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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암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천문학적인 연구비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실제로 지난 40년 동안 미국에서 암 연구에 들인 돈은 무려 900억 달러(약 100조 원)에 이른다. 덕분에 암의 실체가 상당히 밝혀졌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암이 두려운 질병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암이 왜 고치기 어려운가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발견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많은 과학자들은 언젠가는 암을 정복할 수 있다는(적어도 만성질환처럼 관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런 배경에는 암의 전개 과정의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핵심적인 생체분자들의 면면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특히 암억제인자로 유명한 p53 단백질의 발견은 지난 40년의 암 연구 업적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성과다.
p53이 처음 발견된 건 1979년. 그러나 이 단백질이 암 발생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는 건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89년에야 밝혀졌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의대 버트 보겔스타인 교수가 이 연구를 이끈 주인공이다.
보겔스타인 교수는 고교 시절 수학의 명료함에 매료돼 펜실베이니아대 수학과에 입학했다.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생각했지만 돌연 마음을 바꿔 존스홉킨스대 의대에 들어갔다(미국은 의학전문대학원 체제다).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그는 대학병원에 남아 임상의로 환자들을 돌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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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암유전자에서 암 억제유전자로
그의 환자 가운데 백혈병에 걸린 4살짜리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병에 대해 그에게 여러 질문을 했지만 그는 자신이 암의 본질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결국 병을 이해하지 못하면 해줄 게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임상을 떠나 암을 연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당시는 암이 유전자의 이상에서 오는 질병이라는 정황증거가 많이 나온 상태였다. 발암유전자도 여럿 발견돼 있었다. 그러나 정상세포가 암세포로 바뀔 때 일어나는 전반적인 변화는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특히 우리 몸에서 암이 발생하는 걸 억제하는 유전자에 대해서는 밝혀진 게 없었다. 보겔스타인 박사는 연구대상으로 대장암을 선택했다.
다른 암에 비해 암 조직을 떼어내기 쉽기 때문이다. 그는 암세포를 잘 들여다보면 암 억제유전자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는 암세포의 77%에서 염색체의 특정부위가 결손된 현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즉 부모로부터 받은 17번 염색체 쌍의 한가닥에서 일부가 떨
어져 나간 상태였던 것.
보겔스타인 박사는 떨어져 나간 부분에 암 억제유전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머지 온전한 17번 염색체에서 이 부분에 돌연변이가 생길 경우 암 억제력을 잃어 암세포로 바뀐다고 가정했다. 실험을 진행한 결과 이 부분에 p53 단백질의 유전자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p53 단백질은 1979년 동물에서 종양을 유발하는 바이러스를 연구하다가 발견됐다. 즉 이 바이러스가 침입했을 때 양이 많아지는 여러 단백질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단백질 이름도 별 의미없이 붙였다. p는 단백질의 영문인 protein의 첫 글자이고 53은 질량이 53kDa(킬로달톤, 질량의 단위로 탄소동위원소 12C 원자 하나가 12Da이다)로 추정돼 p53이라고 불렀다.
그 뒤 사람에서도 p53 단백질이 발견됐고 암세포에서는 p53의 농도가 높다는게 확인되면서 p53은 발암인자로 생각됐다. 그러나 다른 중요한 발암인자도 여럿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주목을 받진 못했다.
결손된 조각에 p53 단백질의 유전자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보겔스타인 교수는 고민에 빠졌다. p53이 발암인자라면 한 염색체에서 결손될 경우 오히려 암이 억제돼야 하지 않을까(염색체 쌍 가운데 한쪽에만 있으므로 단백질 발현량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고민하던 보겔스타인 교수는 마침내 새로운 가설을 내놓는다. 즉 p53은 원래 암 억제인자인데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기능을 잃어버리거나 거꾸로 발암인자가 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대장암세포의 경우 17번 염색체 하나는 p53 유전자가 떨어져 나가고 나머지는 돌연변이가 일어나 암 억제력이 사라진 결과 암세포가 됐다는 것. 연구팀은 정상세포의 p53 유전자와 암세포의 p53 유전자를 비교했다. 그 결과 예상대로 암세포의 p53 유전자에는 염기 하나에 돌연변이가 일어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세포 위기 대응하는 총지휘관
1989년 4월 14일자 ‘사이언스’에 보겔스타인 교수팀의 연구 결과가 발표되자 암 연구자들은 즉시 그 중요성을 간파하고 앞다투어 p53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불과 수 년 사이 p53에 대해 많은 사실이 밝혀졌고 p53은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단백질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사이언스’는 1993년 p53 단백질을 ‘올해의 분자(Molecule of the Year)’로 선정하기에 이른다.
매년 p53 관련 논문이 수천 편씩 쏟아지고 있지만 놀랍게도 여전히 p53의 전모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알려진 p53의 작용은 무척 다양해 암을 지키는 파수꾼 가운데 ‘우두머리(master)’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p53 유전자는 평소에는 발현량이 적지만 외부 환경이 나쁜 쪽으로 변했을 때 발현량이 급증한다. 즉 발암물질이나 방사능, 활성산소, 자외선에 노출됐을 때인데 이런 환경은 세포의 DNA를 변형시키는 조건이다. 결국 p53은 세포가 위기에 처했을 때 대응하는 일련의 반응을 개시하게 하는 총지휘관인 셈이다.
먼저 p53 단백질은 전사인자로 작용한다. 전사인자란 특정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단백질이다. 연구 결과 p53 단백질은 발암유전자인 MDM2의 발현을 억제한다. 유전자를 조작해 p53 단백질이 없는 쥐를 만들 경우 이 쥐는 수주 뒤 몸 여기저기에 종양이 생기고 6개월 쯤 지나면 전신에 암이 퍼져 있거나 그 이전에 죽어버린다.
한편 p53은 세포의 분열을 억제하는 역할도 한다. 즉 p53 단백질은 WAF1이라는 유전자의 발현을 촉진하는데 WAF1은 CDK라는 효소에 달라붙어 그 작용을 억제한다. CDK는 세포분열을 촉진하는 효소다. 따라서 외부 원인으로 DNA가 고장난 세포의 경우 분열이 멈춘 사이 고장난 부분을 고칠 시간을 벌 수 있다. 1993년 저널 ‘셀’에 발표된, p53과 WAF1의 연관성을 밝힌 논문은 지금까지 ‘셀’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이라고 한다. 한편 세포가 돌이킬 수 없는 상태라고 판단되면 p53은 세포가 자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를 아포토시스(apoptosis)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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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와 암 사이 줄타기
그런데 문제는 p53 유전자 자체가 돌연변이에 무척 취약하다는 것. 대장암의 예에서 보듯 p53 유전자를 포함한 염색체 조각이 떨어져나갈 수 있을뿐더러 다양한 위치에서 염기의 돌연변이가 일어나 기능을 상실하거나 엉뚱한 작용을 하는 변형 p53 단백질이 만들어진다. 실제로 모든 암 가운데 절반 정도는 p53이 고장난 상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편 정상적인 p53 단백질도 외부 물질의 작용으로 기능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자궁경부암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인 인유두종바이러스(HPV)의 경우 E6이라는 단백질을 만드는데 E6은 p53 단백질에 달라붙어 무력화시킨다. 그 결과 세포분열이 왕성하게 일어나 사마귀가 생긴다. 그런데 HPV 가운데 자궁경부에 감염되는 종류는 이 작용이 더 강력해 암으로 이어지는 것.
그렇다면 암 조직에 p53 유전자나 단백질을 왕창 넣어준다면 효과적인 치료법이 되지 않을까. 실제로 2002년 과학자들은 이런 시도를 해봤다. 그 결과 암은 억제하지만 노화가 빨라진다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세포분열을 억제하다보니 새로운 세포가 생기지 않아 결국 세포노화로 이어진 것.
물론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p53이 고장난 암세포에 정상 수준의 p53을 만들수 있게 해주면 노화 부작용 없이 암 덩어리를 줄인다는 연구 결과가 2007년 나왔다. 결국 우리 몸은 p53을 절묘하게 조절해 노화와 발암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 최대 수명을 누리는 셈이다.
1979년 암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에 반응하는 여러 단백질 가운데 하나로 존재를 드러냈던 p53은 1989년 암 억제인자라는 실체가 밝혀진 뒤 생명과학에서 가장 유명한 분자가 됐다. 앞으로 p53 연구가 인류의 암 정복 여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