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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서울에서 새벽같이 차를 타고 달려 세 시간 만에 도착한 강원도의 한 산골 마을. 그곳에서 다시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를 통과하고 공사 중인 다리를 건너니, 눈 덮인 사면 위로 비로소 작은 동굴 입구가 나타났습니다. 사람 한두 명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비좁은 입구가 바로 당신에게로 향하는 통로였습니다. 머리에 전등을 단 채 눈을 헤치고 조심조심 내려간 땅 속. 그 속에서 차가운 공기와 날카로운 얼음 기둥 사이를 한참 헤매고 나서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눈을 꼭 감은 채 세상에서 가장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당신을요. 바로 박쥐입니다.
당신은 박쥐. 전세계 포유류 종의 20%를 차지하는, 설치류 다음으로 다양한 포유류입니다. 온대와 열대 지방 전역에 걸쳐 1200여 종이 살고 있고, 우리나라에도 23종이 살고 있지요. 사람들은 막연히 당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며 많은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동굴에서 겨울잠을 자고, 활동기가 되면 팔과 다리, 꼬리 사이를 덮은 ‘날개막’이라는 피부막을 이용해 날아다닌다고 말합니다. 날개막 구조는 새나 화석 속의 익룡과는 다르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어두운 동굴에서도 길을 찾거나 먹이를 잡을 수 있도록 초음파를 낸다는 설명은 단골입니다.
하지만 당신만큼 사람들이 오해하는 동물도 드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매우 못생겼고 징그러우며, 재수가 없는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영화나 만화에서 기분 나쁜 악당의 소굴이나 마녀의 성 주위에는 꼭 달빛을 배경으로 당신의 그림자가 드리우곤 하지요. 심지어 병균이나 바이러스를 옮기고, 가축이나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다는 말까지 합니다.
저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당신에 대해 거의 모른다고요. 당신을 만나는 길이 이렇게나 멀고 험한데, 그리고 당신을 만나 얼굴을 마주하 려는 노력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당신을 꼭 만나야겠다고요. 만나서 지구상에서 가장 작고 귀여우며 이롭고 평화로운 포유류인 당신을 소개해야겠다고요. 그게 제가 이 동굴을 찾아온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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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동굴 속의 미녀
그런데 막상 들어온 이 동굴에서 당신은 저를 본체만체 하는군요. 괜찮습니다. 저 역시 곤히 잠들어 있는 당신을 깨울 생각은 없어요. 아직은 3월 초순. 당신이 겨울잠에서 벗어나기엔 이른 시기라는 것을 알거든요. 동굴에 들어와 처음 만난 당신의 이름은 물윗수염박쥐. 우리나라에 7종이 있는 윗수염박쥐속 중 하나입니다. 강원도에 흔한 석회암 동굴에는 틈이나 구멍이 많이 있는데, 당신은 굳이 그 비좁은 틈에 홀로 또는 두어 마리씩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아마 겨울이 시작되던 작년 11월에 그곳에 자리잡았겠지요. 활동기인 봄부터 가을까지 당신은 동강 등 주위의 강을 드나들며 물 위의 먹이(곤충)를 잡아 먹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겨울이 가까워옴을 예감하고는 이곳 동굴 천장에 잘 곳을 마련했겠지요. 안락한 바위 틈에요.
당신이 동굴 중에서도 천장의 구멍을 선호하는 까닭은 온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때문이겠죠. 동굴은 마치 땅 속에 묻은 호리병처럼 입구는 좁고 안은 넓습니다. 공기가 많이 드나들지 않으니 그 자체로도 내부 온도 변화가 크지 않아요. 그 중에서도 암벽에 있는 좁은 틈은 변화가 거의 없어 당신이 겨울잠을 자기에 최적입니다. 겨울잠은 먹이가 없는 겨울을 견디기 위해 몸의 대사율을 최저로 낮추는 활동입니다. 외부 온도가 오르락 내리락 하면 효율이 떨어지기에, 온도가 안정적인 곳을 찾는 것은 당신의 생존을 좌우하는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당신, 제가 동굴에 들어와 다른 종이 아닌 물윗수염박쥐를 처음 만
난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말하는군요. 당신이 동굴 입구에 자리잡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요. 네 알아요. 박쥐는 종마다 겨울잠을 잘 때 선호하는 온도가 있지요. 물윗수염박쥐는 지금 이곳의 온도인 3~5℃정도에서 겨울잠에 듭니다. 이보다 높은 온도에서는 잠을 잘 수 없어요.
그런데 같은 동굴 안에서도 위치에 따라 온도가 다르기 때문에 발견되는 당신의 종류도 다릅니다. 동굴 입구는 찬 외부 공기가 드나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온도가 낮습니다. 반면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공기 유입이 줄어들고 온도는 올라가지요. 한참 들어가면 온도가 더 이상 오르지 않는 지역이 나옵니다. 이곳을 ‘항온대’라고 합니다. 신비롭게도, 항온대의 온도는 그 지역의 연평균 기온과 같습니다. 중부지방인 이곳은 대략 13℃쯤 되겠지요. 입구는 3℃였으니, 동굴의 가장 깊은 곳과 입구는 거의 10℃나 차이가 나네요. 이렇게 동굴은 깊이와 구조에 따라 온도가 다양하기 때문에, 당신은 좋아하는 온도를 찾아서 겨울잠을 잘 수가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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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도계보다 예리한 온도 감각
그런데 당신, 제 얘기를 듣지 않고 있군요. 다시 깊은 잠에 빠져 있잖아요. 그런데…, 잘 보니 잠든 모습이 꽤 귀엽군요. 이성복 시인은 ‘파리도 꽤 이쁜 곤충이다’라는 시를 썼는데, 저는 ‘박쥐도 꽤 이쁜 동물이다’라고 노래하고 싶어지네요.
아무튼 더 들어보세요. 겨울잠을 자는 온도와 겨울잠의 시기, 그리고 분포의 관계는 우리나라 과학자가 밝혀낸 연구 결과예요. 김선숙 국립생
물자원관 동물자원과 박사팀은 윗수염박쥐속에 드는 또다른 박쥐인 붉은박쥐(일명 황금박쥐)의 동면 기간에 주목했습니다. 붉은박쥐는 다른 종보다 일찍(10월 중순) 겨울잠에 들고 이듬해 늦게(5월 중순) 깨어납니다. 겨울잠 기간이 무려 220일로 길죠. 한 해의 3분의 2를 잠을 자면서 보내는 셈이에요(참 팔자 좋은 박쥐죠).
김 박사는 붉은박쥐가 이렇게 기이한 겨울잠 패턴을 보이는 배경에 생태적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남 함평 지역의 30년 동안의 월별 최저기온을 구하고, 붉은박쥐가 동면하는 장소를 찾아 다니며 7년 동안의 온도를 조사해 비교해봤습니다. 그 결과 붉은박쥐의 동면 시기가 외부의 최저기온 변화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 올해 2월 ‘캐나다동물학저널’에 발표했습니다. 결과를 보면, 붉은박쥐를 동면에 이르게 하는 온도는 약 13℃였어요. 이보다 최저기온이 낮아지면 동면을 시작하고 이보다 높아지면 깨어나는 식인데, 그게 정확히 10월과 5월 중순이었습니다. 당신은 외부 온도에 따라 겨울잠 전략을 세우는 똑똑한 동물이었던 거예요.
김 박사는 붉은박쥐뿐 아니라 온대지역에서 동면을 하는 당신의 모든 친구들이 이런 법칙을 만족한다고 보고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가 완료되면, 당신의 분포와 동면 온도, 시기를 통해 기후변화를 추적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어떤 동물보다 예민하고 정확한 온도 감각을 지닌 당신이니, 정말 도전해볼 만한 연구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당신, 제 얘기를 듣지 않고 있군요. 다시 깊은 잠에 빠져 있잖아요. 그런데…, 잘 보니 잠든 모습이 꽤 귀엽군요. 이성복 시인은 ‘파리도 꽤 이쁜 곤충이다’라는 시를 썼는데, 저는 ‘박쥐도 꽤 이쁜 동물이다’라고 노래하고 싶어지네요.
아무튼 더 들어보세요. 겨울잠을 자는 온도와 겨울잠의 시기, 그리고 분포의 관계는 우리나라 과학자가 밝혀낸 연구 결과예요. 김선숙 국립생
물자원관 동물자원과 박사팀은 윗수염박쥐속에 드는 또다른 박쥐인 붉은박쥐(일명 황금박쥐)의 동면 기간에 주목했습니다. 붉은박쥐는 다른 종보다 일찍(10월 중순) 겨울잠에 들고 이듬해 늦게(5월 중순) 깨어납니다. 겨울잠 기간이 무려 220일로 길죠. 한 해의 3분의 2를 잠을 자면서 보내는 셈이에요(참 팔자 좋은 박쥐죠).
김 박사는 붉은박쥐가 이렇게 기이한 겨울잠 패턴을 보이는 배경에 생태적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남 함평 지역의 30년 동안의 월별 최저기온을 구하고, 붉은박쥐가 동면하는 장소를 찾아 다니며 7년 동안의 온도를 조사해 비교해봤습니다. 그 결과 붉은박쥐의 동면 시기가 외부의 최저기온 변화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 올해 2월 ‘캐나다동물학저널’에 발표했습니다. 결과를 보면, 붉은박쥐를 동면에 이르게 하는 온도는 약 13℃였어요. 이보다 최저기온이 낮아지면 동면을 시작하고 이보다 높아지면 깨어나는 식인데, 그게 정확히 10월과 5월 중순이었습니다. 당신은 외부 온도에 따라 겨울잠 전략을 세우는 똑똑한 동물이었던 거예요.
김 박사는 붉은박쥐뿐 아니라 온대지역에서 동면을 하는 당신의 모든 친구들이 이런 법칙을 만족한다고 보고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가 완료되면, 당신의 분포와 동면 온도, 시기를 통해 기후변화를 추적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어떤 동물보다 예민하고 정확한 온도 감각을 지닌 당신이니, 정말 도전해볼 만한 연구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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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박쥐는 없다
제가 동굴에서 두 번째로 만난 당신은 관코박쥐입니다. 뾰족한 코와 밝은 털색이 특징입니다. 이 박쥐 역시 몸통이 5cm를 갓 넘는 작은 박쥐입니다. 물윗수염박쥐보다는 조금 크지만, 여전히 작은 종이지요. 여기서 잠깐. 우리나라에서 만날 수 있는 당신은 대부분 크기가 작습니다. 4~5cm 사이가 가장 많고, 조금 크다 싶은 종도 8cm 정도가 고작입니다. 몸무게는 겨우 7~14g밖에 안 나갑니다. 그나마 겨울잠 자기 전에는 열심히 먹어서 체중을 20% 정도 찌우지만, 깨어날 때가 가까워온 지금은 도로 원래 체중으로 돌아옵니다.
당신이 이렇게 작은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리나라에 오직 ‘작은박쥐아목’에 속하는 박쥐만 살기 때문이에요. 전세계의 박쥐는 크게 큰박쥐아목과 작은박쥐아목으로 나뉩니다. 큰박쥐아목은 주둥이가 뾰족하고 눈이 크며 몸집도 거대해, 언뜻 보면 날아다니는 여우나 개처럼 생겼습니다. 그래서 ‘날여우박쥐’라고도 불리지요. 이 박쥐는 날개 길이가 최고 1.5m까지 갑니다. 하지만 대부분 열대와 아열대 지방에 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없습니다. 반면 작은박쥐아목은 극지방을 뺀 전세계에 사는데, 이름 그대로 크기가 아주 작답니다.
당신은 제게 문제를 내는군요. “서양사람들이 ‘뱀파이어’ 전설을 만든 흡혈박쥐는 어디에 속할까요?” 뱀파이어가 되려면 크기가 커야 할 것 같으니 큰박쥐아목에 속할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만, 틀렸네요. 큰박쥐아목 박쥐는 과일이나 꿀, 꽃가루를 먹고 사는 초식입니다. 작은박쥐아목이 육식성이고요. 물론 작은박쥐아목에 속하는 당신의 거의 대부분은 곤충을 먹을 뿐 피를 먹지 않아요. 흡혈박쥐는 오직 남미에만 사는 세 종뿐이며, 그나마 사람이 아닌 가축의 피를 먹습니다. 뱀파이어 전설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아요. 상식적으로, 당신의 그 작은 덩치로 사람에게 어떻게 달려들겠어요.
이제 저는 세 번째 당신과 만납니다. 뱀파이어 같은 외양에 당당한 풍채, 드디어 박쥐다운 박쥐를 만난 걸까요. 당신의 이름은 관박쥐. 이름도 왠지 관 속에 누워 있는 뱀파이어가 떠올라 으스스합니다. 하지만 착각입니다. 영어로는 ‘큰 말편자 박쥐’라고 합니다. 코 부분의 모양이 말 편자를 닮았거든요. 당신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박쥐 중에서는 덩치가 큰 편입니다. 길이는 6.5cm 정도로 차이가 별로 안 나지만, 무게가 18~20g으로 작은 종의 거의 두 배랍니다. 동면 직전에는 22~24g까지 나가요.
당신은 비교적 깊숙한 동굴에서야 겨우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온도가 8~10℃가 되는 곳에서 잠을 자니 당연하겠지요. 당신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박쥐고, 사는 곳도 제주도부터 강원도까지 넓습니다. 당신을 만나지 않으면 박쥐 탐사를 했다고 할 수 없답니다.
이제 두 번째 동굴로 갑니다. 이곳에서 만난 네 번째 당신은 검은집박쥐입니다. 겨울잠을 자지 않는 활동기에 집의 처마 밑에 사는 종입니다. 가끔 도시에서 저녁에 동네를 나는 박쥐를 본 사람이 있을 겁니다. 상당수는 집박쥐 또는 검은집박쥐입니다. 해가 질 때 가장 먼저 먹이 사냥에 나서는 종이거든요.
제가 동굴에서 두 번째로 만난 당신은 관코박쥐입니다. 뾰족한 코와 밝은 털색이 특징입니다. 이 박쥐 역시 몸통이 5cm를 갓 넘는 작은 박쥐입니다. 물윗수염박쥐보다는 조금 크지만, 여전히 작은 종이지요. 여기서 잠깐. 우리나라에서 만날 수 있는 당신은 대부분 크기가 작습니다. 4~5cm 사이가 가장 많고, 조금 크다 싶은 종도 8cm 정도가 고작입니다. 몸무게는 겨우 7~14g밖에 안 나갑니다. 그나마 겨울잠 자기 전에는 열심히 먹어서 체중을 20% 정도 찌우지만, 깨어날 때가 가까워온 지금은 도로 원래 체중으로 돌아옵니다.
당신이 이렇게 작은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리나라에 오직 ‘작은박쥐아목’에 속하는 박쥐만 살기 때문이에요. 전세계의 박쥐는 크게 큰박쥐아목과 작은박쥐아목으로 나뉩니다. 큰박쥐아목은 주둥이가 뾰족하고 눈이 크며 몸집도 거대해, 언뜻 보면 날아다니는 여우나 개처럼 생겼습니다. 그래서 ‘날여우박쥐’라고도 불리지요. 이 박쥐는 날개 길이가 최고 1.5m까지 갑니다. 하지만 대부분 열대와 아열대 지방에 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없습니다. 반면 작은박쥐아목은 극지방을 뺀 전세계에 사는데, 이름 그대로 크기가 아주 작답니다.
당신은 제게 문제를 내는군요. “서양사람들이 ‘뱀파이어’ 전설을 만든 흡혈박쥐는 어디에 속할까요?” 뱀파이어가 되려면 크기가 커야 할 것 같으니 큰박쥐아목에 속할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만, 틀렸네요. 큰박쥐아목 박쥐는 과일이나 꿀, 꽃가루를 먹고 사는 초식입니다. 작은박쥐아목이 육식성이고요. 물론 작은박쥐아목에 속하는 당신의 거의 대부분은 곤충을 먹을 뿐 피를 먹지 않아요. 흡혈박쥐는 오직 남미에만 사는 세 종뿐이며, 그나마 사람이 아닌 가축의 피를 먹습니다. 뱀파이어 전설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아요. 상식적으로, 당신의 그 작은 덩치로 사람에게 어떻게 달려들겠어요.
이제 저는 세 번째 당신과 만납니다. 뱀파이어 같은 외양에 당당한 풍채, 드디어 박쥐다운 박쥐를 만난 걸까요. 당신의 이름은 관박쥐. 이름도 왠지 관 속에 누워 있는 뱀파이어가 떠올라 으스스합니다. 하지만 착각입니다. 영어로는 ‘큰 말편자 박쥐’라고 합니다. 코 부분의 모양이 말 편자를 닮았거든요. 당신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박쥐 중에서는 덩치가 큰 편입니다. 길이는 6.5cm 정도로 차이가 별로 안 나지만, 무게가 18~20g으로 작은 종의 거의 두 배랍니다. 동면 직전에는 22~24g까지 나가요.
당신은 비교적 깊숙한 동굴에서야 겨우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온도가 8~10℃가 되는 곳에서 잠을 자니 당연하겠지요. 당신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박쥐고, 사는 곳도 제주도부터 강원도까지 넓습니다. 당신을 만나지 않으면 박쥐 탐사를 했다고 할 수 없답니다.
이제 두 번째 동굴로 갑니다. 이곳에서 만난 네 번째 당신은 검은집박쥐입니다. 겨울잠을 자지 않는 활동기에 집의 처마 밑에 사는 종입니다. 가끔 도시에서 저녁에 동네를 나는 박쥐를 본 사람이 있을 겁니다. 상당수는 집박쥐 또는 검은집박쥐입니다. 해가 질 때 가장 먼저 먹이 사냥에 나서는 종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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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부터 레이더까지 ‘첨단 포유류’
집박쥐는 다른 종과 조금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새끼를 많이 낳는다는 점입니다. 대부분 당신은 1년에 단 한 마리의 새끼를 낳습니다. 하지만 집박쥐만은 3~4마리씩 낳습니다. 당신이 새끼를 적게 낳는 것은 박쥐 특유의 번식 전략 때문입니다. 동면을 해야 하는 온대지방의 박쥐는 활동기가 짧습니다. 그래서 번식 성공률을 최대화하기 위해 적게 낳고, 대신 생존율을 높였습니다. 성체의 생존율 역시 높고(겨우내 동굴에 숨어 잠만 자는데 천적에게 먹힐 일이 없지요) 수명은 설치류의 3배(12~17년)에 이릅니다. 당신은 생존을 위해 최적화된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게다가 당신은 포유류계에서도 알아주는 첨단 능력을 지닌 동물입니다. 우선 유일하게 하늘을 납니다. 날다람쥐처럼 바람을 타고 내려오는 활강이 아니라 비행을 합니다. 더구나 어둠에 적응해 레이더 능력(반향정위)을 발달시켰습니다. 입으로 주파수가 수십~200kHz에 달하는 초음파를 1초에 10~200회 빈도로 발사한 뒤, 반사된 음파를 감지합니다. 초음파만으로 나방 같은 작은 곤충까지 사냥하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한때 과학자들은 당신의 두 가지 대표 능력 중 어떤 것이 먼저 생겼을까 논쟁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의 조상 화석들은 지금의 당신 모습과 별 차이가 없었거든요. 날개나 초음파를 내는 구조 둘 중 하나가 없는 화석이 나와야 구분할 텐데, 무려 5250만 년 전 화석까지 거슬러 가도 지금의 당신과 다른 점이 없었거든요. 당신은 살아있는 화석이었던 셈이에요.
논쟁은 2008년, 새로운 화석의 연구 결과가 나오며 일단락됐습니다. 그 해 2월 네이처 표지를 장식한 당신의 조상 ‘오니코닉테리스 핀네이’는 지금과 거의 비슷한 날개막 골격 구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뒷발은 좀더 컸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차이가 발견됐습니다. 두개골의 구조를 분석한 결과 초음파는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거든요. 최초의 당신은 먼저 하늘을 날았고 초음파는 내지 못했습니다. 아마 당신은 초기에 날개를 써서 경쟁자인 설치류나 식충류를 따돌리고 허공의 곤충이나 과일을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숲의 장애물이나 동굴의 어둠을 피하기 위해 초음파를 사용하는 능력을 진화시켰을 것입니다.
초음파는 종에 따라 다른 형태로 진화했습니다. 올해 1월 네이처에 실린 덴마크 연구팀의 연구 결과를 보면, 몸집 크기가 작은 종일수록 주파수는 높았습니다. 작은 종일수록 입 크기도 작아서 음이 사방으로 퍼져 레이더 기능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대신 주파수를 높여서 음 에너지를 집중하는 거죠. 또 동굴과 같은 닫힌 곳에 있을 때가 숲 같은 열린 곳에 있을 때보다 주파수가 높습니다. 동굴은 어두워서 오로지 초음파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정밀도를 높인 결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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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황금박쥐를 위해
이야기하는 사이, 잠을 자던 박쥐 한 마리가 눈을 번쩍 떴습니다! 다섯 번째 당신, 토끼박쥐입니다. 이름처럼 귀가 긴 당신은 다른 동굴성 박쥐에 비해 비교적 일찍 겨울잠을 깨는 종입니다. 그러니 3월 중순이 채 안 된 지금 벌써 활동을 시작했겠지요. 이름처럼 귀가 긴 당신은, 다른 동굴 박쥐에 비해 눈이 조금 큽니다. 그래 봤자 얼굴 전체에 비해서는 작지만요. 당신은 그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저를 쳐다보는군요. 놀라지 마세요. 그저 당신을 만나러 왔을 뿐이에요. 펄럭이는 날갯짓과 함께 당신이 사라집니다. 당신의 날개는 얇은 막으로 가벼운데다 몸도 작기 때문에 새보다는 곤충처럼 날렵하게 날 수 있습니다. 올해 첫 날갯짓이 힘차기를 바라 봅니다.
당신은 환경부가 정한 멸종위기 야생동물 2급이라 좀체 볼 수 없는데, 제가 오늘 운이 좋았나 봅니다. 그래도 제가 들른 동굴 두 곳 중 한 곳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게 마음에 걸립니다. 예년에 비해 개체수가 줄어든 게 아니길 빌 수밖에요.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만나지 못한 당신, 일명 황금박쥐라고 불리는 붉은박쥐에게 편지를 씁니다. 우리나라에서 1970년대부터 30년 이상 박쥐 연구를 해 온 손성원 전 경남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박쥐의 개체수가 70년대에 비해 80~90년대에 반으로 줄었다고 말합니다. 이 중에는 우리나라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으로 지정돼 있는 붉은박쥐, 당신도 포함돼 있지요. 더구나 80년대 이후로는 이 박쥐가 10여 마리씩 무리를 지어 집단으로 자고 있는 상태로 발견된다고 합니다. 보통은 1개체씩 떨어져 자는 종인데 말이에요. 손 전교수는 서식지가 많이 파괴돼 한 곳에 밀집한 탓이라고 해석합니다. 멸종위기에 몰린 종의 특성이지요(그 동굴이 다른 곳보다 추워서 밀집해 있다는 해석도 있어요).
요즘 미국에서는 몇 년째 흰코증후군(WNS)라는 박쥐 병이 대유행입니다. 호냉성(찬 곳을 좋아하는 성질) 곰팡이균에 감염돼 걸리는데, 코에 하얗게 곰팡이가 피고 체온이 올라가는 게 주요 증세입니다. 말씀 드렸듯 겨울잠을 자는 당신은 체온이 일정해야 몸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먹을 것도 없고 추운 한겨울에 갑자기 체온이 오르니 에너지 소모가 늘고, 당신은 그대로 죽을 수밖에요. 일부 종은 그 지역에서 거의 멸종에 이를 정도로 피해가 심각합니다.
혹자는 미운 마음에, 당신 따위 죽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착각입니다. 당신은 생태계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작은 박쥐 하나가 하룻밤에 먹을 수 있는 해충의 수는 3000마리 이상입니다. 미국산림청은 2009년, 흰코증후군 때문에 박쥐가 줄면 110만kg에 달하는 해충이 활개를 칠 거라고 예측할 정도였어요. 농사고 생활이고 엉망이 되겠죠. 뿐만 아닙니다. 과일과 꽃가루를 먹는 큰박쥐아목 박쥐들은 꽃가루를 옮겨줍니다. 벌처럼 식물 생태계를 연결시키고 농업을 돕는 역할을 하죠. 박쥐가 사라지면 열대 생태계 전체가 위기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아직 곰팡이 병이 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개체수가 줄고 서식지가 파괴되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붉은박쥐 등이 자연동굴 대신살고 있는 폐광조차, 광산폐수가 흘러나오거나 위험하다는 이유로 하나하나 메워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당신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요.
당신을 보호하려면 우선 체계적인 개체수 조사부터 해야 합니다. 그나마 30여 년 간 전국을 헤매며 조사를 한 손 교수와, 최근 조사를 하고 있는 김박사 같은 연구자 덕분에 기틀이 많이 다져졌습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천릿길입니다. 당신을 이해하고 가까이에서 만나려는 사람이 더 늘어나, 체계적인 연구와 보호가 가능해지길 기대하며 동굴을 나섭니다.
제 귀갓길을 염려하는 당신에게 시 한 수로 화답합니다. 당신과 자연에게 가는 길이 멀지 않고, 당신과 자연과 내가 다 하나라는 시입니다. 당신을 만나고 지켜주는 일은 고단함도 잊게 한다는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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