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잔한 물에 조금이라도 물결이 일까봐 마틴은 발걸음을 죽인 채 숨조차 크게 쉬지 않았다. 그는 카메라의 셔터가 열려 있는지 확인한 다음 전등을 껐다. 깜깜한 어둠속, 빨간 유리반지를 물위로 떨어뜨렸다! 불을 켠 마틴은 함성을 질렀다. 화면에는 잔잔한 물결 위로 빨간 유리반지를 낀 가느다란 손가락이 떠올랐다. 손가락 끝에는 ‘크리스털로 만든 작은 그릇’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미국 콜로라도 출신인 사진 작가 마틴 워프는 물방울이 물이나 탁자에 첨벙 떨어졌다가 다시 튀어 오르는 모양을 찍는다. 지름이 0.25cm인 빨대를 사용해 물방울의 크기와 떨어지는 속도를 세밀하게 조절한다.
그는 세상에 한 번밖에 나타나지 않는 이 놀라운 순간을 접사 렌즈(180mm)가 장착된 디지털카메라와 스트로보라이트로 잡는다. 센서가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감지하면 스트로보 라이트가 아주 짧은 찰나(1만분의 1초) 동안 강렬한 빛을 쏜다. 카메라의 셔터를 열어놓고 강한 빛이 순간적으로 나타나면 빠르게 움직이는 물방울의 궤적을 찍을 수 있다.

[물방울의 프로포즈(Good Catch)물방울 손가락이 반지를 꼈다! 잔잔한 물에 유리반지를 떨어뜨리니 길쭉한 물방울이 구멍 사이로 솟아올랐다.]

물방울이 떨어진 위로 식용색소를 조금 떨어뜨렸다. 물방울이 터지기 직전, 윗부분을 색소가 뚫고 튕겨 올랐다.
➋ 작업 중인 물방울 조각가
마틴 워프가 하늘색 물방울이 책상에서 튕기는 모습을 관찰하려고 시간을 얼려버렸다! 물방울이 왕관모양으로 터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눈을 깜빡한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➌ 크림도자기(White Vase On Blue)
크림으로 빚은 하얀 도자기. 물보다 걸쭉한 덕분에 위로 길게 늘어진 면이 아주 매끄러워 보인다.
조그마한 물방울들이 둥근 띠모양으로 튕겼다.
시간을 얼리는 개구쟁이 물리학도
마틴 워프가 물방울 조각가가 된 것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교육 덕분이었다. 네 아들을 둔 그의 아버지는 아이들이 공부만 하는 샌님으로 자라지 않기를 바랐다. 집에서 끊임없이 우당탕탕 소리가 들리더라도, 창의적이고 재미난 인생을 살아주길 바랐다. 4형제가 매일매일 사고 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운 것도 아버지였다.
그 중 하나가 집 안에 설치한 암실이었다. 워프 4형제는 사진을 찍으면 그날 바로 인화할 수 있었다. 마틴은 특이한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그는 특히 풍선이 터지는 순간을 좋아했다. 매순간 예상치 못한 모양과 방향으로 터졌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마틴은 우연히도 물방울이 튀는 장면을 포착하게 됐다. 물리학도였던 그는 물방울이 왕관모양으로 튄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과 달리 다양한 모양으로 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날부터 마틴은 물방울이 떨어지거나 바닥에 부딪혔다 튀어 오르는 장면에 몰두했다. 풍선보다 다루기가 어려웠지만, 그만큼 다채로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원하는 사진을 얻을 때까지 수백 수천 장씩 찍었다. 필름이 아닌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운이 좋은 날에는 셔터를 누를 때마다 새롭고 신기한 작품이 탄생하기도 했다.

[➍ 얼음물에서 아이 팟~하고 뛰다 (Frozen Moment)
얼음이 동동 뜬 찬물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 알파벳 아이(i) 모양으로 튀어오는 물살이 재밌다.]

[➊ 파란 모래시계(Blue Vase)
이 모래시계는 시간을 세는 대신 순간을 기록한다. 글리세린과 파란 물감을 섞은 물방울을 거울 위로 떨어뜨리니 길게 벌떡 일어났다.]
비눗물과 크림으로 만든 물방울 조각
“저는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물방울을 조각(liquid sculpture)하고 있어요. 물이 어떤 모양으로 튀어 오를지 정확하게 예상할 수 없지만, 원래보다 특별하게 꾸밀 수 있거든요. 그 비밀은 표면장력과 점성에 있답니다.” 물감을 섞어 다양한 색깔의 물방울을 만들어내던 마틴은 특별한 모양의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물과 전혀 다른 성질을 띠는 기름이나 크림을 떨어뜨렸다. 물리학을 전공했던 그는 어떠한 재료를 섞으면 물도 다양한 성질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물의 표면장력과 점성을 크거나 작게 만들면 성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액체 중에서 물은 수은 다음으로 표면장력이 크다. 표면장력은 액체가 표면적을 줄이려고 수축하는 힘을 말하는데, 표면장력이 큰 액체일수록 평면에 떨어뜨렸을 때 둥글게 맺힌다. 그래서 마틴은 물의 표면장력을 충분히 살리기 위해 주로 차가운 증류수(불순물이 거의 없이 순수한 물)를 사용한다. 하지만 표면장력을 줄여 색다른 효과를 내기 위해 그는 물에 비눗물을 섞기도 한다. 이 물을 떨어뜨리면 물방울이 더 얇고 길쭉한 모양으로 나타난다. 마틴은 물에 글리세린을 섞어 점성을 높이기도 한다. 물은 점성이 커지면 꿀처럼 끈적거린다. 하지만 기름보다 묽기 때문에 물만의 고유한 모양을 만든다. 그는 비눗물을 탄 수조에 글리세린을 섞은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등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놀라운 물방울을 창조한다.

[➋ 애벌레의 탈출(Against The Odds)
비눗물 위에 빨간 식용색소를 한 방울 떨어뜨렸다. 빨간 애벌레가 비눗방울을 뚫고 나오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
➌ 호수에 펼친 빨간 우산(Carnival)
호수 한가운데에 빨간 우산을 활짝 폈다. 린스 에이드(식기세척기에 넣는 헹굼질 보조제)를 탄 물 위에 빨간 물감을 섞은 글리세린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➍ 빨간 망토를 입은 프리마돈나(Phantom Of The Dropera)
빨간색으로 한껏 멋을 부린 오페라 가수가 양팔을 벌리고 노래를 하고 있다. 글리세린과 빨간 물감을 섞은 물방울을 떨어뜨린 것이다.
➎ 우산을 쓴 아이(untitled)
노란 우비를 입은 아이가 주홍색 우산을 쓰고 빗물이 찰방거리는 거리를 걷고 있다. 물위에 주황 색소와 노랑 색소를 차례대로 한 방울씩 떨어뜨린 것이다.
➏ 뒤집어진 우산!(Waiting For The Other Shoe)
어디선가 빨간 공이 날아와 우산에 부딪혔다. 아이가 깜짝 놀라 놓쳐버린 우산이 그만 뒤집혀버렸다! 주황 색소와 노랑 색소를 한 방울씩 떨어뜨린 다음, 빨강 색소를 떨어뜨렸다. 아직까지 물에 닿지 않은 빨강 색소가 공처럼 떴다.
➐ UFO 착륙(Vegetable Bowl)
움푹 들어간 그릇 모양의 UFO가 사뿐히 내려앉고 있다. 초록 색소와 노랑 색소를 차례로 떨어뜨리니 재미있는 작품이 완성됐다.]
물방울에 지구를 담다
물방울 사진을 찍기 시작했던 5년 전, 마틴은 무색의 물방울에 색을 내기 위해 카메라 플래시에 색깔 있는 셀로판지를 대었다. 투명한 물 바탕에서 알록달록한 물방울이 튀어 오르는 모습은 신기했다. 그야말로 빛의 마법이었다. 그는 색소를 직접 떨어뜨리기도 했다. 조명에 셀로판지를 대는 것보다 색이 훨씬 진하게 나타났다. 색이 다른 색소를 연달아 떨궈 2가지 이상의 색을 동시에 표현할 수도 있었다.
“물방울이 알록달록하게 나타나는 방법은 없을까?” 그는 한 방울에서 다양한 색깔이 나타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포토샵으로 색이나 무늬를 그려 넣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는 작품을 인위적으로 고치기 싫었다. 결국 그는 빨대 주변에 조그마한 빨대를 여러 개 둘러싸 특별한 도구를 만들었다. 가운데 커다란 빨대구멍은 크림으로 채우고 주변의 작은 빨대에는 크림과 빨강 색소, 파랑 색소를 번갈아 채웠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러나 빨대를 이용해 선반 위에 물방울을 떨어뜨린 순간, 그의 마음속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카메라에는 파란색, 흰색, 빨간색 줄무늬를 띤 물살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마틴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물방울에 그림을 넣는 방법은 없을까 궁리했다. 그는 커다란 그림을 붙인 방 안에서 그것이 반사되도록 연출하면 물방울에 그대로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첫 번째 시도는 세계지도가 붙어 있는 방 안에서 이뤄졌다.
결과는 대성공! 물방울에 전 세계가 담긴 순간이었다.

마틴이 유일하게 포토샵을 이용한 작품이다. 색이 없는 순수한 물을 떨어뜨렸는데 한쪽만 튀어 오르면서 입술모양이 나타났다. 그는 “귀여운 입술을 보자마자 색을 칠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➋ 크림 속은 파랗다(Blue Wall)
마틴이 사용한 색소는 물과는 잘 섞이지만 크림과는 잘 섞이지 않았다. 크림에 파랑 색소를 넣어 떨어뜨리니 바깥 표면은 하얀 크림색이, 안쪽은 파란색이 나타났다.
➌ 화려한 줄무늬 그릇(Old Glory Bow)
자연에 절대 존재하지 않는, 2가지 이상의 색이 줄무늬처럼 그려진 물방울은 어떻게 만들까. 크림과 빨강 색소, 파랑 색소를 번갈아 채운 빨대뭉치로 물방울을 떨어뜨리니 화려한 그릇이 나타났다.]

[➍ 전 세계 품은 물방울(Genesis)
물방울은 둥근 구 형태이므로 모든 방향에서 오는 빛을 반사할 수 있다. 이런 성질을 이용하면 벽에 그려진 커다란 세계지도를 작은 물방울 안에 담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