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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수백 명이 사망한 사고는 많은 분들에게 충격과 공포 혹은 슬픔과 분노를 불러일으켰 어요. 세계 조선업 1위이자 ‘과학대국’이라는 평판이 부끄러울 정 도로, 우리는 배가 조금씩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멍하니 보 고 있어야 했죠. 그리고 하나둘 숨겨져 있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울컥한 마음마저 들었어요. 굳이 이 가슴 아픈 이야기를 또 다시 꺼낼 필요가 있을까, 이번 호를 준비하면서 많 이 망설였어요. 그러나 구조 작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외상 후 스 트레스 장애’라는 단어가 언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을 보면서, 이번에 이 문제를 꼭 다루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PTSD, 미국 반전주의자들의 발명품
캐나다 맥길대 의료인류학자인 앨런 영(Allan Young)은 ‘착각 들이 만들어낸 조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발명’이라는 책 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다시 말해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라는 정신질환이 어떻게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 었는지 자세히 쓰고 있어요.
PTSD라는 진단명은 1970년대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온 미국 병사들에게 처음 쓰였어요. 베트남 전쟁은 처음부터 미국 국민들 의 지지를 얻지 못했어요. 특히 1,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경 제적 호황과 자유를 누리고 있던 미국인들은 젊은이를 잔혹한 전 장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고, 또 베트남의 민족 문제에 굳이 개입 해야 하는 도덕적 명분도 찾지 못했지요.
미국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거세지는 동안, 참 전 군인들은 전투의 패배를 맛본 채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고국 으로 쓸쓸히 돌아와야 했어요. 그동안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던 정신과의사와 심리학자 그리고 사회복지사들은 참전 군인들이 귀국 후에 심각한 혼란과 고통을 겪고 있는데도 국가에서 충분한 대우와 보상을 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노했죠. 이들은 참전 군인들이 전쟁 경험 이후 얼마나 심각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지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어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고통 을 강조하다보니 베트남 참전 군인들을 모두 치료를 받아야 하는 정신병 환자로 만들고 말았지요.
각종 정치적 집회와 로비가 이어지던 끝에 미국 정신의학협회 는 상당수의 참전 군인들이 치료가 필요한 정신 상태에 놓여 있 다는 의견을 받아들였어요. 1980년 PTSD는 미국정신의학회의 공식적인 정신장애 진단목록(DSM)에 새롭게 포함되었어요. PTSD는 이제 의학적 병명이 되었고, 이 질환을 앓는 사람들은 환자로서 특별한 법적·의료적 보살핌을 받을 수 있게 되었죠. 베 트남 참전 군인들을 돕고자 했던 전문가들의 뜻이 이루어진 셈이에요.
군인이 전쟁을 두려워해야 정상인가
그러나 이 사실이 긍정적인 효과만을 낳지는 않았어요. PTSD 가 ‘실재하는 질병’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전문가들은 인류 의 역사 속에 PTSD가 지속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줄 사례 들을 찾기 시작했지요. 이를 위해 셰익스피어 희곡에 등장하는 인 물들과 심지어 수메르 전설 속의 영웅 길가메쉬(Gilgamesh)마저 도 언급이 되었죠. 또 그동안 ‘탄환 충격’(shell shock)이나 ‘전투 피 로감’(battle fatigue)과 같은 용어로 다루어졌던 1, 2차 세계대전 참 전 군인들의 정신건강 문제도 새롭게 PTSD라는 병명으로 진단되 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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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은 전쟁 후 심각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곤 한다.
②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이 사살한 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 군인들. 잔혹하게 사람을 죽이는 경험도 군인들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로 남는다.
②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이 사살한 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 군인들. 잔혹하게 사람을 죽이는 경험도 군인들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로 남는다.
처음엔 베트남 참전 군인들을 위한 행동에서 출발했을지 몰라도, PTSD라는 병명은 인간의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뒤바꿔놓았어요. 그 전만 해도 군인이 전투경험을 두려워한다면 심리적으로 허약하고 군인답지 못하다고 생각되곤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군인이 전쟁 경험을 두려워하는 일을 지극히도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여기게 됐지요.
PTSD를 옹호했던 학자들은 이렇게 말했어요. “전투를 경험한 뒤 혼란스러워 하는 군인들을 비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이들은 전쟁이라는 비정상적인 사건에 의해 충격을 받았다는 점에서 매우 정상적이다.” 결국 군인들이 전쟁을 트라우마로 경험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고, 그들은 치료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어요. 반대로 트라우마를 겪지 않는 군인들은 어딘가 비정상적일 수 있다고 생각됐지요.
또 PTSD는 정신질환의 대상을 개인에서 간접적으로 영향 받은 집단으로 넓혔어요. 베트남전 이후 미국의 일반 국민들도 PTSD 증상을 호소하기 시작한 거죠. 최근 세월호 사건을 보며 함께 고통을 느꼈던 많은 사람들처럼요. PTSD는 예상할 수 없는 대규모의 사고와 재해 속에 사는 우리 현대인에게 일상적인 증상이 돼 버렸어요.
PTSD의 사례는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지식이 어떻게 새로운 현실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 영향을 끼치는가를 드러내죠. 다시 말해 어떻게 사회에서 전쟁이나 재해가 이해되는지, 그 결과 치료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어떻게 선정되는지, 누가 국가의 보상과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등과 같은 ‘현실’ 말이에요.
쓰나미 이후 스리랑카 사람들의 대처법
PTSD의 진단과 치료를 통해 전쟁이나 재해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좀 더 빨리 회복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에요. 그러나 과연 어떤 방법이 최선일까요. 에단 와터스의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는 우리가 마음의 문제를 다루면서 미국식의 과학적, 의학적 관점을 무분별하게 옳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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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쓰나미가 인도양 연안 국가들을 휩쓸며 무려 25만 명의 사망자를 내자, 스리랑카에는 전 세계에서 구호 물품과 전문가들의 손길이 쇄도했어요. 특히 생존자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우려한 미국인 심리치료사들은 스리랑카를 방문해서 신속한 심리 치료를 제안했어요. 미국에서 사용하는 방식대로, 이 들은 생존자들에게 ‘고통을 회피하지 말고 직면할 것’과 ‘기억회상 하기’ 등을 요청했죠. 인력이 부족했기에 현지인 상담사들도 같은 기법으로 훈련시켰어요. 이들은 정신의학적 지식에 근거해, 쓰나 미와 같은 가공할 고통에 직면했을 때 대개 그 고통을 회피하고 부인하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심리적 결과는 더욱 끔찍하게 다가 온다고 굳게 믿고 있었어요.
미국인 치료사들은 PTSD를 치료한답시고 ‘직설화법’을 권장했 어요. 그러나 이 기법은 30년이 넘도록 민족간 종교 분쟁을 치르 면서 스리랑카 주민들이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해 온 ‘완곡어 법’과 전혀 맞지 않았어요. 주민들은 끔찍한 내전을 겪으며 ‘전쟁’ 이나 ‘폭력’처럼 직접적인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고 ‘나쁜 일’ 정도 로 돌려서 표현해왔어요. 상처를 조장하거나 고통에 빠지는 것을 막으려는 노력이었지요. 하지만 미국인 치료사가 권장한 직설화 법은 오히려 현지인들에게 고통과 불안을 강화시키는 또 다른 심 리적 쓰나미가 되고 말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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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미국 심리치료사들은 현지인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쓰나미 피해지역으로 급파됐다.
② 쓰나미에서 살아남은 주민들은 서양의사들에게 심리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오히려 상처가 커지기도 했다.
③ 2004년 겨울 쓰나미가 스리랑카 등 인도양 연안 국가들을 휩쓸며 수많은 이재민을 만들어냈다.
숱한 전쟁의 역사 속에서, 스리랑카 사람들은 그들의 정신건강 을 개인의 심리 치료보다는 종교와 끈끈한 공동체에 의존하고 있 었지요. 물론 이러한 문화적 차이는 미국 전문가들에게 잘 이해 되지 않았어요. 스리랑카의 어떤 엄마는 또 다시 이러한 일이 닥 치면 어떻게 하느냐고 불안에 떠는 아들에게, “또 다시 공격을 당 해서 죽는다면 모두 함께 죽을 것”이라고 말했죠. 아들은 엄마와 떨어지는 걸 가장 두려워 했어요. 엄마는 아들에게 설령 같이 죽 을지언정 절대 혼자 남지 않게 할 것이라고 달랬던 것이지만, 미 국인 치료사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위로의 방식이었죠.
치료를 넘어 관계의 회복으로
세월호 생존자들이 겪고 있는 충격과 고통은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요? 미국의 참전 군인들처럼 PTSD 치료법이 필요할까요, 아 니면 스리랑카의 주민들처럼 강한 종교와 공동체의 결속에 의존 해야 할까요? 물론 둘 중의 하나만을 꼭 선택해야 하는 것도 아니 고, 우리 사회에 가장 맞는 제3의 방식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가장 중요한 건 실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우 리가 진심으로 읽을 준비가 되어 있느냐일 거예요. 그 고통이 ‘그 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래서 단지 위로의 말이나 구호품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함께 공 감하고 고통 받는 이들이 바라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면 조금은 빨리 나아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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