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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는 다른 기초과학보다 상대적으로 적고, 연구 활동도 국제 협력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천문학자는 해외여행을 자주 한다. 나도 한참 에너지가 충만할 때는, 1년 중 약 두 달은 해외에서 생활하곤 했으니 비행기 마일리지 올라가는 재미로 축나는 건강에 대한 염려를 누그러뜨렸다.

통상 열 시간 이상 되는 비행시간 동안 지겨워서라도 옆 사람과 몇 마디 하게 된다. 특히 미국 사람들은 옆 사람과 통성명하고 사는 이야기 하기를 좋아한다. 여행을 시작할 때는 이런 대화가 반갑지만, 파죽이 되어 돌아오는 귀국편 안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건 비밀인데, 대화를 하고 싶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나를 소개하는 방법이 따로 있다.

대화를 잠재우는 천체물리학의 힘

“아 예 전 천문학을 공부합니다.”

그러면 열에 아홉은, 정말요. 와우. 재밌겠네요.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블랙홀이 정말 있나요. 아니 궁금한 게 더 있어요. 별이 죽으면 정말로 전체가 다이아몬드로 변하나요. 우리 우주엔 은하가 몇 개인가요. 우리 우주 밖은 뭡니까. 우주 탄생 이전에 뭐가 있었나요.

처음 질문 한두 개에 성의껏 대답을 해 준다. 과학자들은 대부분 자기 연구 세계에 애착이 매우 크기 때문에 대화가 진행될수록 더 흥분하고 스스로 얘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렇게 답하기 두세 시간, 기내식이 나오면 한동안 조용하다가 식후 차나 커피를 마신 후, 아 참 그리고 태양이 언젠가는 지구를 삼키게 된다면서요 하고 다시 시작한다. 역시 재미난 얘깃거리이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쯤 되면, 거의 한숨도 못 자고 대여섯 시간 동안 별나라 얘기를 한 뒤다. 흥겹긴 했지만 몸이 극도로 피로를 느낀다. 뉴욕의 심리상담가처럼 시간당 200달러(약 22만원)씩 매긴다면, 1000달러(약 110만 원)는 받아야 하는데….

공동연구자들을 만나 한두 주 힘써 연구를 한다. 내가 해외여행을 자주 가는 것을 주변 사람들은 부러워한다. 하지만 파리에 가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오르세미술관 한 번 못 가보고 2주 연구여행 중에 반나절 쉰다면 그나마 극히 드문 일탈에 속한다. 귀국편에 오를 땐 집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귀국편에선 연구결과를 리포트 형식으로 정리한다. 파일을 힐끔 엿본 옆 사람이 말을 건다. 와우. 그게 다 뭔가요. 뭘 하시는 분인가요. 나에겐 귀국행이지만 그에겐 출국행이었을 수도 있으니 반가운 인사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피곤에 지친 나는 대답한다.

“예, 천체물리학자(!)입니다.”



부동산 중개인을 침묵시킨 NASA의 힘

사실 내 연구는 이론적인 천체물리학에 더 가깝다. 그러면 ‘워어’하면서 다음 질문이 없다. 난 속으로 씩 웃는다. 왠지 천체물리학을 한다고 하면 다들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미국에선 천체물리학은 아주 신기하고 복잡한, 그래서 일반인과는 별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학문으로 여겨진다. 내가 조금 쉬려고 그 인식을 이용한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박사학위를 마친 뒤 내 첫 직장은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고다드 우주비행연구소였다. 다급히 집을 알아보기 위해 부동산 중개인과 여러 군데 방문하는 중에 중개인이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를 물었다. 워낙 정신없던 중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런 사적인 질문은 주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 예. NASA에서 일하는데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보안상 자세히 설명해 드릴수가 없네요. 어쩌죠.”

그랬더니 그는 허둥지둥 손사래를 치며 “아이고 괜찮습니다. 저도 오래 살고 싶습니다”하며 질문을 멈추었다. 얘기가 더 이상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을 상호이해 속에서 멈춘 것이다.

가끔 미디어 기자의 취재 요청을 받는다. 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 문의할 땐 내가 쉬운 말로 설명해 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내가 너무 쉽게 설명하면 때론 실망하는 눈치다. 내가 복잡한 수식을 칠판에 쓰면서 이해불가능한 용어를 가끔 섞어 말해야 만족스러울까.

나는 그런 허세가 싫기도 하거니와, 이미 일반인으로부터 멀어질 대로 멀어진 과학을 위해 그런 현학적인 태도는 버리려고 노력한다. “나는 천문학자입니다”하고 소개하는 일이 많으면 좋겠다.


 

2012년 4월 과학동아 정보

  • 이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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