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잡지와 과학책을 즐겨 읽던 어린이가 있었다. 중학생이 돼 칼 세이건이 쓴 ‘코스모스’를 무려 12번 읽었다. 미국 사는 친척이 원서를 보내주자 영어 공부할 겸 다시 독파했다. 칼 세이건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답장까지 받았다. 그는 자라서 세계적인 과학철학자가 됐다. 동아일보 창간 기념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에 선정된 장하석(44) 영국 케임브리지대 과학철학·과학사학과 교수다.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잠깐 귀국한 장 교수를 4월 5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났다.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는 동아일보에 쓴 글에서 장 교수를 ‘21세기의 토마스 쿤’이라고 불렀다. 쿤은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유명한 과학철학자다. 안팎으로 큰 기대를 받고 있는 장 교수에게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물었더니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너무나 당연하게 보이는 것들을 뒤집고 싶다”고 대답했다.
“온도가 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어요? 당연히 알 거 같은데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아요. 그런데 이게 18세기 과학자들에게도 굉장히 어려운 문제였어요. 이처럼 상식이라고 믿어왔던 과학개념의 뿌리를 캐고 싶어요.”
그는 2007년 ‘온도 발명하기(Inventing Temperature)’라는 책으로 영국에서 사상 최연소로 ‘라카토슈상’을 받았다. 가장 우수한 과학철학 책에 주는 상이다. 그는 이 책에서 온도란 무엇이고 어떻게 온도를 측정해야 하는지, 과학자들이 개념을 잡아가고 온도계를 발명하는 과정을 진지하게 다뤘다. 지난해는 ‘물’을 주제로 책을 냈고, 지금은 ‘배터리’를 주제로 책을 쓰고 있다.
“지금은 당연하게 전기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처음에는 너무나 낯설고 어려운 말이었어요. 예를 들어 보죠. 왜 정전기가 생길까요? 자유전자 때문이라고요? 자유전자는 어디 있다가 나온 거죠?”
자리를 함께한 곽민영 동아일보 기자는 “교수님 말씀을 듣다보면 8살짜리 어린이의 질문을 그대로 하는 거 같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8살짜리가 던지는 근본에 대한 궁금증이 과학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동감했다. 1시간 넘는 인터뷰 내내 그는 한번도 말이 빨라지지 않았다. 느릿느릿하지만 부드러운 말투 속에서 그는 하나라도 더 정확한 단어와 쉬운 논리를 찾아내려는 듯 했다.
[부친 장재식 전 산업자원부 장관은 장하석 교수와 형(장하준 교수)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공부하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게 했다”며 “형제 모두 책은 정말 많이 봤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왼쪽부터) 장 전 장관, 장 교수, 모친 최우숙 여사가 함께 포즈를 취했다.]
물리학도에서 과학철학자로
1967년 장재식 전 산업자원부 장관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장 교수는 16세에 미국 고등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캘리포니아공대(칼텍)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그는 스탠퍼드대에서 ‘양자물리학의 측정과 비통일성’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도유망한 물리학도가 왜 과학철학으로 진로를 바꿨냐고 물었더니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대답했다.
“칼텍에서 공부할 때 고민이 많았어요. 너무 계산이나 지식만 가르치는 거예요. 물리학의 근본적인 것들을 물어보면 그건 철학자에게 물어보라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자유로운 학풍을 가진 케임브리지대라면 나를 이해하지 않을까 싶어 물리학과에 편지를 보냈는데 엉뚱하게 지금 있는 과학철학과에서 오라고 답장이 왔어요. 학교는 결국 다른 곳을 갔지만 그때 ‘물리학자로서 진지하게 편지를 보냈는데도 이런 대답이 왔으니 결국 난 과학철학을 해야겠구나’ 결심하게 됐죠.”
처음에는 과학철학의 현대적인 주제들을 연구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온도, 물, 전기 같은 아주 상식적인 개념이 왜 생겼는지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상식을 뒤집는 작업을 시작했고 잇따라 우수한 성과를 내놓았다. 그는 2010년 케임브리지대 한스 라우싱 석좌교수로 부임했는데 과학사·과학철학과 소속 10명의 교수 중 선임 자리이다.
“과학사나 과학철학이 일반 사람들과 무슨 관계가 있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아요. 과학사나 과학철학을 배우면 과학을 훨씬 재미있고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과학적인 개념이 왜 생겼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받아들인다면 과학도 미신이나 맹목적인 종교가 아닐까요. 지금 일본 원전 사고로 공포감을 조장하는 기사가 많은데 과학적인 잣대로 보면 틀린 게 꽤 많아요. 이런 걸 과학철학이 바로잡아 줄 수 있죠.”
과학과 경제학이 만난 ‘천재 집안’
그의 형은 ‘나쁜 사마리아인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라는 베스트셀러를 낸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다.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학장과 장하진 전 여성가족부 장관이 사촌이어서 인터넷에서는 ‘천재 집안’으로 유명하다.
“형과 같은 일터에 있으니 가끔 만나고 좋지요. 학생이었을 때는 제가 먼저 유학을 갔어요. 제가 형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고, 형은 제게 사회과학을 가르쳐 줬어요. 너무 과학만 해서는 안 되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아야 된다면서요. 누나(장연희 씨)도 있는데 굉장히 센스가 좋아요. 형과 제가 토론하며 하늘 위에서 길을 잃고 헤메고 있으면 누나가 땅으로 데려와 줍니다.”
마지막으로 장 교수에게 한국의 과학 교육에 대해 물어봤다.
“한국은 너무 과학자를 길러내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그러니 암기만 해야 하고 문제만 풀게 되죠. 보통 사람들도 과학을 즐겁게 만날 수 있습니다. 과학사를 배우는 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역사를 통해 과학을 배우면 원리도 쉽게 깨우칠 수 있고 재미있거든요. 사실 이번에 과학동아를 보고 이렇게 우수한 과학잡지가 한국에 있었구나 하고 깜짝 놀랐어요. 제가 학생이었을 때 과학동아가 있었다면 정말 좋아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