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건축학개론’의 한 장면. 남자 주인공(엄태웅 분)이 여자 주인공(한가인 분)에게 설계안을 보여준다. 영어와 어려운 말을 잔뜩 섞어가면서 한참 설명하는데, 못 알아들은 여주인공이 급기야 짜증을 낸다. “왜 그렇게 어렵게 이야기해?”
엉망이 된 ‘꽃의 도시’
이유는 모르지만, 건축이나 도시 설계 전문가들은 어려운 말을 많이 써서 디자인 안을 발표하는 습관이 있다. 도시공학을 공부하던 학생시절 기자도 그랬다. 언젠가 주거단지 설계 과제를 하며 ‘풍류화(風流花, 바람이 흘러 꽃이 되다)’라는, 멋을 잔뜩 부린 제목을 붙여 발표한 적이 있다. 교수가 무슨 뜻이냐고 묻기에 “주거단지를 꽃잎 모양으로 배치했다”고 대답했는데, 혼만 실컷 났다. 혼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별로 꽃을 닮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당시에는 그림을 못 그려서 그랬나 싶었는데, 최근 책 한 권을 다시 읽으니 이유를 알 것 같다.
꽃이나 잎의 배열에 ‘수열’이라는, 오묘한 수학이 숨어 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빈 공간 없이 빼곡하게 배열하면 공간 효율을 높일 수 있어서 식물은 자연스럽게 특별한 각도로 잎이나 꽃잎을 배열하도록 진화해 왔다. 그런데 그 각도가 낯설다. 222°. 들어본 적 없는 각도다.
‘풀잎 위에 알고리즘’의 저자에 따르면, 이 각도는 지구에서 가장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각도다. 길에서 흔히 보는 식물의 잎이나 꽃의 태반이 이 각도로 잎을 배치하기 때문이다. 일명 ‘어긋나기’ 특징을 지닌 식물에서는 늘 이 각도를 찾을 수 있다. 봉숭아의 잎이나 해바라기의 안쪽에 위치한 관상화(대롱 같이 올라가는 꽃, 바깥에 있는 노란 ‘설상화’와 구분된다), 솔방울의 무늬, 달리아의 꽃잎이 예다.
왜 222°일까. 222(정확히는 222.49°)를 한 바퀴의 각도인 360으로 나누면 약 0.618이 된다. 이 수는 아름다움의 배후에 있는 분할 비율, 즉 ‘황금비’다. 같은 수를 분수로 표현해 보면 분모와 분자가 ‘피보나치 수열(이전 두 수를 더해 나가면 얻는 수열)’이 된다. 이 피보나치 수열 역시 자연 여기저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신비로운 규칙이다.
식물은 수학자도 아닌데 이렇게 온몸으로 수학을 표현하며 살고 있다. 유능한 디자이너 또는 프로그래머 같다. 그런데 야심작(?) ‘풍류화’는 그런 고려가 전혀 없었다.
“아마 조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황금비 등 위의 특성을) 알고 있다면 상당히 유용할 것이다. (…)단지 꽃잎을 222°로 포개 나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p.220) 저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자연을 흉내 내고자 했다면 자연이 보여주는 단순한 규칙을 충실히 따라가야 했다.
프로그래머 식물, 발명가 동물
사람들은 조화처럼 자연의 모습을 그냥 흉내 내는 걸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능을 흉내 내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이번 달 ‘과학동아’ 기획(134쪽)을 읽으면 최신 공학 역시 자연을 모범사례로 삼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술이 자연을 모방했다는 뜻에서 ‘생체모방공학’ 또는 ‘생물모방공학’이라고 부르는 학문 분야다.
이 분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연꽃잎이나 상어를 흉내낸 소재처럼 유명한 사례 외에는 상세한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역사를 한눈에 훑어볼 수 있는 책도 거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 나온 ‘자연은 위대한 스승이다’는 귀한 책이다. 생체모방공학의 역사부터 대표적인 사례, 최근 연구 동향, 그리고 미래 연구 주제까지 빠짐없이 모았다.
이 책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부분은 후반부다. 생체모방 사례를 넘어, 생물을 컴퓨터를 이용해 인공적으로 창조하려던 시도를 다뤘다. 1970년대 영국 철학자 마틴 가드너가 만든 인공생명체는 컴퓨터 안에 설정한 격자 안에서 스스로 자라 꽃을 피우고, 씨앗을 남긴 뒤 죽는 식물의 한살이를 모방했다. 단순한 규칙만으로 컴퓨터 속 생명이 탄생한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 역시 진화론의 자연선택에 의해 복잡한 거미 모양의 인공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음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증명했다.
규칙 몇 가지에서 복잡한 유기체가 탄생하는 과정은 촛불시위나 웹처럼 집단지성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간다. 단순성에서 시작해 복잡성으로, 예상치 못했던 ‘창발(부분의 합을 넘어서는 전체가 출현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과정이 닮았다. ‘풀잎 위에 알고리즘’의 식물이 단순한 수학 법칙만으로 다채롭고 풍부한 생태계 경관을 만들어낸 과정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