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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컴퓨터 접속

브레인 & 머신 ➋ 생각으로 대화한다

“누나, 엄마가 분명히 내 손을 잡았다니까.”

“그저 단순반사만으로 그런 일도 있다잖아.”

“지금 봐, 눈물도 흘리잖아!”

“내가 언제까지 같은 말을 해야겠니. 호흡기를 빼는 게 엄마의 고통을 덜어 드리는 길이야. 이제 좀 그만 편하게 보내 드리자.”


2009년 5월 21일, 대법원에서 존엄사가 인정된 이후 의사와 보호자 사이에 이런 상황이 종종 벌어진다. 존엄사 논란은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뉴저지의 스물한 살 카렌 앤이 식물인간 판정을 받았다. 그녀의 부모는 회복 가능성이 없는데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이라며 호흡기를 뗄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앤의 주치의는 부모의 의견에 반대했다. 오랜 법정 공방 끝에 법원은 부모의 손을 들어줬다.

식물인간에게도 의식이 있을까. 만약 의식이 남아 있다면 그들에게 직접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결정을 물어볼 수 있을텐데 말이다. 뇌공학자들은 이 문제에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2009년 벨기에의 롬 하우벤은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났다. 그는 자신이 누워 지내던 23년간 듣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흔히 식물인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중에는 하우벤처럼 의식이 있지만 자신의 의사를 외부로 알릴 수 없는 경우도 있다. 2010년 영국에서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을 이용해 식물인간 23명의 의식 상태를 살펴봤는데 이들 중 4명은 정상인이 특정 장면을 상상할 때와 같은 뇌 반응이 나타났다. 이렇게 듣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지 못하는 상태를 ‘감금 증후군’이라고 한다.

감금 증후군은 말 그대로 영혼이 육체에 감금돼 있는 상태다. 뇌는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눈동자나 눈꺼풀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볼 수 없고, 혀와 턱도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청각이나 후각은 근육의 움직임이 필요하지 않아 마지막까지 기능이 살아 있다. 이렇게 일부 감각만 가진 환자들이 남은 감각을 이용해 외부와 의사소통을 하는 데 fMRI를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fMRI는 움직일 수가 없고 한 번 찍을 때 가격이 비싸다. 뇌공학자들은 fMRI를 대체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난해에는 뇌파를 측정해 식물인간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영국과 벨기에 연구팀이 식물인간 16명에게 손과 발의 움직임을 상상하라고 하자 그들 중 3명에게서 정상인과 유사한 형태의 뇌파 반응이 나타났다. 이와 같이 뇌의 반응을 이용해 외부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돕는 기술이 ‘뇌-컴퓨터 접속(BCI)’이다.

뇌-컴퓨터 접속은 사람의 ‘선택적 주의집중’이라는 능력을 이용한다. 누구나 시끄러운 버스 안에서 특정 소리를 집중해 들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몸의 여러 곳이 동시에 가려울 때, 한 곳만 집중하면 다른 곳의 가려움은 잘 느껴지지 않는 것도 좋은 예다. 2005년 독일 괴팅겐대의 제레미 힐 박사는 오른쪽 귀와 왼쪽 귀에 서로 다른 높낮이를 가진 소리를 반복적으로 들려주고 특정 높이의 소리에 집중할 때 발생하는 P300이라는 뇌파를 검출해 실험 대상이 현재 어느 소리에 집중하고 있는지 알아냈다. 지난해 필자의 연구팀도 오른쪽 귀와 왼쪽 귀에 서로 다른 주파수의 소리를 들려 줄 때 발생하는 ‘정상상태청각반응(ASSR)’이라는 뇌파를 이용하면 환자가 어느 소리에 집중하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기술은 아직 2~4개 정도의 간단한 의사만을 판별하는 수준이지만 이것으로도 의미가 있다. 의사나 간병인의 질문에 ‘예’, ‘아니오’로만 대답할 수 있어도 충분히 환자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뇌-컴퓨터 접속 기술이 실용화되면 의식이 깨어 있는 식물인간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죽음을 맞게 되는 일은 사라질 것이다.
 
[‘뇌-컴퓨터 접속’ 기술로 뇌파를 측정하면 말을 하지 못하는 사지마비 환자도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적외선을 쪼이면 뇌를 흐르는 혈액 속의 산소 농도를 비교할 수 있다. 산소를 많이 쓸수록 활발히 움직이는 부분이다.]

뇌공학자들은 이제 빛을 이용해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는 ‘근적외선분광(NIRS)’에 주목하고 있다. 뇌는 활동할 때 에너지를 더 많이 쓴다. 이 에너지를 만들려면 혈액이 산소를 많이 실어 나른다. 산소가 얼마나 소모되는지를 계산하면 뇌의 활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혈액 속 산소의 농도에 따라 빛의 흡수율이 달라지기 때문에 머리 표면에 생체 투과성이 높은 근적외선을 쪼여주면 뇌 활동에 따라 반사되는 빛의 양이 달라진다. 2009년 캐나다 토론토대 연구팀은 이 기술을 이용해 음료수 중 좋아하는 것을 알아내는 실험에 성공했다. 근적외선분광은 fMRI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고 뇌파에 비해 정확하다.

뇌-컴퓨터 접속 기술은 발전 속도를 감안할 때 빠르면 5년 이내에 실용화돼 사지마비 환자의 간단한 의사소통을 도울 것이다. 또 식물인간이나 혼수상태 환자들이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판별하거나 장시간 수술 중에 환자의 의식이 깨어났는지를 확인하는 데도 사용할 수 있다. 우리가 식물인간이라고 부르던 사람들과 생각만으로 대화하게 될 날이 멀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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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과학동아 정보

  • 신선미 기자, 글 임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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