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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천재가 밝힌 ‘생명의 비밀’

테마가 있는 책읽기

유전 물질(DNA)의 구조를 밝힌 주인공 중 한 명인 제임스 왓슨이 세계 과학자들과의 숨막히는 연구 경쟁을 묘사한 회고록 ‘이중나선’은 과학자가 쓴 자서전 중에서 고전으로 꼽히는 책이다. 유려한 문장과 거침없는 묘사로 긴박하던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일부 동료에 대한 투박하고 자기중심적인 평가로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기도 했지만, 위대한 발견의 순간을 가장 가까이에서 기록해서인지 박진감과 재미가 남다르다.

이 책에서 가장 긴장감이 높은 대목은 역시 자신의 연구가 장벽에 부딪힌 장면. 경쟁 관계에 있던 다른 연구팀에서 먼저 연구에 성공했다는 편지가 지인에게 전해지는 순간이다. 편지를 받은 주인공은 이웃한 연구실에 있던 피터 폴링. 대서양 너머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칼텍) 화학과 학과장으로 있던 라이너스 폴링의 아들이다. 라이너스 폴링은 일찍이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밝힌 바 있는 구조 화학의 세계적인 대가로, 만 50세를 맞아 연구 활동의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좌충우돌하던 왓슨과 동료 프랜시스 크릭 두 청년 과학자에게 라이너스 폴링은 그야말로 신대륙에 사는 마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정열로 화학의 결합 법칙과 물리학의 양자역학을 접목해 오늘날 양자 화학의
기본 규칙을 완성했다. 원자가 결합할 때 각 원자의 양자파동이 서로 영향을 줘서 겹친다는 ‘원자가결합이론’이다. 이전에 적용되던 어설프고 복잡한 법칙들은 폴링 덕분에 모조리 쓰레기통에 들어 갔다. 그 밖에 광물이나 금속 등 무기 물질의 구조를 밝히는 등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폴링은 위대한 스승이기도 했다. 강의와 저술에도 재능이 있어서 화학결합법칙의 규칙과 원리를 정리한 책인 ‘화학결합의 본질’은 이미 당시 세계 화학자들 사이에서 베스트셀러로 꼽히고 있었다. ‘이중나선’에서 왓슨조차 이 책을 탐독했다며 “동료인 프랜시스 크릭도 화학결합의 정확한 길이를 찾을 때 자주 참고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왓슨은 이 책에서 수시로 폴링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을 드러낸다. 이렇게 절대 넘을 수 없는 마왕 같은 연구자이자 스승이 자신과 똑같은 주제로 경쟁을 하고 있다니, 소문만으로도 왓슨과 크릭이 긴장한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도 않아 ‘이미 연구를 완성해 학술지에 실었다’는 편지가 오다니!

하지만 몇 주 뒤 도착한 학술지에서 폴링의 논문을 찾아본 왓슨과 크릭은 눈을 의심한다. 자신들이 1년 전에 완성했다 폐기한 잘못된 유전 물질 구조가 버젓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식욕을 잃을 정도로 좌절에 빠져 있던 왓슨은 다시 기운을 차리고 반격을 준비한다. 이후 후대의 과학사가들 사이에서는 도둑질이냐 아니냐로 논란이 되는 대목이지만, 로절린드 프랭클린의 실험 자료를 보고 확신을 얻어 ‘두 가닥이 서로 꼬인 나선형 결합 구조’를 완성한다. 폴링은 대가답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이들의 발견을 축하한다.

주관성이 강한 1인칭으로 서술된 ‘이중나선’의 몇몇 대목은 논란이 많다. 묘사된 인물의 모습을 좀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아직 살아있는 왓슨을 제외하고 고인이 된 주요 등장 인물의 평전을 읽을 수 있다. 마침 최근 국내에도 차례로 번역돼 나왔다. ‘라이너스 폴링 평전’은 사회학자와 수학자인 부자가 30년 동안 대를 이어 꼼꼼히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천재 과학자이자 반전 평화운동가였던 폴링의 생애를 되살린다. 신문기사처럼 건조하고 객관적인 문체로 탑을 쌓듯 되살린 폴링은 노벨상을 두 개나 받은 영웅이자 미국의 반공 광풍(메카시즘)에 맞서 반핵을 주장한 거인이다. 하지만 동시에 고집 세고 어머니와의 관계에 미숙한 평범한 사람이기도 했다. 짐짓 어른스레 왓슨과 크릭에게 축하를 건넸지만 ‘놓쳐 버린 세 번째 노벨상’에 아쉬워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이중나선’에서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수다 떨기를 즐기는 유쾌한 파트너로만 묘사되는 크릭도 최근 번역된 평전을 통해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프랜시스 크릭-유전부호의 발견자’에 그려진 크릭은 패션에 민감한 세련된 멋쟁이면서 동시에 공간적 직관과 시각화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유능한 과학자였다. 왓슨처럼 조숙한 천재는 아니었지만 뒤로 갈수록 과학자의 입지를 다져가는 대기만성형 천재였다.

‘20세기 생명과학 최대의 발견’, ‘생명의 비밀을 밝힌 역사적 연구’인 DNA의 이중나선 구조 발견. 이 위대한 역사를 세 명의 서로 다른 등장인물의 삶과 시각을 통해 비교해 보는 재미는 남다르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찬란한 발견의 순간은 말 그대로 순간이었고 이들에게는 훨씬 더 긴 지난한 인생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 것이 바로 과학자들의 전기를 읽는 이유가 아닐까.

2011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윤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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