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국제공항에서 울란바토르 행 비행기 탑승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어리둥절했더니 그 여성은 다시 영어로 물어왔다.
“Aren’t you a Mongolian? Oh, I’m sorry.”
몽골인처럼 보인다는 말 아닌가. 적잖이 충격을 받은 채로 비행기에 올랐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까지는 약 4시간 거리. 보얀트-우하 공항에 내려 몽골 땅을 밟은 순간 영하의 쌀쌀한 날씨와 목이 금방 칼칼해질 정도로 건조한 공기가 느껴진다. 입국 수속을 하는 동안 도무지 누가 일행이고 누가 공항 직원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한국인과 몽골인은 정말 비슷하게 생겼다.
10월 11일 취재팀의 목적지는 울란바토르에서 헬리콥터로 약 4시간 거리에 위치한 나란 솜(솜은 우리나라의 읍·면 정도의 행정구역). 헬리콥터 안에서 내려다본 나란은 그야말로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다. 2백가구 정도가 사는 이 마을에 순수 한국 기술로 제작된 태양광·풍력 발전시스템이 설치돼 그 준공식이 있을 예정이다.
게르 1백60호에 전기 공급
마을 전체는 온통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다. 코흘리개 어린아이를 들쳐업고 나온 어머니, 교복을 차려입고 꽃다발과 한글로 쓴 플랜카드를 흔드는 학생들, 무슨 구경거리 났나 하고 모여든 동네 건달들. 울타리 하나 없이 문을 활짝 열어둔 허름한 집, 여기저기 쌓여 있는 가축의 배설물, 동네 전체가 집인 양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니는 소와 말. 우리나라 60-70년대 농촌 풍경이 연상된다. 순간 갑자기 약 10m 앞에 나타난 커다란 검은색 늑대가 눈에 들어온다. 잔뜩 겁을 먹은 채로 걸음을 멈추고 뛸 준비를 했다. 그런데 늑대가 아니라 개란다. 이 동네 개는 생긴 모양이 꼭 야생 늑대 같다.
야외에서 진행된 준공식에서 마을대표 손또르 씨는 “주민들을 대신해 한국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고 말했다. 취재팀은 학교와 병원을 둘러봤다. 약 15명의 학생이 공부할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교실 천장에 전구가 한개 달려 있다. 선생님이 교실 앞쪽에 있는 컴퓨터를 가리키며 “한국에서 기증해준 것”이라고 설명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흐린 날에는 학교 수업이 쉽지 않았고, 병원에서는 밤에 진료조차 어려웠다. 불안정한 디젤발전기에 의존해 전기가 하루 5-6시간 정도밖에 공급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각 가정에까지 모두 전기가 공급되기란 도저히 무리였다. 현재 나란에는 5kW급 태양광 발전시스템과 3kW급 풍력 발전시스템이 설치됐다. 이 시스템으로 흑백 텔레비전, 라디오, 전구가 1개씩인 약 1백60개 가구에서 사용할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몇주 전부터 학교, 병원, 마을회관과 같은 공공시설에 먼저 전기가 공급되고 있다.
주민들은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위해 정성껏 음식을 준비했다. 음식은 기름지고 짠 편이다. 이런 식습관 때문에 몽골인의 평균 수명은 우리나라보다 짧다고 한다. 음식에 필요한 물은 멀리 떨어진 샘에서 길어온다.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이나 황무지이기 때문에 채소나 과일도 귀하다. 유목민들은 주로 소고기와 양고기를 먹는다. 이곳에서는 소고기가 가장 싸고, 돼지고기가 가장 비싸다. 또 소젖이나 말젖으로 우유 또는 술을 만들어 먹는다. 하지만 처음 맛보는 사람은 특유의 냄새 때문에 쉽게 입에 대지 못하기도 한다.
말린 소똥 태워 난방
몽골 유목민족의 전통적인 주거형태는 게르(Ger). 원기둥 모양의 건물에 원뿔 모양의 지붕을 얹었다.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가죽으로 둘렀다. 게르 안에 모인 취재팀은 전등에 불이 켜지자 일제히 환호했다. 발전시스템이 가동되기 전 밤에는 게르 안보다 밖이 달빛이 있어 오히려 밝았다.
벽을 따라 침대가 놓여 있고 가운데 난로가 있다. 주민들은 가축의 배설물을 말려 연료로 사용해 난방을 한다. 그래서 게르 안에는 배설물이 타는 냄새가 배어 있다. 지붕 꼭대기는 환기를 위해 조금 뚫어 놓는다. 그 사이로 보이는 사막 밤하늘의 별이 선명하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나무기둥은 82개. 이는 유목민 부족 수를 의미한다고 한다.
발전시스템을 설치하기 위해 몇주 동안 주민들과 함께 생활한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의 김홍우 박사, 대구도시가스(주)의 황정훈 박사, 김만일 계장이 취재팀과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인다. 사업 책임자인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송진수 박사는 “우리나라 기술로 유목민족을 돕는데 보람을 느낍니다”라면서 “전기가 충분히 확보되면 개간용 펌프의 전원으로 사용해 지하수를 끌어올릴 수 있죠. 사막을 농지로 개간하면 황사 현상도 감소할 겁니다”라고 예상한다.
영어선생님조차 영어로 대화를 못하는데 어떻게 주민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김 박사는 “한국인이든 몽골인이든 모두 같은 사람이죠. 비록 말이 통하지 않아도 이제 눈빛만 보면 그들이 어떤 의미를 전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며 너털웃음을 웃는다. 김 박사와 황 박사는 말타는 실력도 수준급이다. 김 계장은 “주민들은 전기를 공급해준 것에 대해 고마워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전기가 없어도 얼마든지 생활할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 전기가 없으면 없는 대로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 사는 것이 유목민들의 삶이다. 문명의 이기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은 그 혜택을 받지 못할 때 불편함을 느낀다. 문명의 이기의 필요성은 그것을 몰랐던 사람보다 겪어본 사람에게 더 절실한지도 모르겠다.
몽골리안 보드카 사양하는 방법
다음날 새벽 4시. 사막에서의 일출을 보기 위해 취재팀은 졸린 눈을 비비며 차에 올랐다. 가로등도 도로도 없는 모래길을 운전기사는 잘도 찾아 달린다. 심하게 덜컹거리던 차가 갑자기 멈춰선다. 모래 구덩이에 빠져버린 것이다. 난감했다. 허허벌판에 영하 10℃를 밑도는 듯한 추위.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무슨 방법으로 차를 끌어올린단 말인가. 뒤에서 밀고 모래를 파고 연신 애를 쓴다. 그러다가 마침 앞질러 가던 차가 되돌아왔다. 앞차에 밧줄을 매고 당겨 간신히 빼냈다. 십년감수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구나 싶다.
우여곡절 끝에 커다란 언덕 근처에 도착했다. 꼭대기에 시멘트로 만든 게르가 보인다. 신을 모셔놓은 곳이란다. 올라가려고 하니 한 주민이 다짜고짜 앞을 가로막는다. 몽골의 관습에 따라 여자는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서운했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옛말을 새겨 차안에서 취재노트를 정리했다. 우리나라에서 보는 일출보다 더 멋있지는 않다는 일행들의 말에 위안을 삼는다.
운전기사는 연신 몽골리안 보드카를 마셔댄다. 영락없는 음주운전이다. 하지만 저렇게 마셔야 추위를 견딜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자신의 배를 가리키면서 “보드카, 보드카!”라고 외친다. 뱃속에 보드카가 가득 들어있단 얘기다. 몽골인들은 취재팀에게도 자꾸 보드카를 권한다. 마시기 싫으면 넷째 손가락으로 술을 찍어 한번 튕기고 이마에 찍은 다음 입만 잔에 대고 다시 주면 된다.
파카 무색한 영하 40도 강추위
나란에 머무는 동안 내내 바지를 두개나 껴입고 스웨터에 파카로 단단히 무장했는데도 춥다는 느낌이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울란바토르보다 남쪽이지만 고도가 5백m 가량 더 높아 한겨울의 기온은 영하 40℃를 밑돈다고 한다.
이런 혹한에서 태양광·풍력 발전시스템이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또 모래가 날려 시스템에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따라서 사업팀은 준공식 이후 1년 동안 현지 실증시험을 통해 급변하는 기상조건에 견딜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선, 최적 운영 방안을 도출할 예정이다.
나란 아이들의 눈망울은 그야말로 선하다. 사탕과 껌을 조금씩 쥐어줬더니 취재팀을 계속 졸졸 따라다닌다. 이 아이들의 눈망울에 한국인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지 자못 궁금해진다. 취재기간 내내 통역을 맡은 오유나씨는 한국 화장품을 애용한다. 또 엔지니어 투멘자르갈 씨는 “몽골인들은 한국을 매우 좋아하고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한다”고 설명한다.
첫날 인천공항에서 말을 걸어왔던 몽골 여성을 울란바토르에서 다시 만났다. 알고 보니 한국의 태양광·풍력 발전기술을 배우기 위해 사업팀에 합류한 대학원생인 투야 씨였다. 몽골인들의 코리안 드림에 한국의 기술력이 보탬이 되리라 믿는다.
서로 돕는 두레 풍습에서 힌트 얻어 명명한 ‘DURE-Gobi Project’
2003년 6월 유목민들에게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자 태양광·풍력 발전시스템을 설치하기 위한 ‘두레(사막지역 전화사업을 위한 태양광·풍력 발전시스템 적용기술 개발, DURE)-고비(Gobi)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산업자원부가 지원하고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과 몽골 기간산업부가 주관하는 이번 국제 공동 연구 사업에는 대구도시가스(주) 외 5개 업체가 참여했다. 2005년 5월까지 총사업비 9억7천5백만원이 소요될 예정이다.
사막은 일사량이 풍부해 태양광 발전에 유리하다. 또한 사막에는 일정한 속도로 강한 바람이 계속 불기 때문에 햇빛이 없는 밤이나 일조시간이 짧은 겨울에는 풍력 발전이 가능하다. 태양광·풍력 복합 발전시스템은 기상조건을 활용하므로 오염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는 국내에서 개발된 제품과 기술만을 사용해 해외에 설치된 첫 시스템이다. 송 박사는 “이 사업이 관련 기술 및 제품 수출 활성화에 한몫할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사업 전담관리기관인 에너지관리공단의 김계수 박사는 “게르 10만호에 발전시설을 공급할 몽골 정부 계획에 한국의 참여 기반을 확보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업팀은 10일 울란바토르에서 태양광 가로등과 분수대의 점등식 및 제막식도 개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