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미 거의 썩고 핏덩어리가 말라붙은 시체가 모두의 눈앞에 우뚝 나타났다. 그리고 그 머리 위에는 시뻘건 입을 크게 벌리고 불같은 외눈을 커다랗게 뜬 그 무서운 고양이가, 나로 하여금 살인을 하도록 감쪽같이 꾀어들이고, 지금은 그 비명 소리로 나를 교수대로 이끈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나는 이 괴물을 무덤 구멍 속에 시체와 함께 넣고는 그대로 발라 버렸던 것이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1845)를 읽으며 전율을 느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이 마지막 대목은 언제 봐도 소름이 끼칩니다. 시체 위에 앉아있는 검은 고양이. 꿈에 나올까 무서운 모습이죠. 이처럼 검은 고양이는 늘 악운이나 재앙의 상징으로 표현되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사자인 고양이로선 꽤나 억울할 것 같습니다. 털 색깔이야 부모에게서 물려 받은 것인데 사람들이 괜히 무섭다고 호들갑 떠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 검은색은 고양이에겐 오히려 ‘행운’의 상징입니다. 과학자들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고양이의 검은 털은 특정 질병에 강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증거기 때문이죠.
미국 메릴랜드대학과 국립암연구소 공동 연구팀은 고양이과 동물의 털이 검어지는 것은 특정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겼기 때문이며, 이 돌연변이는 질병에 대한 내성도 갖게 만든다는 사실을 생물학 전문지(Journal of current biology)에 발표했습니다. 고양이와 같은 과에 속하는 재규어에서 검은 털 색깔을 만드는 유전자는 MC1R입니다. MC1R 유전자는 털 색깔을 조절할 뿐만 아니라 세포막을 통해 들어오는 물질의 이동을 제어하는 역할도 합니다.
사람에게도 이 유전자와 비슷한 것이 있는데, CCR5 유전자가 그것입니다. CCR5 유전자는 에이즈 바이러스가 세포막을 통과할 때 필요로 하는 단백질을 만들어냅니다. 만약 이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발생하면 에이즈 바이러스가 세포막을 뚫지 못하게 되겠죠. 같은 이치로 MC1R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일어나면 재규어의 털 색깔을 검게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특정 바이러스나 박테리아가 세포막으로 들어오는 것도 막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연구를 이끈 스태픈 오브라이언 박사는 “진화 과정에서 이 유전자의 돌연변이는 질병에 내성을 보였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지, 기존에 생각되던 것처럼 검은 털 색깔이 몸을 숨기기에 좋아서 선택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혔습니다.
이번 연구의 대상인 재규어와 마찬가지로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에도 같은 유전자 돌연변이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검은 고양이는 그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 보기엔 나빠도 고양이 자신의 건강에는 검은 털이 좋은 것입니다.
한편 같은 고양이과라도 사자나 호랑이는 재규어나 고양이와 같은 유전자 돌연변이가 없다고 합니다. 검은 사자, 검은 호랑이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죠. 그렇지만 사자도 일부분이나마 검은 색으로 자신의 건강미를 과시한다고 합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의 동물행동학자인 크레이그 패커 교수 연구팀은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국립공원에서 20년 동안 사자 집단을 연구했습니다. 패커 교수팀은 그동안 촬영한 사자의 사진을 나이 및 건강상태와 대조해본 결과, 수사자의 경우 목 주위 갈기가 길고 검을수록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수치가 높고 건강상태가 좋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수사자에게도 검은 색이 건강미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암사자가 모를 리 없겠죠. 패커 교수가 검은 갈기를 가진 실제 크기의 수사자 모형을 무리에 넣어줬더니 암컷들이 모두 이 모형을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반면 수사자들은 이 모형을 회피했구요. 길고 검은 갈기를 가진 수사자와 싸워서는 득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겠죠.
그렇지만 남성미를 과시하기 위한 검은 갈기는 사실 인내를 요구합니다. 적외선 사진을 보면 검은 갈기를 가진 수사자는 좀더 옅은 색의 갈기를 가진 동료에 비해 몸의 열을 밖으로 발산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연계에서는 짝짓기의 성공을 위해 생존의 위협을 감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사슴의 큰 뿔은 암컷의 선택을 받는데 결정적인 요인이지만 맹수에게 쫓길 때는 덤불에 걸리는 장애물일 뿐이죠. 사람들의 야유를 받든지 목에 땀띠가 나든지, 자연에는 공짜가 없는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