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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립 교수는 정말 억울하게 노벨상을 놓쳤나

노벨상위원회의 실수로 한국인 첫 노벨물리학상이 날아갔다.

지난해 11월 29일 오후, 이런 제목의 뉴스가 우리나라를 한껏 달궜다. 그래핀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김필립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가 올해 노벨상 수상에서 제외된 것은 잘못이었다는 내용이었다. 더구나 그 사실을 한 미국 과학자가 공개적으로 제기해서 더 화제가 됐다. 근거는 세계적인 학술지 ‘네이처’ 11월 25일자에 실린 한 쪽짜리 기사. ‘노벨 문서가 논쟁을 촉발했다’는 제목의 이 기사는 실제로 김필립 교수가 유력한 후보였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내비치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 김 교수는 억울하게 노벨상을 놓친 걸까.













논란의 시작은 발터르 더 히에르 미국 조지아공대 교수가 노벨상위원회에 보낸 편지다. 더 히에르 교수는 수상자 발표 후 40일이 지난 11월 17일, 노벨상위원회의 ‘실수’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을 총 1만 500자가 넘는 긴 편지에 담아 위원회에 보냈다. 자신의 홈페이지에도 동시에 공개한 이 편지에서 더 히에르 교수는 “노벨상위원회가 노벨상의 근거를 설명한 ‘과학적 배경’이라는 제목의 문서에 그래핀에 관한 오류가 여럿 있다”며 “이 내용을 고치지 않으면 과학계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네이처는 다음 날인 18일 곧바로 “노벨상위원회가 비난에 휩싸이다”라는 제목의 온라인 뉴스를 올렸다. 더 히에르 교수의 비판을 상세히 전하고, 이에 대한 안드레 가임 교수, 김필립 교수의 반응을 덧붙인 기사였다. 노벨상위원회가 더 히에르 교수의 지적을 일부 수용하겠다고 한 내용도 포함돼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국내 학계와 언론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일주일 뒤인 25일 이 기사가 네이처 지면에 실리자 사정이 달라졌다. 며칠 사이에 거의 모든 매체가 “한국인이 첫 노벨물리학상을 놓친 것은 노벨위원회의 잘못”이라는 뉴스를 내보냈다.



더 히에르 교수는 정말 김 교수를 옹호했나



하지만 이 기사들은 과장이거나 틀렸다. 더 히에르 교수는 편지 어디에서도 김 교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더 히에르 교수는 김 교수의 이름은 물론 김 교수의 2005년 네이처 논문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이번 논란에서 김 교수의 이름을 처음 거론한 것은 논란을 보도한 네이처였다.





더 히에르 교수가 김 교수와 그의 논문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 김 교수를 옹호하거나 추켜 세울 뜻이 없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내비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김 교수의 2005년 네이처 논문은 그래핀의 성질을 처음으로 밝힌 연구 중 하나다. 그래핀 분리를 다룬 가임 교수팀의 2004년 사이언스 논문 이후 가장 중요한 논문으로 꼽히고 있다. 또 가임 교수팀의 두 번째 논문 바로 뒤에 실려서 김 교수팀이 가임 교수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연구팀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연구 내용에도 유사점이 많다. 그런데도 더 히에르 교수가 김 교수의 논문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가임 교수팀의 2004, 2005년 두 논문은 자세히 인용했다)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더 히에르 교수는 어떤 의도로 이 편지를 썼을까. 우선 그의 주장대로 ‘과학적 배경’에 실린 잘못된 내용이 그래핀 학계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우려해서일 수 있다. 실제로 그의 편지는 ‘과학적 배경’의 오류를 다섯 가지로 정리한 뒤 이를 반박하는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박스 기사 참조). 하지만 국내 학계에서는 다른 의도를 의심하고 있다. 더 히에르 교수가 자신의 업적을 드러낼 목적으로 노벨상위원회에 항의를 했다는 것이다.



12월 9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의 2010 다산컨퍼런스 그래핀 조직위원회는 그래핀 학자들의 뜻을 모아 성명서를 냈다. 조직위는 “더 히에르 교수는 항상 자신이 그래핀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해 노벨상을 타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며 “하지만 학계에서 인정하지 않자 이를 우회적으로 항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포스텍 물리학과 지승훈 교수는 “더 히에르 교수는 실리콘 카바이드에서 얇은 탄소층을 떼어내 그래핀을 만드는 기술을 연구해 왔다”며 “이 기술이 그래핀의 응용 가능성을 높였다는 점을 호소한 듯 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더 히에르 교수는 자신의 논문과 업적을 편지에 비교적 자세히 소개했다.



더 히에르 교수의 편지에 대한 국내 그래핀 전문가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성균관대 나노과학기술원 홍병희 교수는 “그의 주장은 자신이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는 불만에 불과하다”며 “억지스러운 면이 많다”고 잘라 말했다. 지 교수는 “그래핀을 전자부품으로 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명한 것은 가임 교수와 김 교수가 2005년 네이처에 동시에 보고한 양자홀 효과”라며 “노벨상 자리가 한 자리 더 늘어나도 더 히에르 교수 차지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염한웅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도 “더 히에르 교수의 편지는 노벨상에 뒤따르기 마련인 일부의 이의 제기 수준”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가 받을 수는 없었나



그렇다면 노벨상위원회는 김 교수가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단해서 수상에서 제외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국내외 전문가들의 생각이다. 네이처의 기사를 쓴 유진 라이히 기자는 18일과 25일 기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김필립 교수가 상을 공동으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는 표현을 써서 그가 수상의 물망에 올랐음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노벨상 위원회가 12월 10일 시상식에서 공개한 공식 포스터에도 가임 교수팀의 홈페이지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김 교수의 연구실 홈페이지가 소개돼 있다. 홍 교수는 “세계그래핀학회는 김 교수가 노벨상을 받았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 교수가 가임 교수팀과 함께 상을 받기에는 ‘2%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김 교수의 2005년 양자홀 연구가 가임 교수가 개발한 스카치테이프 방법을 써서 얻은 그래핀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지 교수는 “아주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김 교수의 연구는 가임 교수가 분리한 그래핀을 실험적으로 증명해 준 셈이 된다”며 “만약 조금 늦었더라도 김 교수만의 방법으로 그래핀을 얻은 뒤 양자홀 논문을 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핀 조직위는 “그래핀 분야 연구에 기여한 전체 양을 따지면 두 팀 사이에 차이가 없다”면서도 “하지만 2004년 가임 교수팀의 사이언스 논문이 이후 연구의 기폭제가 된 점은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노벨상 위원회가 물리학 분야에서 기술적 응용보다는 최초의 발견에 더 후한 점수를 준다는 사실도 김 교수에게는 불리했다. 영국 아인도벤공대 산업디자인과 크리스토퍼 바트넥 교수가 2007년 8월 네이처에 낸 기고문에 따르면 1901년부터 2006년까지 나온 노벨물리학상의 77%가 새로운 현상이나 이론, 제조법을 발견한 학자에게 돌아갔다. 조직위도 “노벨상 위원회는 축적된 연구 업적보다는 최초성을 중시한다”며 “이런 관례를 고려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결과가 바뀔 가능성은 없나




이런 점을 종합해 보면 수상 결과가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선 노벨상의 결과가 바뀐 사례가 지금까지 한 번도 없다. 노벨상위원회 역시 수상자를 번복하거나 추가할 뜻이 없음을 이미 확실히 했다. 노벨상 위원회 회원인 스웨덴 찰머스공대의 피어 델싱 교수는 “‘과학적 배경’ 문서의 내용에 일부 오류가 있고, 그래핀이 과학계에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인지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면서도 “노벨위원회가 이 문제를 충분히 연구했다고 확신한다”고 네이처에 말했다. 결국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가임 교수와 노보셀로프 박사가 참석한 가운데 예정대로 시상식이 열렸다.



당분간 그래핀 분야에서 새로운 노벨상이 나올 가능성은 높지 않다. 만약 추가로 상이 나오려면 새롭고 뛰어난 파생 연구 분야가 나와야 한다. 하지만 그런 분야가 당장 나올지는 회의적이다. 더구나 김 교수가 그 분야를 주도한다는 보장도 없다. 다만 현재 김 교수가 응용 분야 연구를 이끌고 있는 만큼, 수상 가능성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조직위는 더 이상의 논쟁을 삼가는 편이 조금이라도 노벨상 수상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밝혔다.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이번 논쟁은 우리 물리학계에 적지 않은 의의를 남겼다. 우리 학자가 국제 과학계에서 ‘노벨상 후보’로 거론된 사실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염 교수는 “문헌을 분석해 보면 ‘한국인이 노벨상을 받을 뻔했다’는 언급은 1937년부터 나온다”며 “하지만 대부분 국내 학자들과 언론의 의견이었을 뿐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홍 교수도 “세계 과학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대단한 업적”이라고 말해 이번 논란이 우리나라가 노벨상에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가 됐음을 인정했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로 뽑힌 안드레 가임 영국 맨체스터대 교수(왼쪽)와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박사. 2004년 그래핀을 처음으로 분리했을 뿐 아니라 2005년 중요한 성질까지 측정해 보고했다. 김필립 교수도 성질을 거의 동시에 측정해 발표했으나 가임 교수팀의 그래핀 제조법을 따랐다는 한계가 있었다.]



노벨 물리학상 심사위원 현지 단독 인터뷰1

“지도교수가 안 된다는 연구도 하라”

 

지난해 12월 7일 스웨덴 스톡홀름 시내 그랜드호텔 1층 레스토랑. 점심시간이라 홀이 붐빈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안드레 가임 영국 맨체스터대 교수가 식사를 마친 듯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고 있다. 노벨상 수상자들은 10일 시상식을 앞두고 6일부터 기자회견, 대중강연 등 ‘노벨 주간(Nobel Week)’의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이 호텔에 머문다.



그리고 벽 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흰 머리의 신사. 노벨 물리학상 심사위원 5명 가운데 한 사람인 뵈리에 요한손 웁살라대 교수다. 그는 10월 5일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 물리학상 수상자를 전 세계에 생중계로 발표할 때 자리했던 심사위원 3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국내 언론이 노벨상 심사위원을 현지에서 단독으로 만나기는 처음. 요한손 교수는 “한국 물리학자들의 연구 성과와 태도를 좋아한다”면서 “한국어만 할 수 있었더라면 한국에서 일했을 것”이란 말로 어색함을 한 번에 날려버렸다.



하지만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던 요한손 교수도 김필립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얘기가 나오자 얼굴이 굳어지며 난처해했다. 요한손 교수는 “노벨상 선정 과정에 대한 모든 사항은 50년이 지나야 공개할 수 있다”면서 말을 아꼈다. 그는 “그래핀 연구자가 세계적으로 1000명은 될 것”이라면서 “이 중에 누군가를 결정해야 하는 만큼 누가 그래핀을 가장 먼저 발명했는지 따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요한손 교수는 노벨상을 받기 위해서는 후보자로 추천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후보자로 추천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국제 학회나 세미나 등에서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재 노벨상 선정 과정은 크게 5단계다. 노벨위원회는 9월 전 세계 대학의 전문가 3000명에게 후보자 추천서를 보낸다. 추천서 마감은 이듬해 1월 31일. 2월에는 수천 명의 후보자를 250~350명으로 1차 압축한 뒤 3~5월 분야별 외부 전문가에게 후보자의 업적을 자세히 평가받는다. 그리고 6~8월 위원회가 이들 후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면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분과별 총회(물리학상, 화학상)와 카롤린스카 의대 총회(생리의학상)에서 투표로 수상자가 결정된다. 다수결로 결정하는 게 원칙이지만 3개월여에 걸쳐 심사위원들이 많은 토론을 거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수상자는 만장일치로 결정된다.



요한손 교수는 “심사위원은 과학자 다수의 의견을 잘 읽어야 하는 ‘통역자’의 역할을 한다”면서 “이 때문에 후보자들에 대한 외부 전문가의 평가가 심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노벨상을 타기 위해서는 “젊은 연구자들이 지도교수의 지시에만 의존하지 말고 때로는 지도교수가 안 된다고 하는 연구도 시도해야 한다”면서 “자신의 연구에 재미를 느껴야 연구가 잘 되고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말했다.



노벨 생리의학상 심사위원 현지 단독 인터뷰

“독창적 발견해야 생리의학상 받아”








“노벨 생리의학상은 누가 최초로 발견했는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노벨 물리학상이나 화학상이 새로운 물질이나 원리를 발명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경향이 강한 것과는 대조적이죠.”



12월 8일 노벨로(路) 5번가에 자리 잡은 사무실에서 만난 얀 안데르손 카롤린스카 연구소 부총장은 노벨 생리의학상의 선정 기준을 이같이 설명했다. 카롤린스카 연구소는 미국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가 공대인 것처럼 명칭만 ‘연구소’일 뿐 사실상 세계적인 의대다. 2010년부터 부총장을 맡고 있는 얀 안데르손 교수는 2007년부터 노벨 생리의학상 심사위원도 겸하고 있다.



안데르손 부총장은 200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예로 들며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의 시발점을 놓고 당시 심사위원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면서 “결국 에이즈를 일으키는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를 처음 발견한 연구자들이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생리의학상은 상의 성격 상 인류 삶의 질을 얼마나 향상시켰는지도 중요한 심사 기준으로 삼는다”면서 “올해 수상한 시험관 아기의 경우 체외 수정 기술이 종교적, 윤리적 논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심사위원들은 이 기술이 수백만 불임 부부에게 희망을 줬다는 점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노벨 생리의학상의 경우 한 연구 그룹에서 스승과 제자가 시간차를 두고 수상하는 특징이 강하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안데르손 부총장은 “노벨상 수상자들은 창의적인 질문을 많이 던진다”면서 “좋은 질문 하나가 노벨상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안데르손 부총장은 최근 한국 정부가 20~30대 신진과학자 100여명에게 5년간 일자리와 연구비를 제공하는 ‘노벨 과학상 프로젝트’를 시작한 데 대해 “젊은 과학자의 연구를 지원하면 매우 창의적인 주제가 나올 것”이라면서 “한국의 첫 노벨상 배출에 도움이 되는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안데르손 부총장을 포함해 노벨위원회 심사위원들은 정기적으로 초등학교를 방문해 학생들에게 ‘노벨상은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란 주제로 강연을 한다. 이때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내용도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다. 그는 이를 “과학의 자유(scientific freedom)”라고 표현했다.



안데르손 부총장이 꼽은 노벨 생리의학상의 수상자격은 하나다. 독창적인(unique) 발견을 해낸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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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윤신영.이현경기자│동아사이언스, 맨체스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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