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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장내세균은 오래 전 결혼한 부부입니다. 살다보면 좋을 때도 있고 싸울 때도 있잖아요. 둘이 어떻게 돕는지, 왜 싸우는지,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정이 들었는지 밝혀내는 게 제 목표입니다.”
장내세균 분야에서 손꼽히는 전문가인 이원재 서울대 교수(44)는 2시간에 걸친 인터뷰 내내 솔직하고 시원시원했다. 때로는 돌발적인 발언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가 디자인했다는 아늑하고 모던한 연구실에서 달콤쌉싸름한 세균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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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뚱뚱한 것은 세균 탓?
이 교수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우리 몸속에 사는 장내세균의 무게가 얼마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기자가 머뭇거리자 “무려 1.5kg”이라며 “우리 몸에 이만큼 무거운 장기는 별로 없다”고 강조했다. 장내세균은 소장이나 대장에 사는 미생물로 인간과 공생하는 생명체다. 장내세균의 종류는 160여 가지가 밝혀졌으며 학자들은 500종을 훨씬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과연 무슨 일을 할까. 병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그저 장속에서 밥만 축내는 존재일까. 과거에는 그런 줄 알았다. 간혹 착한 세균, 그러니까 유산균 정도가 있는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들어 장내세균의 역할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비만 연구죠. 뚱뚱한 쥐의 장내세균을 실험용 쥐의 장에 넣었더니 같은 양을 먹어도 뚱뚱해졌어요. 날씬한 쥐의 장내세균을 넣으면 역시 날씬해지고요. 유전자나 생활습관이 아니라 세균 때문에 비만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어요.”
성장 속도나 각종 질환도 장내세균의 영향을 받는다는 연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 교수도 최근 ‘사이언스’에 “초파리의 특정 장내세균이 인슐린 분비를 조절해 성장을 좌우한다”고 발표했다. 어떤 장내세균을 초파리에 넣었더니 몸 크기가 40%나 줄어들기도 했다. 연구팀은 장내세균의 조합이나 비율이 어떻게 인간에 영향을 미치는지도 연구하고 있다.
“이런 연구가 발표되면 곤혹스러운 일도 생겨요. 어머니 한 분이 연구실에 전화를 해왔어요. 우리 아이가 키가 작은데 혹시 장내세균 때문이냐,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어보셨죠. 답답한 심정은 알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게 너무 많아요. 앞으로 더 많이 연구를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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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따라가는 연구는 하지 마라
그렇다고 이 교수가 상아탑에만 갇혀 있는 과학자는 아니다. 장내세균을 이용해 인류에게 도움을 주는 연구에도 욕심을 감추지 않았다. 암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내세균을 이용해 대머리를 예방하고 피부를 좋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지 않은 외부의 DNA가 우리를 이렇게 저렇게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느냐”며 “장내세균에 대해 많은 게 밝혀지면 우리 생활은 확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하다보면 기자는 ‘좋은 스토리’를 찾기 마련이다. 온갖 고생 끝에 역경을 뚫고 성공하는 이야기다. 이 교수에게 슬쩍 물어보자 “난 그런 거 없다”고 강조했다.
“언론은 그런 이야기 좋아하죠? 그런데 난 싫어요. 실제로 그런 것도 없고. 아직도 ‘월화수목금금금’의 신화를 과학자에게 요구하는데 그거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과학자들이 그렇게 놀지도 못하고 일만 하면 요즘 학생들이 누가 과학자 하겠어요.”
실제로 이 교수는 실험실 학생들에게도 연구만 하라고 강조하지 않는다고 한다. 몇 시까지 나오는지 신경쓰지도 않는다. 연구는 자기가 좋아서, 알아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자신도 평일에는 일찍 퇴근하려 노력하고 주말에는 신나게 자전거 타며 가족들과 보낸다고 말했다. 그럼 학생들에게 주문하는 게 뭘까.
“남들 뒤를 쫓지 말고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냈으면 좋겠어요. 교과서에 나온 걸 바꾸거나 아무도 모르는 개념을 만드는 연구요.”
인터뷰 도중 이 교수는 갑자기 “난 지방대 나왔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경북대 미생물학과 85학번이다. 박사 학위는 파리6대학에서 받았으며 연세대, 이화여대 교수를 거쳐 올해부터 서울대에서 연구하고 있다. 이 교수는 “내가 한국에서 대학 때문에 불이익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세상에는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상황도 있다고 학생들에게 솔직하게 말한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능력은 대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원래 하던 연구, 남들 따라가는 연구는 모범생이 잘하겠죠. 그러나 황당한 연구를 하게 되면 공부와는 다른 능력이 필요해요. 남들이 뭐라 하든 무식하게 도전해야죠. 학생 입장에선 당연히 고민하게 되죠. 이러다 박사 못 되는 거 아냐. 나도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처음에 좀 느린 것 같아도 결국 끊임없이 도전한 사람이 앞서 가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