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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07년 전인 1905년, 우리나라가 일제의 침략 앞에 위태로울 때 세계 물리학은 빛, 공간, 시간, 물질, 에너지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천재적 업적(특수상대성이론)으로 패러다임 변혁이 일어나고 있었다. 1920년대에 이르러 양자역학이 등장해 고전 물리학과 선을 긋고 세계는 현대 물리학으로 장대한 도약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현대 물리학은 어떻게 시작했을까. 한국물리학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한국 현대 물리학의 태동을 살펴본다.
우리나라의 현대 물리학은 일제 강점기 시절 현재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가 1915년 4월에 개교하면서 시작된다. 1915년 입학한 학생 중 22명이 1919년 졸업을 하는데 4명이 현재의 물리학과인 수물과(수학 및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나중에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가 되는 이원철을 비롯해 장세운, 임용필, 김술근이다.
이원철(1896~1963)은 1922년 북장로교에서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1926년 미시간대에서 ‘독수리자리 에타별의 천체에서의 운동’이라는 논문으로 천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교수로 부임하여 수학, 물리학, 천문학을 가르치며 한국 과학을 이끌어갈 후학을 길러냈다. 1928년에는 연희전문학관 옥상에 국내 최초로 현대식 굴절망원경을 설치해 교육에 활용했다. 이원철 박사는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8·15 광복 후 연희대(연세대) 교수로 복직하고 이학원장을 맡는다.
한국 첫 물리학 박사 최규남
연희전문학교 수물과는 계속 물리학자를 길러냈다. 1921년에 3명, 1924년에 3명, 1925년에 3명, 1926년에 6명이 졸업한다. 특히 1926년에 졸업한 사람 중 한국인 최초의 물리학 박사가 되는 최규남(1898~1992)이 있다. 최규남은 대학 졸업후 고향인 개성으로 돌아가서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된다. 하지만 1927년 미국으로 건너가 1933년 미시간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귀국해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교수가 됐다.
현재 살아있는 물리학자 중 가장 원로인 윤세원 박사(1947년 서울대 물리학과 첫 졸업생)의 회고에 따르면 “내가 최규남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40년 3월 연희전문학교 이과 면접시험장이었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나에게 일본말로 어느 학교에서 왔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무심코 조선말로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왔다고 대답하였다. 당시 일제 하에서는 학교에서 조선말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니까 최 박사는 일본말로 묻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졸업한 중앙학교는 민족주의 학교로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본말을 사용하지 않고 언제나 조선말 만을 사용하여 왔기 때문에 이 중대한 자리에서도 조선말이 나왔던 것이다. 대답하고 나서 생각하여 보니 선생님은 일본말로 물었는데 나는 조선말로 대답하였으니 실례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으나 엎질러진 물이라 어찌할 수 없었다. 나는 떨어졌구나 생각하였으나 합격통지를 받고 연희전문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과학기술 전 분야에 걸쳐 10여명 뿐이었다. 물리학과 천문학 분야는 4명(이원철, 조응천, 최규남, 박철재)이었고, 이 중 3명(이원철, 최규남, 박철재)이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출신이었다.
박철재(1905~1970)는 1930년 연희전문 수물과를 졸업하고, 1940년 교토제국대에서 생고무의 결정화에 관한 연구로 물리학 박사를 받았다. 박철재 박사에 대한 윤세원 박사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내가 박철재 박사님을 처음 뵈옵기는 1942년 청진동 어느 여관방이었다. 당시 연희 이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나는 연희의 대선배요, 일본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교토제국대학에서 받은 후 금의환향하여 호텔 아닌 여관방에서 묵고 계실 때 후배로서 박 박사님을 찾아뵈었던 것이다. 방문턱에 들어서자마자 넙죽이 절을 하고 고개를 들어 그분의 얼굴을 쳐다보니 머리는 보통사람보다 월등히 큰데다가 가로퍼진 이마가 더욱 넓어 마음속으로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은 이마가 저렇게 넓어야 하는가 보다 생각하고 나의 이마가 비교도 안 되게 좁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던 것이 기억난다. 인사를 마친 뒤에 서로 할말이 별로 없었으므로 그냥 되돌아왔지만 처음 본 박사님의 소박하고 호탕한 인상은 그 후 그분을 30년 가까이 옆에서 모시면서도 변함없었다.”
광복 당시, 물리학과 천문학 분야의 박사학위 소지자 4명 중 한 명인 조응천(1895~1979)은 1895년 평안북도 강서군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1928년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최대전류 조건에서의 삼극진공관에 관한 연구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뒤 농민 교육에 힘쓰다가 광복 후에는 군정청 경무부 통신국장, 정부수립 후에는 육군통신학교장과 통신감을 거쳐 1956년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서울대 물리학과 둘로 쪼갠 좌우 갈등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국대는 1924년에 설립되었는데 이공계 없이 법문학부와 의학부만 설치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중국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조선에 중화학공업 건설에 나서면서, 1938년 경성제국대에 이공학부를 설치하였다. 이공학부의 교수진을 모두 일본인으로 구성하였으며 물리학, 화학, 토목공학, 기계공학, 전기공학, 응용화학, 채광야금의 7개과를 두었다.
1941년부터 이공학부에 학생이 입학했는데 물리학과 정규과정에는 1941년에 한국인 정근이 홀로 입학하였고, 학위 없이 수료만 할 수 있는 선과생으로 방성희가 입학하였다. 이들은 1943년에 졸업(1회)하였다. 1942년에는 한국인 2명(김종철, 이임학)과 일본인 1명이 입학하여 1944년에 졸업(2회)하였다.
제1회와 2회 졸업생은 전원 졸업과 동시에 조수로 임명되어 연구와 학생 지도를 하다가 광복을 맞게 되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에 이용태가 졸업(3회)하여 경성제국대 물리학과 한국인 졸업생은 총 4명이 된다. 광복과 함께 일본인 교수들이 모두 일본으로 돌아가고 한국인 조수들만 남았다. 미군이 이공학부 건물을 징발해 미군 병원으로 사용하면서 모든 실험기구를 인근의 학교 창고로 옮기고 사용하던 건물을 내어주기도 했다.
미군정이 경성제국대학을 경성대학으로 개명하면서 경성대학 이공학부 물리학과가 발족했다. 그러나 조수 2명(김종철, 전평수)과 학생 1명(이흥국)뿐이었고 교실 건물도 교수진도 없었다. 이에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교수였던 최규남 박사가 경성대학 이공학부장 대리로 임명되었다. 1945년 11월에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 및 조교 19명이 임명되어 강의를 했다.
이후, 국립서울대 설립안이 1946년 8월 22일 공포되었는데, 1946년 9월 5일 이공학부의 좌익계 교원 38명이 집단으로 총사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와중에 물리학과에서도 도상록, 전평수, 정근이 북한으로 가고, 한인석은 연희대로 돌아갔다. 이리하여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로는 교무처장직을 맡은 최규남 박사와 학생과장, 물리학과 학과장을 맡은 박철재 박사, 그리고 김종철만이 남았다. 당시 3학년에 진급한 조순탁, 김영록, 이기억, 윤세원은 이러한 상황에서 예과 학생들, 공과대학과 공업전문학교 학생들에게 일반물리를 강의해야 했다.
교수가 아주 부족한 상태에서 1947년에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제1회 졸업생 4명(조순탁, 김영록, 이기억, 윤세원)은 모두 학교에 남아 월급 4000환을 받는 교수조무원으로 교수 후보가 되었다. 당시 쌀 한가마(60kg) 값이 9000환이었으니 쌀 반가마도 안되는 월급이었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김영록과 이기억은 외국으로 유학하여 미국에 남았지만, 조순탁과 윤세원은 한국에 남아 한국 과학계의 중요한 역할을 계속 담당하게 된다.
윤세원 박사의 회고에 의하면 이기억은 일본 교토제국대를 다닐 때 강의가 끝나면 불이 나게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학술지의 논문을 만년필로 베꼈다고 한다. 당시에는 복사기가 없었다. 윤세원이 그렇게 논문을 베껴 무엇을 하려느냐고 물었을 때 이기억은 “이 전쟁이 앞으로 10년 이상 계속될지도 모르고 전쟁이 장기화되면 일본이 이공계학생들도 학병으로 끌고 갈지 모르니 중요한 논문을 많이 베껴 고향으로 가지고 가서 혼자라도 공부하려 한다”고 하였다 한다. 이후 이기억은 1944년 3월 중순 경에 슬그머니 교토대에서 사라졌는데 2년 후에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올해 창립 60주년이 된 한국물리학회는 6·25전쟁 중에 설립된다. 최규남 당시 서울대 총장은 부산 피난 시절에 “전쟁으로 황폐해진 우리나라에서 시급한 일은 국가와 민족을 다시 일으키는 일이며 물리학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며 물리학회 창립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그는 부산 임시 교사에 있던 서울대 총장실에서 1952년 한국물리학회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을 8년간 맡았다.
교수 혼자서 서울 모든 대학 물리 강의
1951년부터 1955년까지 부산대, 경북대, 전남대, 전북대, 충남대 등의 국립대와 조선대, 고려대, 중앙대, 성균관대, 동국대, 한양대 등의 물리학과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1953년부터 1957년까지 물리학계의 교수들은 대거 해외 유학에 나섰다. 그러니 국내 대학은 교수가 없는 대학이 태반이었다. 김정흠 고려대 교수는 57년 유학을 떠나기 직전 혼자서 서울에 있는 거의 모든 대학의 주요 과목을 가르쳐야 했다.
유학을 떠난 교수들이 박사 과정을 마치고 대학으로 되돌아오면서 1960년 전후로 각 대학 물리학과 및 한국물리학계가 정상적인 궤도에 진입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억눌려 왔던 배우고 가르치고자 하는 열망이 광복 이후 15년 뒤에야 대학 수준에서 이뤄진 것이다. 마지막으로 2002년 한국물리학회 창립 50주년을 맞아 윤세원 박사가 후배들에게 당부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앞으로 우리나라 물리학의 수준으로 본다면 내 생각에는 머지 않아서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것은 물리학을 하는 선배뿐만이 아니고, 우리나라 각 분야 사람들이 노벨상을 받을 만한 풍토를 만들어야 합니다. 개인이 훌륭하다고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물리학뿐만이 아니고 화학이든지 의학이든지 노벨상을 탈 수 있는 인물이 나올 풍토를 만들어 주는 것이 우리나라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