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Editor/2014/02/2144137392530bffce80047.jpg)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Editor/2014/02/1423865299530bffdac2588.jpg)
빛조차 빨아들인다는 블랙홀은 실제로 존재하는 천체다. 태양보다 10배 이상 무거운 별이 핵융합 연료를 다 쓰고 나면 중력을 이기지 못해 응축된다. 이때 높은 압력으로 새로운 종류의 폭발이 일어나면서 잠깐 동안 그 밝기가 은하 하나와 맞먹는 초신성이 된다. 이 초신성을 밝히는 연료가 며칠 안에 다 소진되고, 이후 다시 응축해 남는 잔해가 블랙홀이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블랙홀 연구를 주도한 물리학자 중 한 명인 호킹이 블랙홀이 없다고 했다?
문제는 ‘사건의 지평’
블랙홀의 가장 잘 알려진 성질은 아무것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점이다. 블랙홀은 주변의 모든 것을 끌어들이지만, 일단 들어가면 그 안에서 아무것도 나올 수 없다.
따라서 (일반상대성이론의 범주 안에서는) 블랙홀의 크기와 질량이 늘어날 수는 있어도 줄어들 수는 없다. 블랙홀이 이처럼 ‘일방통행’하는 이유는 블랙홀의 표면에 있다고 생각되는, 그리고 블랙홀이라는 천체의 전형적인 특징인 ‘사건의 지평(Event Horizon)’ 때문이다.
사건의 지평을 조금 더 설명하면 이렇다. 블랙홀 외부에 있는 우리 입장에서 블랙홀의 안쪽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안쪽이라는 ‘장소’가 실은 무한히 먼 미래라는 ‘시간’의 개념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는 갈 수 있지만 거기서 돌아올 수는 없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이유로, 블랙홀 표면 너머의 안쪽으로 들어갈 수는 있지만 그곳 혹은 그때에서 돌아올 수도, 그 안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블랙홀 표면의 성질을 종합해서 지칭하는 용어가 사건의 지평이다.
호킹의 이번 주장은, 몇몇 기사의 제목처럼 블랙홀에 해당하는 천체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고전적인 블랙홀의 표면에 있다고 생각되던 이 사건의 지평이라는 존재가 오해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블랙홀과 양자역학의 충돌
호킹이 일약 이론물리학계의 스타로 떠오른 것이 약 40년 전의 일이다. 크기와 질량이 줄어들 수 없는 고전적인 블랙홀이지만, 양자적으로는 열에너지를 발산하며, 따라서 에너지보존법칙에 의해 그 크기가 줄어들 수 있다는 그의 발견 때문이다. 이번 이야기를 위해서는 이 엄청난 발견의 의미를 잠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고전적인 블랙홀이 완벽한 흡수체라면 양자적인 블랙홀은 1970년대 학교 교실에 있던 구식 난로에 가깝다. 빨아들인 물체나 에너지가 열에너지의 형태로 다시 조금씩 방출된다는 것이다. 결국 주변에 빨아들일 물체가 없다면 블랙홀이 먹지는 못하면서 열은 계속 방출하므로 자신의 몸을 줄여갈 수밖에 없고, 따라서 언젠가는 사라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발견은 이론물리학자들에게는 매우 오랫동안 두통거리였다. 양자적 블랙홀과 구식 난로 사이에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차이가 하나 있기 때문이다. 구식 난로는 연기 배출구와 산소 흡입구가 달린, 철로 만든 통이다. 그 안에 석탄이나 나무를 넣고 태우면 그 불길이 난로 표면을 데우고 뜨거워진 표면은 복사에너지(열)를 내보낸다. 이때 나오는 온기만으로 난로 안에서 무엇이 타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당연한 대답은 뚜껑을 열어 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블랙홀에는 열어볼 수 있는 뚜껑이 없다. 블랙홀 표면에 있는 사건의 지평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빛이 나올 수 없으니, 무엇이 들어갔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블랙홀은 무슨 연료를 쓰고 있는지 근원적으로 알 방법이 없는 난로인 셈이다.
문제는 ‘근원적으로 알 방법이 없다’는 말과 ‘블랙홀이 양자역학적으로는 소멸할 수 있다’는 두 이야기를 동시에 한다는 것이 양자역학의 근저에 있는, ‘정보의 보존’이라는 대전제를 위배한다는 데 있다. 이로 인해 양자역학과 블랙홀, 좀 더 크게는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이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이는 지난 40여 년 동안 이론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였다.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Editor/2014/02/1373977464530c0082703de.jpg)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Editor/2014/02/51984854530c00892f636.jpg)
‘불의 장벽’의 등장
그러나 이런 주장은 1990년대 초반에 정점을 찍고, 그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다. 블랙홀의 주요 열역학적인 성질들인 엔트로피와 호킹 온도를, 양자역학적으로 일부나마 설명해 낸 초끈이론 더분이다.
1980년대 호킹을 상대로 벌인 끈 이론의 대가 레너드 서스킨드와 199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제라르 토프트의 논쟁, 1990년대 중반 초끈이론의 놀라운 발견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2004년 호킹 자신이 이런 변화를, 조금은 뜬금없이 받아들인 일 등은 유명한 사건이다.
어쨌든 최근까지 호킹을 포함한 학자들 사이의 여론은 블랙홀과 양자역학은 실제로 양립할 수 있다는 데까지 모아졌다. 무엇이 블랙홀을 만들었고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는지에 대한 모든 정보를 되찾고 싶으면, 블랙홀 자체가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의 복사열을 다 모아 한꺼번에 분석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간접적인 증거만 많을 뿐 아직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렇게 불편하게 지속되던 블랙홀과 양자역학의 ‘동거’도 2년 전 대표적인 초끈이론 학자인 미국 UC산타바바라 조셉 폴친스키 교수 등의 발견으로 무참히 깨졌다. 이들은 양자역학과 블랙홀의 공존이 위에서 언급한 방식으로 이뤄진다면, 블랙홀 표면 즉 사건의 지평에 매우 뜨거운 ‘불의 장벽(Firewall)’이 있어야 함을 보여줬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양자적인 블랙홀이 난로와 같이 완벽한 복사열을 뿜어내는 것은 사건의 지평이 차갑고 완벽한 진공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난로가 따뜻하려면 난로 표면은 아주 차가워야 한다는 말처럼 이상하게 들리지만, 사건의 지평이라는 이상한 ‘곳(때)’이 양자장론이라는 난해한 이론을 만나 일어나는 엄연한 현실이다. 불의 장벽은 블랙홀이라는 이 이상한 난로가 더 이상 차가운 표면을 가지지 못하고, 그래서 블랙홀에서 나오는 열복사의 형태가 원래 생각과는 많이 다를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불의 장벽을 실존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려면 사건의 지평 부근에서부터는 일반상대성이론을 수정해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결론에 다다르고, 이는 이론물리학자들에게는 양자원리가 옳지 않다는 말만큼이나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다.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Editor/2014/02/147282305530c00c87c195.jpg)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Editor/2014/02/1030146490530c00d8a1346.jpg)
호킹과 ‘퍼즈볼 가설’
지난해 8월 UC 산타바바라에서는 ‘블랙홀 우주’라는 주제로 관련 학자들의 모임이 열려 이에 대한 여러 견해가 발표됐다고 한다. 그 중 호킹은 스카이프를 통해 8분 가량 화상 발표를 했으며, 지난 1월 이를 토대로 ‘정보 보존, 그리고 블랙홀 기상예보 (Information Preservation and Weather Forecasting for Black Holes)’ 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논문 형식을 빌려 발표했다. ‘호킹이 블랙홀이 없다’고 주장했다는 최근의 보도들도 이 논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킹의 결론만 말하자면, 고전적인 블랙홀의 통상적인 모습은 표면 부근까지만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표면 바로 아래부터는 마치 초음속비행기 주변이나 돌개바람 주변의 공기처럼 예측할 수 없이 복잡한 중력 현상이 있고, 이 때문에 내부는 복잡한 미로와 같아지며, 이 미로에 물질이 오랜 시간 갇히는 것 때문에 고전적인 블랙홀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다시 풀어보면 사건의 지평 자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블랙홀에서 무언가 나오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말이 되고, 결국 이는 블랙홀과 양자역학의 충돌이 원래부터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Editor/2014/02/1353298896530c01042a79d.jpg)
외국의 여러 물리학자들이 이미 언급했듯이, 사실 두 쪽 남짓한 이번 글의 본문에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아무런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 양자역학을 버릴 수도 없고 불의 장벽도 말이 안 되는 것이므로, 남은 가능성은 그 동안 사용해온 고전적인 블랙홀의 모습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호킹의 이번 주장은 이미 10년 넘게 회자되고 있는 소위 ‘퍼즈볼 가설’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퍼즈볼 가설에서는 블랙홀의 표면 바로 아래부터의 안쪽은 일반상대성이론의 범주에서 이해할 수 없는 시공간 구조가 있고, 거기에는 초끈 등이 실타래 뭉치와 같은 형태로 꽉 차 있으며, 이로 인해 사건의 지평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호킹은 퍼즈볼 가설의 기본 개념을 차용하되 초끈이론이 아닌, 일반상대성이론의 범주 안에서 구현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블랙홀과 양자역학을 둘러싼 이런 혼란이 결국 어떻게 해결될지는 지금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난 20년간 초끈이론과 양자중력의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바로 블랙홀과 양자역학이 공존할 수 있느냐, 그리고 그렇다면 정확히 어떻게 공존하느냐 하는 물음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됐다는 그간의 성급한 여론이 어쩌면 양자적 시공간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방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 재미있는 일이 많이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으로 올 한 해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