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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봄, 대학원에 다니던 무렵이었다. 강사의 허락을 받고 철학과에서 개설한 논리학 강의를 청강했다. 어느 날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니체 철학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인 ‘영원한 회귀’가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을 했는데, 니체 저작 몇 권을 읽은 적 있어서 눈을 반짝였지만 막상 한 마디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강사가 한 설명에 눈이 번쩍 뜨였다. 정말 명쾌하고 과학적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물질이 유한하다고 가정해 봐요. 대신 공간이나
시간이 무한하죠. 그렇다면 이 세상이 어딘가 또는 어느 순간 지금과 똑같은 모습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게 영원한 회귀죠.”
알고 보니 강사는 원래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다 철학으로 진로를 바꾼 특이한 이력이 있었다. 과학적 상상력이 거꾸로 철학의 개념을 구체화하고 이해하는 데 영향을 미친 사례다. 강사의 설명이 원래의 철학 개념을 얼마나 온전히 나타내고 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니체가 막연하고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깨달을 수 있었다.
조각우주와 다중우주
비슷한 논리를 다시 만난 것은 우주를 다루는 현대물리학 책에서다. 초끈이론 입문서 ‘엘러건트 유니버스’의 저자 브라이언 그린이 낸 새 책 ‘멀티 유니버스’다. 빛의 속도는 유한하다. 따라서 우주에서 서로 정보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입자의 범위는 한정돼 있다(지름 820억 광년). 따라서 그 이상 먼 우주는 관측한 적이 없고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모른다. 이렇게 관측 범위 안의 우주(또는 우주 일부)를 ‘조각(패치)우주’라고 부른다. 조각우주 안에서 우주를 이루는 입자의 수는 유한하며 입자가 서로 조합될 수 있는 경우의 수 역시 유한하다. 하지만 만약 전체 우주가 조각우주 여러 개로 이뤄져 있다면? 조각우주의 수가 입자들이 서로 조합될 수 있는 경우의 수보다 많기만 하다면, 논리적으로 지금 우리가 사는 우주와 똑같은 우주가 반복될 수 있다. 마치 영원한 회귀처럼. 심지어 우주가 무한하다면 이런 ‘판박이 우주’의 수조차 무한하다.
이 논리대로라면 우주 어딘가에는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한 도플갱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물리학자들이 한 계산 결과까지 제시하고 있다. 우리 조각우주에서 입자가 조합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10을 10의 122제곱만큼 제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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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우주는 우주가 하나가 아니라는 ‘다중우주’ 이론으로 가는 입문이다. 그린은 이 책에서 이렇게 다중우주가 존재할 수 있는 물리학적 가능성을 여럿 제시한다. 여기에는 인플레이션 과정에서 우주에 여러 개의 거품(버블)우주가 생긴다는 ‘인플레이션 다중우주’, 끈이론에서 파생된 ‘시간적으로 되풀이되는 다중우주’, 양자역학에서 ‘관측’이 무수히 많은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낸다는 ‘다중세계 해석(과학동아 2011년 10월호 특집 ‘양자역학과 춤을’ 참조)’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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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너머의 우주, 풍경
‘멀티 유니버스’는 복잡하고 어려운 개념을 눈에 보이는 비유를 통해 강의를 하듯 상세하게 풀어낸다. 같은 작가의 ‘엘러건트 유니버스’와 ‘우주의 구조’를 비롯해 우수한 이론물리학 책 번역과 집필에 꾸준히 주력해 온 박병철 대진대 초빙교수의 번역도 훌륭하다.
읽다 보면 때로는 비유와 설명이 지나쳐 길을 잃기도 하지만, 이 책은 다중우주의 여러 가능성에 대한 가장 풍성하고 친절한 안내서다. 관심이 생긴 독자는 작년에 출간된, 다중우주를 다룬 또다른 책을 참고하면 좋다. 고등과학원 석좌교수이기도 한 레너드 서스킨드의 ‘우주의 풍경’이다. 꼬장꼬장하면서도 재치 넘치는 노대가의 거침없는 글이 여러 세대에 걸친 이 분야의 복잡한 논쟁점을 시원하게 풀어준다.
서스킨드는, 앞서 ‘조각우주’라고 표현한, 관측 가능한 범위의 우주 하나하나를 ‘주머니(포켓)우주’라고 표현하며 완전히 다른 물리 법칙이 지배하는 이들 주머니우주를 모은 상위 우주를 ‘메가버스’라고 부른다. 메가버스는 널리 쓰이는 다중우주(멀티 유니버스 또는 멀티버스)를 대체한 용어다. 그리고 이들 메가버스로 존재 가능한 모든 우주의 가상 목록을 ‘풍경’이라고 이름 붙였다.
서스킨드는 물리학 분야에서 ‘세기의 대결’을 벌인 논객으로도 유명한데, 우주론 분야에서도 현란한 논리 전개와 4000원논박을 펼쳤다. 스티븐 호킹과는 블랙홀의 정보 손실 문제로, 리 스몰린과는 양자 중력의 방법론과 다중우주론으로 대결했다. 이 책에서도 양쪽의 논지를 읽을 수 있다. 마침 스몰린의 책을 번역했고 서스킨드의 끈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낙우 경희대 교수가 번역해 전문적인 내용을 잘 살렸다.
다중우주든 메가버스든 풍경이든, 용어는 중요하지 않다. 우주는 여럿 존재할 수 있다. 이론물리학자들이 수학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천문학자들이 더 많은 자료를 관측해 모으면 우주의 참모습은 밝혀질 것이다. 지금 독자인 우리가 할 일은, 이런 과정을 책상에 앉아 읽으며 드넓은 우주를 상상하는 황홀한 체험을 놓치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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