몸속 근육량과 근력을 증가시킨다. 근육량과 근력을 높인다니, 모든 운동선수들의 꿈이지 않은가. 의학분야 권위지인 ‘뉴잉글랜드의학저널(NEJM)’에 1996년 실린 연구를 살펴보면 스테로이드의 효과를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10주 동안 운동만 한 집단은 근육량이 2kg 늘어났고, 운동과 스테로이드 복용을 병행한 경우는 평균적으로 5kg이 늘었다. 2배가 넘는 차이다. 아무 운동을 하지 않
고 스테로이드만 복용한 경우에도 근육량이 3kg이나 늘어 운동을 한 집단보다 더 몸이 좋아졌다. 이처럼 동화작용 스테로이드는 불법약물 중 가장 확실하게 효과를 볼 수 있는 약물이고, 그만큼 많은 이들이 사용했다.

 
닮은 듯, 안 닮은 듯

운동선수는 왜 감기약을 조심해야 할까워낙 효과가 좋다보니 반대로 부작용도 크다. 테스토스테론을 오래 복용할 경우 체내의 호르몬 생산기능이 떨어져서 남자에게 여성형 유방이 생기는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 박태환이 검찰 조사에서 남성호르몬 수치가 떨어져서 치료 목적으로 네비도를 사용했다고 발언한 것은 오히려 동화작용 스테로이드를 오랫동안 복용했다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


다른 운동 능력에 도움이 되는 약물도 있다. 사이클이나 마라톤 같은 장거리 종목 선수들은 산소운반능력을 동반한 지구력이 중요하다. 고환암을 극복하고 복귀해 사이클 영웅이 된 랜스 암스트롱은 테스토스테론과 함께 에리스로포이에틴이라는 호르몬 주사를 맞았다. 에리스포포이에틴은 원래 만성 신장병환자의 빈혈치료에 사용되던 약품으로, 적혈구 생성에 필수적인 호르몬이다. 암스트롱은 이 약을 이용해 혈액 속에서 산소를 운반하는 적혈구 숫자를 늘려 지구력을 강화했다. 약물 복용 사실이 밝혀진 뒤, 암스트롱은 뚜르 드 프랑스 7연패 기록과 올림픽 메달까지 모두 박탈당했다.

뛰는 도핑 테스트 위에 나는 코디네이터 있다

랜스 암 스트롱은 고환암을 이겨내고 사이클에 복귀해 뚜르 드 프랑스를 7연패한 영웅이었다.암스트롱처럼 1년에 수차례씩 수시로 도핑테스트를 받는 정상급 선수들이 꾸준히 불법 약물을 이용하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들은 빠져나갈 구멍을 자신했던 걸까. 사실 도핑의 역사와 함께 불법약물 복용을 숨기는 반도핑 기술도 점점 발전하고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방법은 검출이 어려운 약물을 사용하는 것이다. 바이오제네시스 스캔들을 예로 들어보자. 바이오제네시스 스캔들은 메이저리그 선수 일부가 노화방지 클리닉으로 위장한 바이오제네시스라는 업체로부터 약물을 제공받은 사건이다. 회사의 설립자인 앤서니 보시는 메이저리그 선수들에게 성장 호르몬을 직접 주사했다. 현재 성장호르몬은 세계반 도핑기구(WADA)에서 2등급으로 분류하고 있는 금지약물이며, 테스토스테론과 유사한 동화작용 효과가 있다. 당시에는 도핑 테스트에서 성장호르몬을 검출하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악용한 것이다. 보시 같은 지하 세계의 도핑 전문가들을 ‘약물 코디네이터’라고 부른다.

‘쌓기’라는 방법도 있다. 쌓기는 적발되는 것을 막기위해 소량의 다양한 약물을 함께 투여해 시너지를 얻는 방법이다. 검사도 피하고 원하는 효과를 극대화하는 정밀한 기법이다. 도핑 테스트를 피하더라도 약물의 부작용 증상이 나타나면 의심을 받을 수 있는데, 이를 피하기 위해 부작용을 억제하는 약물을 함께 ‘묶어’ 복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동화작용 스테로이드를 오랜 기간 복용할 경우 남성도 여성처럼 유방이 발달할 수 있다. 이것을 막기 위해 유방암 치료제로 널리 쓰이는 타목시펜을 함께 묶어서 투약한다. 도핑 약을 체내에서 빨리 배출하기 위해 소변을 촉진하는 이뇨제나 프로베네시드 같은 약을 도핑 약물과 함께 조합한다. 이때 사용되는 물질들을 ‘차폐 물질’이라고 부르며 역시 금지약물로 지정돼 있다. 세계반도핑기구(WADA)는 차폐물질만 검출돼도 도핑을 한 것으로 간주해 처벌한다.

약물의 양을 조절해서 도핑을 피하는 방법도 있다.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이 방법은 약을 꾸준히 투여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 기간에는 정상 복용량의 10배에서 100배까지 복용해 효과를 극대화하고 난 뒤, 대회 전후로는 먹지 않아 도핑 테스트를 피하는 방법이다. 간단해보이지만 실제로 약품마다 체내에서 반감기에 차이가 있어 역시 전문 코디네이터의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다.
 
1년에 수차례씩 도핑테스를 받는 정상급 선수들이 불법 약물을 사용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박태환 몰랐어도 책임 피하긴 어려워

이처럼 반도핑 기술이 점점 더 교묘해지고 있어 세계반도핑기구는 이를 막기 위해 고의성 여부와 상관없이 오직 결과만을 놓고 처벌하고 있다. 또 약물이 체내로 유입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선수 개인의 책임이라고 못박고 있다. 박태환과 치료를 담당한 의사 모두 조사에서 “문제가 되는 약품인지 몰랐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책임을 피할 수 없어 보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치료를 담당하는 의사를 선택한 것도 박태환 본인이다. 만약 박태환 같은 운동선수가 병원을 방문했을 경우에는 자신이 도핑 테스트 대상인 것을 명확히 밝혀야 하며 스스로도 도핑 금지 약물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WADA는 매해 금지약물 목록을 발표하고 있다.

선수는 금지약물을 늘 숙지하고 의사에게 진료 받을 때 제출해 미연의 사고를 방지해야 한다. 순수한 치료목적이어도 사전에 미리 해당 국가의 도핑방지위원회에 복용량과 기간을 고지해야 하며 어겼을 경우 역시 처벌을 받는다. 운동을 업으로 하는 선수에게 ‘몰랐다’라는 것은 절대 나와서는 안 되는 변명이다. 이번 일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든 국제스포츠계의 관행은 박태환에게 책임을 묻는다. 만일 박태환이 100% 실수였다면 우리로서는 참 안타까운 일이다.

박태환의 라이벌인 쑨양도 2014년 5월 도핑테스트에 적발돼 3개월 선수 자격정지의 비교적 가벼운 처분을 받았다. 그가 복용한 약품은 트리메타지딘으로 어지러움, 이명과 협심증에 사용되던 약품이다. 이 약이 금지약물이 된 이유는 정신자극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쑨양이 평소 심장병이 있었고, 정신자극제가 수영 선수의 기록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 도핑 목록에 뒤늦게 추가된 것을 몰랐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 심각한 처벌은 피할 수 있었다.

박태환과 쑨양은 둘도 없는 라이벌이자 친구였다.


글래디에이터도 도핑을 했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스포츠계의 금지 약물들)

금지약물을 금지해야 하는 이유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금지약물을 사용하는 선수를 잡아내기도 어렵고, 절차 또한 이렇게 복잡하다면 전면적으로 약물을 허용하는 것은 어떨까. 한국도핑방지위원회는 금지약물을 지정하는 기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메이저리그 홈런 신기록을 세운 배리 본즈는 자신이 뛰던 홈구장에서 이름조차 불리지 못한다.
즉 도핑이 스포츠 정신에 위배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선수의 건강을 해칠 수 있기 때문에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약품 대부분은 긍정적인 효과만큼 부작용이 크다. 또 연구실에서 확실하게 효과가 밝혀진 약품은 사실상 동화작용 스테로이드 뿐이다. 암스트롱이 사용한 에리스로포이에틴은 호흡곤란, 가슴통증을 유발할 수 있다. 바이오제네시스 스캔들의 주인공인 성장호르몬은 내장이 비정상적으로 커질 수 있으며 고혈압과 동맹경화를 일으킨다. 따라서 선수 자신부터 눈앞의 성적 때문에 자신의 몸을 망치는 어리석은 짓을 경계해야 한다.
 
1. 선수의 경기력을 향상시키거나 경기력을 향상시키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

다시 본즈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약물을 하기 전에도 본즈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손에 꼽히는 위대한 타자였다. 당시 기록만으로도 ‘명예의 전당’은 따 놓은 당상이란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런 그가 홈런마저 뻥뻥 때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그에게 비법을 물었다. 본즈는 “홈런이냐 아니냐는 얼마나 많은 훈련을 하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라고 대답했다. 누구도 그땐 그 노력이 약물을 뜻하는지 몰랐다. 스테로이드로 본즈는 신이 됐지만, 스테로이드 때문에 그는 이제 자신의 홈구장에서 이름조차 불리지 못한다. 명예의 전당은 아예 불가능해졌다. 만약 추가조사를 통해 박태환의 고의성이 드러난다면 우리는 이제 또 다른 본즈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박태환이 우리에게 줬던 커다란 감동을 생각하며 그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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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에디터

    송준섭 기자
  • 황세진 다보스병원 약제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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