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만반의 준비가 돼 있습니다. 스타가르트병과 노인성황반변성에 대해 12명씩 환자를 확보했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병원에서 수주 내 임상을 개시합니다.”
지난 4월 29일 서울 메리어트호텔에서 열린 ‘제3차 국제 줄기세포 심포지엄’에서 연단에 오른 미국의 바이오업체 ACT사의 로버트 란자 최고과학경영자(CSO)는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한 임상시험이 임박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차의과학대 줄기세포치료연구소와 한국파스퇴르연구소가 공동 개최한 이번 심포지엄에는 란자 박사를 비롯해 줄기세포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석학들이 모여 줄기세포 연구의 최신동향을 소개하고 미래를 전망했다.
국내도 배아줄기세포치료 임상 허가
ACT사는 2001년 세계 최초로 핵치환방법을 써서 인간복제배아를 만드는 데 성공해 주목을 받았던 회사다. 당시 연구자들은 핵을 없앤 난자에 체세포의 핵을 넣은 뒤 전기와 화학 자극을 줘 체세포핵을 머금은 난자가 수정란처럼 발생과정을 시작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세포 6개까지 분열된 뒤 멈춰 줄기세포를 얻지는 못했다.
2004년 황우석 서울대 교수팀은 같은 방법을 써서 복제배아줄기세포주를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면역거부반응이 없는 자신의 체세포로 만능세포인 배아줄기세포를 만들 수 있다는 건 ‘환자맞춤형 줄기세포치료’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황 교수팀의 논문이 조작으로 밝혀지자 난자채취 등의 문제가 있는 복제배아 연구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지난 수 년 동안 ACT사는 미국 정부에서 연구를 허용한 배아줄기세포주(인공수정시술에서 쓰고 남아 폐기될 예정인 수정란에서 얻은 배아줄기세포)를 특정한 세포로 분화시켜 세포치료를 할 수 있는 수준까지 만드는 연구에 전념해왔다. 그 결과 배아줄기세포를 망막색소상피세포로 분화시켰고 적혈구로 만드는 데도 성공했다.
망막색소상피세포는 망막의 광수용세포에 영양을 공급하는 유모다.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FDA)은 지난해 11월 이 세포를 이용해 스타가르트병(청소년 때 실명이 되는 병)과 건성 노인성황반변성에 대한 임상 시험을 허용했다. ACT사와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국내 바이오업체인 차바이오앤디오스텍도 스타가르트병 국내임상을 신청해 지난 5월 4일 한국 식약청 승인을 받았다.
차바이오앤디오스텍의 정형민 사장은 “분당 차병원 안과에서 임상시험을 진행할 예정”이라며 “조만간 노인성황반변성에 대해서도 임상시험 신청서를 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배아줄기세포로 만든 세포를 믿을 수 있을까. 아무리 완벽하다고 해도 배아줄기세포 가운데 미분화한 세포가 암세포로 바뀔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또 타인의 세포이므로 면역거부반응은 일어나지 않을까.
“저희는 분화된 세포 100만 개에 들어 있는 미분화 세포 하나를 찾아내는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참고로 보통 치료에는 세포 5만 개 정도가 쓰입니다. 세포를 주입받은 실험동물 200마리 가운데 암이 발생한 경우는 한 건도 없었죠.”
란자 박사는 망막의 경우 면역거부반응이 거의 없다며 우려할 일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앞으로 배아줄기세포주를 계속 늘려나가 면역타입별로 세포은행을 만든다면 다른 많은 영역으로도 배아줄기세포 치료를 확장해나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1998년 최초로 확립된 인간배아줄기세포의 현미경 사진.]
[배아줄기세포를 분화시켜 만든 망막색소상피세포. 조만간 사람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에 들어간다.]
[미국 ACT사의 CSO 로버트 란자 박사는 4월 29일 열린 심포지엄에서 줄기세포를 분화시켜 만든 망막색소상피세포가 안전하다고 강조했다.]
란자 박사의 또 다른 주요 관심사는 줄기세포로 만든 혈액. 이 역시 차바이오앤디오스텍과 협력하고 있다. 란자 박사는 “줄기세포가 적혈구로 분화하면 세포핵이 퇴화하기 때문에(적혈구는 세포핵이 없다) 오히려 더 안전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실험동물 대체할 유도만능줄기세포
골수이식처럼 성체줄기세포를 그대로 쓰는 방법이 ‘1세대 줄기세포 치료’라면 배아줄기세포를 쓰는 방법은 ‘2세대 줄기세포 치료’라 할 수 있다. 2010년대는 2세대 줄기세포 치료가 본격화되는 시점인 셈이다. 그렇다면 환자맞춤형 줄기세포치료, 즉 자신의 체세포로 줄기세포를 만들어 이를 분화시킨 세포로 치료를 받는 ‘3세대 줄기세포 치료’는 언제 시작될까. 아니 가능하기는 한 걸까.
“핵치환을 이용한 복제배아줄기세포 연구는 어렵겠지만 유도만능줄기세포(iPSC)로는 가능합니다.”
2006년 세계 최초로 체세포에 배아줄기세포의 특성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유전자 4개를 도입해 배아줄기세포처럼 전분화능을 갖는 유도만능줄기세포를 만드는 데 성공한 일본 교토대 야마나카 신야 교수의 말이다. 실제로 유도만능줄기세포는 지난 5년 간 줄기세포 분야에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사실 복제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사라진 이유도 유도만능줄기세포의 등장 때문이다.
그런데 당장 맞춤형 줄기세포치료 시대를 열 줄 알았던 유도만능줄기세포가 생각보다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유도만능줄기세포를 똑같은 전분화능을 갖는 배아줄기세포와 비교했을 때 분화된 세포의 겉모습은 비슷해 보여도 염색체의 구조나 발현된 유전자의 패턴이 다르다는 게 확인됐기 때문.
[배아줄기세포와는 달리 유도만능줄기세포는 여전히 체세포 시절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래의 체세포와 전혀 다른 계열의 체세포로 분화될 경우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 한스 쉘러]
이번 심포지엄에 참석한 독일 막스플랑크분자생의학연구소 한스 쉘러 소장은 “배아줄기세포와는 달리 유도만능줄기세포는 여전히 체세포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며 “따라서 원래의 체세포와 전혀 다른 계열의 체세포로 분화될 경우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미 나이가 든 성체세포(주로 섬유아세포)로 만들다보니 유도만능줄기세포 자체가 노화된 상태라는 문제점도 있다. 따라서 출산 뒤 얻을 수 있는 제대혈 같은 조직을 보관해 여기에서 유도만능줄기세포를 얻는 방법도 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또 배아줄기세포의 특성을 갖게 하는 유전자를 바이러스에 실어 세포에 넣어주기 때문에 바이러스로 인한 위험성도 잠재돼 있다. 지난 2009년 미국 하버드대 김광수 교수팀이 유전자 대신 단백질을 직접 넣어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했지만 아직은 효율이 너무 낮다. 아무튼 유도만능줄기세포가 치료에 쓰이려면 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유도만능줄기세포를 임상에 적용하기까지는 갈 길이 멀지만 당장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분야도 있다. 과학저널 ‘네이처’ 5월 12일자에는 유도만능줄기세포를 이용한 정신분열증 모델링에 대한 연구 결과가 실렸다.
인구의 1%가 앓는 것으로 추정되는 신경질환인 정신분열증은 유전성이 80~85%로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유전적으로 정신분열증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뇌구조나 뇌세포의 형태는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다를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사후부검을 해보면 정신분열증인 사람의 뇌는 해부학적으로 상당히 다르다. 따라서 이런 측면을 면밀히 연구하면 정신분열증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뇌 속을 들여다보면서 연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미국 소크연구소 프레드 게이지 박사팀은 정상인과 정신분열증 환자의 피부를 역분화시켜 유도만능줄기세포를 만든 뒤 이를 신경세포로 분화시켰다. 줄기세포는 서로 구분할 수 없었지만 여기서 만든 신경세포는 두 집단에서 뚜렷한 차이가 났다. 즉 정신분열증 환자의 신경세포는 신경돌기의 숫자가 적었고 신경세포 사이를 연결하는 시냅스의 숫자도 적었다.
연구자들은 배양한 신경세포에 다양한 약물을 넣어 어떤 약물이 효과가 있는지도 조사해봤다. 그 결과 기존의 항정신병 약물 5가지 가운데 록사핀이라는 약물이 뉴런의 연결빈도를 증가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세포응용연구사업단 김동욱 단장(연세대 의대 교수)은 “유도만능줄기세포는 유전성 질병에 대한 모델을 만들고 약물을 찾는 데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라며 “현재 6가지 질병에 대한 유도만능줄기세포주를 확립해 줄기세포은행에 등록하는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 단장은 “많은 질병이 실험동물로는 재현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사람을 대상으로 연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한 치료제 개발 연구가 효과적이지 못했다”며 “이제 뇌세포를 시험관에서 연구하는 시대가 열린 셈”이라고 덧붙였다.
줄기세포까지 갈 필요 없는 직접교차분화
2010년 2월 25일자 ‘네이처’에는 유도만능줄기세포 발표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큰 주목을 받은 연구결과가 실렸다. 피부세포인 섬유아세포를 줄기세포를 거치지 않고 신경세포로 직접 바꾸는데 성공했다는 것. 완전히 분화된 세포가 역분화를 거쳐 미분화된 뒤 다시 원하는 타입으로 분화하는 게 아니라 그 상태에서 바로 다른 타입으로 분화된 것이다. 이를 직접교차분화(direct conversion)라고 부른다.
사실 교차분화가 완전히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다만 이전에는 서로 비슷한 세포로 분화시키는 정도였다. 예를 들어 신경교세포를 신경세포로 바꾼다던지(둘 다 외배엽에서 유래한 세포다) 섬유아세포를 근육세포로 바꾸는(둘 다 중배엽에서 유래한 세포다) 정도였다. 배아는 발생초기 내배엽, 중배엽, 외배엽으로 나뉜 뒤 각각의 계열에 따라 여러 세포로 분열한다.
따라서 중배엽 계열인 섬유아세포에서 외배엽 계열인 신경세포를 만들려면 먼저 3가지 배엽으로 나뉘기 이전의 상태인 유도만능줄기세포(배아줄기세포 수준)로 간 뒤 다시 분화시키는 게 상식이었다.
미국 스탠퍼드대 마리우스 베르니히 교수팀은 신경세포의 발생이나 기능에 관여하는 전사인자의 유전자 가운데 19개를 추린 뒤 이 유전자들을 섬유아세포에 넣어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봤다. 그 결과 세포의 형태가 바뀌면서 신경세포처럼 변했다. 연구팀은 집어넣는 유전자의 숫자를 줄여봤는데 최종적으로 단 3개의 유전자만 넣어도 신경 세포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직접교차분화는 미분화된 줄기세포로 갔다가 다시 분화시키는 기존 유도만능줄기세포보다 훨씬 간단하다. 또 줄기세포를 썼을 때 내재돼 있는, 남아 있는 미분화세포로 인한 발암 가능성이 없다는 장점도 있다.
다만 체세포에서 체세포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세포 수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많은 세포가 필요한 치료용으로는 부적합하다. 반면 역분화 방법은 줄기세포로 만들어 세포를 잔뜩 증식시킨 뒤 재분화시키기 때문에 수를 쉽게 늘릴 수 있다.
한편 유전성 질환을 갖는 환자에서 섬유아세포 같은 체세포를 얻어 직접교차분화를 이용해 원하는 세포로 분화 시킨 뒤 약물을 처리해 질병에 걸린 세포로 만들어 질병의 메커니즘을 연구하거나 약물을 스크린하는 용도로 쓸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신분열증 환자의 경우 모든 약을 먹어보지 않아도 섬유아세포에서 질병이 걸린 신경세포로 분화시킨 뒤에 약물을 넣어 가장 약효가 좋고 부작용이 적은 걸 선별할 수 있다.
UNIST(울산과기대) 한스쉘러줄기세포연구소 김정범 소장(나노생명화학부 교수)은 유도만능줄기세포와 직접교차분화세포의 장점을 결합한 방향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즉 체세포를 원하는 체세포의 바로 윗단계의 성체줄기세포까지만 역분화시킨 뒤 이를 원하는 체세포로 다시 분화시키는 방법이다. 즉 이편 계곡에서 저편 계곡으로 넘어가는데 산꼭대기(유도만능줄기세포)까지 올라간 뒤 내려가거나 산등성이(직접교차분화)을 넘는 대신 저편 계곡으로 이어지는 중간 산봉우리(성체줄기세포)까지만 가서 내려가겠다는 것.
김 소장은 “이 방법은 어느 정도 분화의 방향이 결정된 성체줄기세포까지만 역분화하는 것이므로 미분화세포로 인한 발암 가능성 등 부작용이 낮을 것”이라며 “또 성체줄기세포를 증식시키면 환자 치료에 쓸 수 있는 충분한 양의 분화된 세포를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1998년 인간배아줄기세포가 발견된 지 13년 만에 본격적인 ‘2세대 줄기세포 치료’의 시대가 막 열리고 있다. 2006년 선을 보인 유도만능줄기세포나 지난해 발표된 직접교차분화 역시 10년쯤 지나면 ‘3세대 줄기세포 치료’의 시대로 이어지지 않을까. 물론 질병 메커니즘을 규명하거나 신약발굴에 활용되는 영역은 이미 시작됐거나 임박해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