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15일 광복절. 3년 8개월의 복원 공사 끝에 새 광화문이 대중에 공개됐다.광화문처럼 기구한 운명을 겪은 문화재도 흔치 않다. 조선 태조 4년(1395) 처음 지어졌지만 임진왜란 당시 훼손돼 260년을 폐허로 지냈다. 고종 1년(1864)에 중건돼 지금의 모습을 갖췄지만 일제강점기 시절인 1927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경복궁 내부에 지으며 옆 자리로 옮겨졌다. 6.25전쟁 중에 상부의 목조건물이 또 한번 소실된다. 1968년에 하부를 그대로 남겨두고 상단 건물만 어설프게 재현해 진정한 ‘문화재’라 부르기 어려웠다.
위치는 원래 서 있던 자리에서 북쪽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떨어져 있었고 방향은 3.75° 틀어져 있었다. 나무가 아닌 철근콘크리트로 모양만 흉내 낸데다 그마저 여기저기 원형과 다른 점이 많았다. 우리가 어린 시절 보고 자랐던 광화문은 한 많은 문화재였다.
“제대로 만들어 보자”
이런 광화문을 새롭게 살려보자는 의견이 모아지면서 2006년부터 복원작업이 시작됐다. 먼저 틀어진 광화문의 위치를 바로 잡자는 데 의견이 모였다. 근정전, 근정문, 흥례문과 직선축을 이루는 원래위치에 복원하기로 했다. 새로 짓는 광화문은 건물 위치를 바꿔야 하니 ‘복원’이라지만 처음부터 다시 건물을 지어 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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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수고를 하면서까지 굳이 다시 자리를 옮긴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네 선조들의 독특한 풍수지리사상을 재현하기 위해서다. 공주대 문화재보존과학과 서정호 교수는 “한반도 지형에서는 차가운 북풍을 막아주고, 안정적으로 식수를 구할 수 있는 배산임수 사상이 기본”이라며 “이런 풍수지리 사상을 철저히 지켜 만든 왕궁의 배치는 국가의 안위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설명했다.당시 일제가 광화문의 자리를 옮기고, 경복궁 내에 총독부 건물을 짓고,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바꾼 것은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궁의 구조와 배치를 바꿔 민족의 정기를 끊으려 했던 것이다.
문화재청은 2006년 12월 4일 ‘광화문 제모습 찾기’ 선포식을 개최하고 철거를 시작해 이듬해인 2007년 5월까지 공사를 진행해 기존의 광화문을 모두 들어냈다.
완벽한 복원을 위해선 과거를 입증할 만한 다양한 증거자료가 필요했다. 다행히 광화문은 비교적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공교롭게도 일본인들이 남긴 것들이 많았지만 일제강점기에 촬영됐던 유리건판 사진과 당시 실측한 도면 등을 참고할 수 있었다. 발굴과정에선 옛 광화문의 흔적이 땅 속에서 발견되면서 건축 위치에 대한 논란도 사라졌다.
석공, 목공 명장 2인이 공사 총괄
공사가 시작되자 두 명의 전통 장인이 광화문 복원을 맡았다. 광화문 하단의 높이 7m 석조건축물은 임동조 석공명장이 맡았다. 예전 광화문에 쓰였던 화강석 4800여 개가 사용됐다. 석재의 총 무게는 5000t, 부피는 2000㎥에 이른다. 부족한 돌은 경기도 포천에서 가장 비슷한 화강석을 가져왔다. 과거 광화문에 쓰인 돌은 인왕산 등지에서 캔 화강석이다. 아래쪽 선단석의 무게는 하나에 10t. 작은 것들도 보통 1t이 넘는다. 이러다보니 전통방식으로 석조 건축물을 지을 때는 특징이 있다. 석재끼리 맞닿아 파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좌우로 3mm 정도의 간격을 띄운다. 위아래로 쌓을 때는 충격 완화를 위한 철편을 끼운다. 모두 전통방식을 따른 것이다.
임 명장은 “기초 틀이 되는 석재는 전통방식인 판축다짐 방식으로 고정해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고 밝혔다. 판축다짐은 건축물을 올릴 곳의 바닥에 마사토, 강회(생석회), 잡석 등을 번갈아 다져넣어 지반을 튼튼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이 밖에 광화문 복원과정에서는 판축다짐을 하기 전에 약한 지반에 나무말뚝을 박아 넣는 ‘말뚝기초’ 기법도 활용됐다. 방화로 불타 없어진 숭례문을 복원하는 과정에도 말뚝기초 기법이 활용되고 있다. 김덕문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공학박사)은 “한국 전통 건축에서 지반을 강화하기 위해 나무말뚝을 사용하는 기법은 현대 건축기법으로도 쓰일 정도로 조상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부분”이라며 “지금도 기초공사 과정에서 H자 단면의 철근을 큰소리를 내며 두드려 박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광화문 바닥에는 철근콘크리트도 일부 사용했다. 문화재청이 주변의 지하철의 영향을 막고 과거 광화문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 70cm 두께의 철근콘크리트 기초 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한 전통 기초공사 방식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이렇게 기초공사를 끝낸 후 1년 4개월 만인 2009년 7월 문루를 떠받치는 기초시설인 육축(陸築)을 시공했다.
석조건축 위에 높이 13m의 목조 누각을 쌓아 올리는 일은 신응수 대목장이 지휘했다. 8t 트럭 96대 분량의 국산 금강소나무가 사용됐다. 가장 튼튼하고 오래가는 수종으로 알려져 있지만 나무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강원 삼척 등지에서 어렵게 구한 금강송을 이용해 기둥을 세우고 보를 얹어 작업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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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입주식을 진행한 후 11월에는 마루를 얹는 상량식을 진행했다. 올해 3월 상, 하층 목공사를 완료하고 6월 지붕을 올렸다. 단청 공사는 7월 종료됐다. 이 과정에서 과거와 달라진 부분이 있다. 신 대목장은 복원과정에서 처마선을 뚜렷하고 굵게 만들기 위해 옛 실측도와는 다르게 서까래의 지름을 과거 15cm에서6cm더 굵은 21cm로 변경했다. 목조 건물의 웅장함이 한층 더 해지고 한결 더 튼튼해졌다. 신 대목장은 “이번에 복원한 광화문은 1000년 이상 갈 것”이라고 장담했다.
문화재청은 이번 광화문과 주변 전각 복원으로 경복궁 내 건물을 총 125동 복원했다. 고종 당시 500여 동에 이르던 경복궁 내 건물 중 25% 가량이 복원됐다. 문화재청은 앞으로 20년간 진행할 2차 복원사업을 통해 고종 당시의 76% 수준까지 복원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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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려 낸 것은 세종대 지능형 미디어 연구실 백성욱 교수 연구팀이다. 사진을 확대하고 디지털 이미지 처리를 거쳐 원본 그림을 살려 내는 일이다. 백 교수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던 광화문 사진과 일본 도쿄대에 있는 2장의 옛 광화문 사진에서 글자의 형태를 얻어 냈다. 그리고 4명의 서예 전문가를 통해 글자의 세밀한 부분을 가다듬어 컴퓨터영상으로 만들었다. 사진이 흐릿해 보이지 않는 부분을 디지털로 전환해 되살려 내는 ‘디지털프로세싱’ 기술을 썼지만 작업이 불가능한 곳은 서예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그려 넣었다. 이렇게 영상을 뚜렷하게 바꾼 후 실물 현판 크기로 출력해 오 각자장에게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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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교수는 “5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인 한국문화재연구소를 방문해 유리원판 사진을 스캐닝했던 자료와 한국문화재연구소에서 도쿄대를 방문해 스캐닝을 해 온 사진자료를 합쳐 현판 글씨를 복원해 냈다”고 설명했다.
공사 대부분이 끝났지만 아직 숙제는 남아 있다. 경복궁과 연결되는 망루인 동십자각 주변의 궁장(성벽 등)을 설치하고 복원된 경복궁 지역의 하수도 시설을 정비하는 공사는 연말까지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복원된 광화문이 8월 15일 처음 공개되자 “공사를 서두르지 말고 늦더라도 완벽하게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마무리 목조공사를 총괄한 신응수 대목장은 “오히려 더 튼튼히 작업했고, 광복절에 맞춰 공개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했다.그는 “경복궁만큼 (일제에 의해)정책적으로 파괴된 문화재는 없었다”면서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이 되는 올해 반드시 공개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42년 만에 다시 태어난 광화문. 전통기술과 현대과학의 조화로 새롭게 태어난 광화문이 한민족의 역사를 꾸준히 지켜보길 기대한다. 1
위치는 원래 서 있던 자리에서 북쪽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떨어져 있었고 방향은 3.75° 틀어져 있었다. 나무가 아닌 철근콘크리트로 모양만 흉내 낸데다 그마저 여기저기 원형과 다른 점이 많았다. 우리가 어린 시절 보고 자랐던 광화문은 한 많은 문화재였다.
“제대로 만들어 보자”
이런 광화문을 새롭게 살려보자는 의견이 모아지면서 2006년부터 복원작업이 시작됐다. 먼저 틀어진 광화문의 위치를 바로 잡자는 데 의견이 모였다. 근정전, 근정문, 흥례문과 직선축을 이루는 원래위치에 복원하기로 했다. 새로 짓는 광화문은 건물 위치를 바꿔야 하니 ‘복원’이라지만 처음부터 다시 건물을 지어 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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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수고를 하면서까지 굳이 다시 자리를 옮긴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네 선조들의 독특한 풍수지리사상을 재현하기 위해서다. 공주대 문화재보존과학과 서정호 교수는 “한반도 지형에서는 차가운 북풍을 막아주고, 안정적으로 식수를 구할 수 있는 배산임수 사상이 기본”이라며 “이런 풍수지리 사상을 철저히 지켜 만든 왕궁의 배치는 국가의 안위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설명했다.당시 일제가 광화문의 자리를 옮기고, 경복궁 내에 총독부 건물을 짓고,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바꾼 것은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왕궁의 구조와 배치를 바꿔 민족의 정기를 끊으려 했던 것이다.
문화재청은 2006년 12월 4일 ‘광화문 제모습 찾기’ 선포식을 개최하고 철거를 시작해 이듬해인 2007년 5월까지 공사를 진행해 기존의 광화문을 모두 들어냈다.
완벽한 복원을 위해선 과거를 입증할 만한 다양한 증거자료가 필요했다. 다행히 광화문은 비교적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공교롭게도 일본인들이 남긴 것들이 많았지만 일제강점기에 촬영됐던 유리건판 사진과 당시 실측한 도면 등을 참고할 수 있었다. 발굴과정에선 옛 광화문의 흔적이 땅 속에서 발견되면서 건축 위치에 대한 논란도 사라졌다.
석공, 목공 명장 2인이 공사 총괄
공사가 시작되자 두 명의 전통 장인이 광화문 복원을 맡았다. 광화문 하단의 높이 7m 석조건축물은 임동조 석공명장이 맡았다. 예전 광화문에 쓰였던 화강석 4800여 개가 사용됐다. 석재의 총 무게는 5000t, 부피는 2000㎥에 이른다. 부족한 돌은 경기도 포천에서 가장 비슷한 화강석을 가져왔다. 과거 광화문에 쓰인 돌은 인왕산 등지에서 캔 화강석이다. 아래쪽 선단석의 무게는 하나에 10t. 작은 것들도 보통 1t이 넘는다. 이러다보니 전통방식으로 석조 건축물을 지을 때는 특징이 있다. 석재끼리 맞닿아 파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좌우로 3mm 정도의 간격을 띄운다. 위아래로 쌓을 때는 충격 완화를 위한 철편을 끼운다. 모두 전통방식을 따른 것이다.
임 명장은 “기초 틀이 되는 석재는 전통방식인 판축다짐 방식으로 고정해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고 밝혔다. 판축다짐은 건축물을 올릴 곳의 바닥에 마사토, 강회(생석회), 잡석 등을 번갈아 다져넣어 지반을 튼튼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이 밖에 광화문 복원과정에서는 판축다짐을 하기 전에 약한 지반에 나무말뚝을 박아 넣는 ‘말뚝기초’ 기법도 활용됐다. 방화로 불타 없어진 숭례문을 복원하는 과정에도 말뚝기초 기법이 활용되고 있다. 김덕문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공학박사)은 “한국 전통 건축에서 지반을 강화하기 위해 나무말뚝을 사용하는 기법은 현대 건축기법으로도 쓰일 정도로 조상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부분”이라며 “지금도 기초공사 과정에서 H자 단면의 철근을 큰소리를 내며 두드려 박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광화문 바닥에는 철근콘크리트도 일부 사용했다. 문화재청이 주변의 지하철의 영향을 막고 과거 광화문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 70cm 두께의 철근콘크리트 기초 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한 전통 기초공사 방식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이렇게 기초공사를 끝낸 후 1년 4개월 만인 2009년 7월 문루를 떠받치는 기초시설인 육축(陸築)을 시공했다.
석조건축 위에 높이 13m의 목조 누각을 쌓아 올리는 일은 신응수 대목장이 지휘했다. 8t 트럭 96대 분량의 국산 금강소나무가 사용됐다. 가장 튼튼하고 오래가는 수종으로 알려져 있지만 나무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강원 삼척 등지에서 어렵게 구한 금강송을 이용해 기둥을 세우고 보를 얹어 작업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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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입주식을 진행한 후 11월에는 마루를 얹는 상량식을 진행했다. 올해 3월 상, 하층 목공사를 완료하고 6월 지붕을 올렸다. 단청 공사는 7월 종료됐다. 이 과정에서 과거와 달라진 부분이 있다. 신 대목장은 복원과정에서 처마선을 뚜렷하고 굵게 만들기 위해 옛 실측도와는 다르게 서까래의 지름을 과거 15cm에서6cm더 굵은 21cm로 변경했다. 목조 건물의 웅장함이 한층 더 해지고 한결 더 튼튼해졌다. 신 대목장은 “이번에 복원한 광화문은 1000년 이상 갈 것”이라고 장담했다.
문화재청은 이번 광화문과 주변 전각 복원으로 경복궁 내 건물을 총 125동 복원했다. 고종 당시 500여 동에 이르던 경복궁 내 건물 중 25% 가량이 복원됐다. 문화재청은 앞으로 20년간 진행할 2차 복원사업을 통해 고종 당시의 76% 수준까지 복원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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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려 낸 것은 세종대 지능형 미디어 연구실 백성욱 교수 연구팀이다. 사진을 확대하고 디지털 이미지 처리를 거쳐 원본 그림을 살려 내는 일이다. 백 교수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던 광화문 사진과 일본 도쿄대에 있는 2장의 옛 광화문 사진에서 글자의 형태를 얻어 냈다. 그리고 4명의 서예 전문가를 통해 글자의 세밀한 부분을 가다듬어 컴퓨터영상으로 만들었다. 사진이 흐릿해 보이지 않는 부분을 디지털로 전환해 되살려 내는 ‘디지털프로세싱’ 기술을 썼지만 작업이 불가능한 곳은 서예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그려 넣었다. 이렇게 영상을 뚜렷하게 바꾼 후 실물 현판 크기로 출력해 오 각자장에게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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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교수는 “5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인 한국문화재연구소를 방문해 유리원판 사진을 스캐닝했던 자료와 한국문화재연구소에서 도쿄대를 방문해 스캐닝을 해 온 사진자료를 합쳐 현판 글씨를 복원해 냈다”고 설명했다.
공사 대부분이 끝났지만 아직 숙제는 남아 있다. 경복궁과 연결되는 망루인 동십자각 주변의 궁장(성벽 등)을 설치하고 복원된 경복궁 지역의 하수도 시설을 정비하는 공사는 연말까지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복원된 광화문이 8월 15일 처음 공개되자 “공사를 서두르지 말고 늦더라도 완벽하게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마무리 목조공사를 총괄한 신응수 대목장은 “오히려 더 튼튼히 작업했고, 광복절에 맞춰 공개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했다.그는 “경복궁만큼 (일제에 의해)정책적으로 파괴된 문화재는 없었다”면서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이 되는 올해 반드시 공개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42년 만에 다시 태어난 광화문. 전통기술과 현대과학의 조화로 새롭게 태어난 광화문이 한민족의 역사를 꾸준히 지켜보길 기대한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