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5일 폐암 환자 김 씨와 가족 등 31명은 “30년 넘게 담배를 피워 폐암이 생겼는데 KT&G가 담배의 위험성을 충분히 알리지 않았다”며 국가와 KT&G를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가 패소했다. 2007년 첫 재판에 이은 고등법원 항소심이다. 재판부는 “흡연은 개인의 선택이므로 담배 회사가 배상할 이유가 없다”고 판결했다. 일본과 프랑스, 독일 법원도 마찬가지로 “흡연은 자유 의사”라며 담배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연방대법원이 담배회사의 잘못을 인정하고 엄청난 액수의 배상 금액을 판결한 사례가 많다. 미국도 처음에는 흡연자가 패소하는 분위기였다. 1954년 폐암에 걸린 흡연자들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 최초인데, 당시 담배회사들은 폐암이 흡연과 관계가 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또 흡연의 위험성을 담배회사들 역시 알지 못했다는 항변으로 승소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담배소송에서 흡연 피해자들이 이기기 시작했다. 담배회사의 내부 문건이 법정에 나오면서다. 미국의 담배회사인 브라운 앤 윌리엄슨(B&W)의 수석과학자 및 부사장 제프리 와이겐드 박사가 대표적인 내부 고발자다. 1992년 그는 담배회사가 ‘쿠머린’이라는 화학물질을 담배의 첨가제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쿠머린은 A급 발암물질로 미 식품의약품안전청(FDA)이 1954년에 사용을 금지했다.
그는 회사에 쿠머린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가 해고당했다. 그 후, 그는 많은 담배소송에서 증인으로 나서 소송을 승리로 이끌었다.
“B&W에 근무하며 나는 담배회사의 실체를 깨달았다. 담배회사는 오직 청소년 흡연자를 늘리고 소비자가 담배를 끊지 못하게 해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 담배가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소비자의 건강과 안전은 무시하고 오히려 니코틴 중독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첨가제를 사용했다. 또 담배는 중독성이 없으며 흡연행위는 자유의지에 의한 개인의 선택이라고 강조하는 법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1990년대 중반 담배회사에 근무했던 제프리 와이겐드 박사는 회사의 불법 제조에 항의하다 해고당하고 법정에서 이를 증언했다. 이 이야기는 1999년 영화 ‘인사이더’로 제작됐다.]
“니코틴을 뇌로 보내라”
니코틴이 중독을 일으켜 계속된 흡연으로 폐암이 발생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의 담배소송에서 보듯 소송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요인은 니코틴이 아니라 ‘첨가제’였다. 담배회사는 “담배 맛을 높이기 위해 첨가제를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담배회사는 담배에 599종의 첨가제를 넣는데, 이들의 무게는 무려 담배 무게의 10%에 달한다. 먹는 음식에 넣는 첨가제는 보통 제품 무게의 0.01% 이하다. 왜 이렇게 첨가제를 많이 쓰는 걸까. 도대체 첨가제의 무엇이 문제였을까.
담배회사는 오래 전부터 니코틴의 중독성을 잘 알고 있었다. 1967년 미국의 담배회사인 브리티시 아메리칸 토바코(BAT)는 사내 과학자 총회에서 “흡연은 니코틴에 중독돼 나타나는 습관”이라고 발표했다. 또 1980년 이 회사 직원인 한 의사는 실험 노트에 “담배는 중독성이 가장 강한 마약이다. 많은 사람들은 끊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끊을 수 없다는 이유로 담배를 계속 피울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중독자는 자신을 위해 성숙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썼다.
담배회사는 니코틴의 중독성을 이용하려고 애썼다. 흡연자를 평생 소비자로 붙들기 위해 니코틴을 더 효과적으로 주입하는 방법을 불철주야 연구했다. 미국의 담배회사는 “니코틴이 뇌로 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때 사용한 것이 바로 첨가제였다.
[1990년대 중반 담배회사에 근무했던 제프리 와이겐드 박사는 회사의 불법 제조에 항의하다 해고당하고 법정에서 이를 증언했다. 이 이야기는 1999년 영화 ‘인사이더’로 제작됐다.]
[담뱃잎에 들어 있는 니코틴은 고체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인체에 잘 흡수되지 않는다. 담배회사는 이 니코틴을 기체 상태로 바꿨다.]
가장 먼저 시작한 연구는 각종 첨가제를 사용해 니코틴의 화학적 형태를 바꾸는 것이었다. 담뱃잎에 있는 ‘자연니코틴’은 흡수율이 미약해 흡연자를 중독시키기 어렵다. 자연니코틴은 염 상태로 존재해 좀처럼 기화되지 않아 인체에 흡수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니코틴이 기화해 폐에 흡수됐다 하더라도 폐 속에 있는 물과 반응해 다시 염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담배회사는 염 상태의 니코틴을 기체인 ‘프리니코틴’으로 바꿨다. 프리니코틴은 체내에 빨리 흡수돼 사람을 니코틴에 쉽게 중독시킨다. 또 프리니코틴 함유량이 높으면 담배를 피는 즉시 쾌감을 줘 제품을 선호하도록 만든다.
미국의 담배회사인 필립모리스는 연기의 산도(pH)가 6이상이면 프리니코틴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담배에 염기성 물질인 암모니아를 첨가했다. 그러나 필립모리스는 이런 의도를 숨겼다. 암모니아를 첨가하는 것은 담배의 향미를 높이고 흡연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암모니아 첨가제도 ‘순화제’, ‘풍미강화제’로 불렀다.
담배회사들은 또 감마-헵타락톤이라는 첨가제를 넣어 체내의 니코틴 분해 효소의 활동을 막았다. 체내에 흡수된 니코틴이 오랜 시간 머물게 해 중독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감초, 코코아, 초콜릿 같은 당도 대표적인 첨가제다. 필립모리스의 동물실험 결과, 당 첨가제는 기관지와 기도를 확장시켜 니코틴의 체내 흡수율을 높였다. 더 큰 문제는 당 첨가제가 체내 세포의 돌연변이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상온에서 당 첨가제는 문제가 없지만, 불을 붙여 연기로 변하면 발암물질인 아세트알데히드를 만들기 때문이다.
담배 특유의 거칠고 자극적인 냄새를 가리기 위해 넣는 향 첨가제인 멘톨도 니코틴이 몸 안에 고농도로 들어가게 한다. 미국 하버드대 연구자들이 담배회사의 내부문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이들이 멘톨의 함량을 조절해 청소년들이 흡연에 쉽게 빠져들게 유도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를 진행한 그레고리 커널리 교수는 “담배 가운데 특히 멘톨이 많이 들어간 제품을 선호하는 사람은 좀처럼 담배를 끊기가 어렵다”며 “지속적인 금연캠페인으로 담배 소비량이 줄었는데 멘톨 담배 판매량은 그대로여서 상대적 비율이 올라가고 있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멘톨 담배를 피우는 비율은 나이가 어릴수록 높다. 35세 이상은 흡연자의 30.6%인데 18~24세는 35.6%, 12~17세는 43.8%다. 이 연구 결과는 ‘미국공중보건저널’ 2008년 9월호에 실렸다.
얼마 전 KT&G도 담배 필터에 멘톨 캡슐을 달아 손으로 필터를 눌러 터뜨리면 멘톨 향이 나는 담배를 출시했다. 한국금연연구소의 최창목 소장은 “멘톨 담배는 더 깊이 빨아들이기 때문에 일반 담배보다 니코틴 의존성이 강하다”고 주장했다.
흡연 피해자나 과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미국의 담배회사는 소비자를 니코틴에 중독시켜 담배를 끊지 못하게 한 다음 장기간에 걸쳐 몸속에 발암물질을 투입해 서서히 죽이는 ‘살인비지니스’를 한 셈이다. 2008년 세계보건기구(WHO)도 “담배는 사람을 죽이는 유일한 합법적 소비자 상품”으로 정의했다.
이런 정황들이 하나하나 밝혀지면서 흡연 피해자들이 승소하기 시작했다. 가장 유명한 소송은 ‘제시 윌리엄스 vs. 필립모리스’ 사건이다. 이 소송으로 필립모리스는 2009년 담배소송 손해배상액으로 가장 큰 7950만 달러(당시 한화 약 1000억 원)를 지급했다.
끝나지 않은 담배소송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왜 피해자들이 소송에서 졌을까. 그동안 KT&G는 첨가제 목록을 기밀로 취급해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이번에 재판부에 제출한 것이 처음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다른 연구기관에서 KT&G의 담배 첨가제를 연구한 적이 없다. KT&G가 내부 실험 결과를 공개하지 않는 한 미국 담배회사가 쓰는 첨가제 목록과 비교해 맞춰보는 방법 밖에 없다. 정보 접근에 한계가 있었다.
KT&G 측 박교선 변호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KT&G도 담배를 만들 때 200여 종의 첨가제를 쓴다”며 “수분을 유지하고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넣는 글리세린 같은 보습제가 30% 이상 들어가고 멘톨 같은 향료가 12~15%, 담배 맛을 좋게 하는 당류가 40~45%”라고 말했다. 그러나 박 변호사는 “KT&G에서 쓰는 담배 첨가제가 니코틴 의존증을 높인다는 주장은 편향된 것”이라며 “재판부도 담배 첨가제가 담배의 맛과 향을 증진시키는 것 이외의 작용을 한다고 인정하지 않아 KT&G 손을 들어준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원고 측 증인인 공주대 약물남용연구소 신호상 교수는 “실험 결과 KT&G 측에서 스스로 밝힌 첨가제 이외의 것들이 밝혀졌다”며 “KT&G가 첨가제 목록을 은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용목적에 대해서도 허위주장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원고 측은 KT&G가 숨기고 있는 담배 첨가제를 모두 밝히면 승소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신 교수는 추가로 찾아낸 첨가제는 ‘재판이 진행 중’이라며 공개하지 않았다.
이번 재판에서 담배 첨가제를 정확하게 검증하지 못한 이유는 국내에 담배 첨가제 성분표시에 대한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KT&G 측이 어떤 첨가제를 넣든 사전에 규제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현행 담배사업법에는 니코틴과 타르에 대해서만 함량을 표시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재판부는 이번 항소심에서 “담배 회사가 고의로 거짓정보를 주지 않았고 니코틴 함량 조작을 통해 의존증을 유지시키는 위법행위를 한 증거가 없다”고 판결을 내렸다.
이에 비해 미국정부는 지난 1994년 담배회사들에게 모든 첨가제 목록을 공개할 것을 명령했다. 올해부터는 FDA가 미국 내에서 판매하는 담배의 성분을 심사하고 있다. 발암물질이나 논란이 있는 화학물질이 검출되면 그 제품을 팔 수 없다. 미국 정부가 이런 제도를 갖춘 것은 국민의 건강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김은지 한국금연운동협의회 사무총장은 “이번 재판부의 판결을 보면서 우리 재판부가 미국 수준에 이르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KT&G는 계속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국민에게 첨가제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제도가 개선돼 미국과 같은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올해로 12년째 담배피해소송을 진행 중인 배금자 변호사는 “KT&G를 상대로 제대로 된 소송을 진행하려면 비용이 50억 원 정도가 소요된다”고 말한다. 그만큼 담배에 얽힌 진실은 밝히기 어렵다. 그럼에도 배 변호사는 “다시 대법원에 상고할 예정”이라며 “담배회사로부터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