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협력을 위해 남북간 접촉이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특히 정보통신 분야에는 현재 남한은 인력이 부족하고 북한은 좋은 인재들이 많다는 점 때문에 협력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6월 13일, 사상 처음 남북한 공동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생중계됐다. 이 방송은 국내뿐만 아니라 CNN, NHK 등 외국 언론을 통해서도 전세계에 방영됐다. 남쪽에서 가지고 간 SNG(이동 생중계 송출장비)와 무궁화 위성, 그리고 북측의 중계차 시설 등이 동원된 이 방송은 별다른 문제 없이 매우 순조롭게 진행됐다. 하지만 이 과정이 있기까지 남과 북은 서로간의 차이로 인해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남한의 텔레비전 송수신 방식이 NTSC방식이고, 북한은 PAL방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방송내용을 양쪽에 동시에 보여주기 위해서는 방송 신호를 변환해주는 컨버터가 있어야 했다. 또 서로의 방송 용어가 달라서 방송과정에서 혼동이 생길 수 있었는데, 다행히 미리 호흡을 맞춰 해결했다. 이처럼 많은 부분에서 오랫동안 단절되고 교류하지 않는 과정에서 생긴 서로간의 차이로 인해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가 많이 쌓여 있다.
인공지능 수준은 상당
지금까지 문헌이나 개인, 또는 경제협력을 통해서 알려진 북한의 정보통신기술은 하드웨어 환경이 열악하지만 소프트웨어 부분에서는 상당한 수준이라는 평가다. 북한과 경제협력을 추진하고 있는 나눔기술의 장영승 사장은 “북한의 소프트웨어 기술 수준은 인공지능이나 음성인식 부문에서 국내 기술과 비교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우수하다. 앞으로 북한의 특정 소프트웨어 분야 기술과 남한의 자본과 마케팅이 결합하면 향후 통일기업이 설립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전망한다.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평양전자계산기단과대학 등 교육기관과 조선콤퓨터쎈터, 평양정보쎈터, 조선인터넷쎈터, 국가과학원 등 연구기관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에 전력하고 있다. 1998년 북한에서 개발한 ‘은바둑’(Silver Star)이 일본에서 열린 세계컴퓨터바둑대회에서 우승하는 저력을 과시한 것은 북한의 소프트웨어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이다.
과학자 중에는 인터넷이나 정보고속도로에 대해서 잘 파악하는 사람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남한과 마찬가지로 디지털과 광통신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의미다. 실제로 북한은 올해 연간 국민소득 5%를 전자정보기술 분야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컴퓨터와 고밀도 집적회로, 인공지능, 자동화 연구가 주요 분야이다.
이 정도면 북한과 인터넷을 통해서도 정보를 교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북한에는 아직 인터넷이 특정기관을 제외하고 보급돼 있지 않다. 더구나 북한에 인터넷을 할 수 있는 환경이 구축돼 있다고 해도 남한과 북한의 한글코드가 맞지 않아서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실정이다.
컴퓨터에서 한글을 사용할 때 일단 기계적인 언어로 변환된 것을 다시 우리가 볼 수 있는 한글 형태로 번역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때 기술적으로 ‘코드’라고 하는 문자와 숫자 등에 대한 정보가 이용된다. 코드는 여러 가지 기술적인 요인으로 인해서 언어와 표준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남과 북이 함께 사용하려면 표준화가 선행돼야 한다. 그래서 통일을 준비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부분이 한글코드 같은 정보처리분야의 표준화다.
이런 인식으로 민간 차원에서 1994년부터 1996년까지 3년간 ‘코리안 컴퓨터처리 국제학술회의’(ICCKL)을 개최해 남북간의 정보처리 분야의 표준화 모색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남과 북, 그리고 중국에 있는 학자들까지 모여서 전산용 자모순을 합의하고, 공동자판 마련, 전산 용어사전 편찬에 대한 합의사항을 도출했다.
오랫동안 서로 교류없이 살다보니 언어에서도 남과 북은 자음과 모음의 순서를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전산용 한글 배열도 서로 다르다. 남한은 ㄱ, ㄲ, ㄴ, …, ㅅ, ㅇ, …, ㅌ, ㅎ 순이지만 북한은 ㄱ, ㄴ, ㄷ, …, ㅎ, ㅇ, ㄲ, ㄸ, … 순이다.
이응은 초성에서 소리값이 없기 때문에 히읗 뒤에 배치해야 한다는 북측의 주장과, 종성에서 음가를 가지고 있기에 시옷 다음에 배치해야 한다는 남측의 의견이 대비됐다. 또한 쌍기역의 경우도 여린소리가 다 끝난 다음에 배치하는 것이 북한의 언어규범이다. 그래서 양쪽의 의견을 수렴해 ㄱ, ㄴ, …, ㅅ, ㅇ, ㅈ, …, ㅎ, ㄲ, …, ㅉ 순으로 공동안을 마련했다. 모음의 순서도 남과 북의 방식을 적절하게 혼용해서 만든 공동안에 서로 합의했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의 순서를 조정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데이터베이스에서 순서를 찾거나 정렬과 같은 전산처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서 검색을 할 때 ‘인형’을 치면 컴퓨터는 글자 하나하나를 모두 따로 인식한다. 즉 ‘ㅇ’을 치면 한글배열 순서에 따라서 ‘ㄱ’인지 아닌지 비교해보고, 자음과 모음 순에 따라서 ‘ㄴ’, ‘ㄷ’ 순으로 계속 비교해가면서, ‘ㅇ’ 차례가 됐을 때 비로소 ‘ㅇ’을 인식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므로 ‘ㅇ’의 순서가 ‘ㅅ’ 다음이냐, ‘ㅎ’ 다음이냐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인식하게 되므로 표준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오류가 생긴다.
데이터베이스는 특정 코드에 맞춰 설계되고 구축된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에 통일된 코드를 활용하지 않으면 추후에도 이용할 수 없게 된다. 현재 남과 북에 존재하는 데이터베이스와 디지털화된 자료는 코드 통일이 돼 있지 않아서 서로 호환이 안돼 함께 사용할 수 없다.
한글 표준화 시급
전산처리를 위해서 한글의 자모 순서를 조정하면 사전의 순서도 바뀌어야 한다. 결국 모든 언어규범을 재조정하는 일이므로 남북한 모두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전산처리 분야에만 국한해서 우선적으로 시행해가고 추후 범위를 넓혀갈 필요가 있다.
자판(키보드) 배열에서도 서로 다르다. 남한에서 사용하고 있는 2벌식 배열은 왼쪽에 자음, 오른쪽에 모음으로 구성돼 있지만 북한에서 제안한 자판배열은 오른쪽에도 많이 사용하는 자음을 배치해서 2벌식 자판보다 효율성을 20% 높였다.
하지만 현재 북한은 자판이 거의 보급되지 않은 반면 남한의 자판 보급률이 월등하게 높기 때문에 북한의 방식을 표준으로 설정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이처럼 표준 설정은 이상적인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여러 가지 조건을 모두 고려하면서 이뤄져야 한다.
한편 공동안은 단지 권고사항일 뿐 실질적인 효력은 별로 없다. 길게 보면 결국 언어 분야에서도 서로간의 공통 합의가 나와야 한다. 따라서 정보처리 표준화는 과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어학자들과 협력해서 국가적인 수준에서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
서방국가들의 공산권국가에 대한 수출제한 조치인 바세나르 협약에 따라 북한에 펜티엄급 이상의 컴퓨터 수출이 금지되고 있다. 군사적 목적으로 전용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이런 상황에 있는 북한과, 초고속통신망을 구축하며 정보화 사회를 추진해가는 남한은 서로 많은 차이를 가진다. 즉 정보통신 격차가 점점 더 심화되고 있어서 이런 상태로 통일이 된다면 결국 많은 문제점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한국을 방문한 독일의 한 통신 기술자는 “독일은 통일 전에 정보통신 분야에서 많은 기술 교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 후 기술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북한 정보통신 전문가인 박찬모 교수는 “북한의 정보통신 기술 현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 가장 우선해야 한다. 북한의 실정을 제대로 알아야 정책 수립과 기술표준화, 교류 등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간단한 예로 북한에는 전화가 일반가정에 전혀 보급돼 있지 않고, 수백명이 근무하는 기관에도 1-2대 정도로 전화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북한의 모든 가정, 모든 사무실에 유선방송을 볼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 이것을 활용한다면 현재의 부족한 전화망을 보완할 수 있다. 즉 북한의 현황을 파악하면 좀더 효과적인 정보통신 협력방안을 개발할 수 있다.
북한에 네트워크 시설 같은 정보인프라가 구축된다면 북한의 젊은이들이 사이버 환경에 익숙해질 것이다. 10-20년후 쯤 완전한 통일이 이뤄진다고 예측한다면 그 통일의 주체는 남과 북에 있는 지금의 젊은이들이 될 것이다. 그들이 사이버를 통해 교류를 활발히 한다면 동질감 회복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처럼 정보통신은 남과 북의 커뮤니케이션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만일 정보통신 전분야에 대한 표준화가 함께 추진되면 남북 교류에서도 훨씬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 전화 교류 이뤄질까
그런데 현재의 상황에서 성급한 표준화는 결국 남한의 경제력 우위를 통한 남측 주도의 표준화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즉 북한의 기술력과 시설이 부족하다는 특성으로 남한의 기술 표준을 그대로 따르도록 강요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모든 준비는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윈윈’(Win-Win)전략에 맞춰 상호 효율성과 미래 지향적인 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정부의 한 정보표준 담당자는 “정보통신 표준화를 준비중이다. 그러나 아직 북한과 공동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서 공개될 경우 남측 주도의 표준화라는 오해를 살 수 있다. 이 외에도 매우 복잡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어서 민간 단체나 기관에도 언급을 자제해주도록 요청하고 있는 실정이다” 라고 말하면서 표준화를 조심스럽게 추진하고 있음을 밝혔다.
최근 북한의 조선체신회사(KTPC)가 미국의 스타텍글로벌 커뮤니케이션과 인터넷 전화사업을 제휴했다. 스타텍글로벌은 우리나라의 온세통신과도 인터넷 전화사업을 제휴하고 있다. 이렇게 북한과 남한이 같은 미국회사의 네트워크로 묶이면 남북간의 인터넷 전화가 실현될 가능성이 커진다. 물론 아직은 정치적인 이유로 당장은 현실화되기 어려운 얘기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