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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색의 진화, 쪽빛부터 카멜레온까지

날씨가 추워지면 어두워지는 코트, 물속에 들어가면 색이 달라지는 수영복, 보는 방향에 따라 수천 가지의 색을 띠는 드레스. 아침마다 어떤 색의 옷을 입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온 걸까. 꽃이나 열매로 천을 물들이던 염색 기술이 과학과 만나 점점 화려하게 진화하고 있다.

밝은 옷을 입고 비가 오는 날 진흙탕에 미끄러지거나 실수로 옷 위에 포도주스를 엎질렀거나, 풀밭에 주저앉았다면 옷은 회색이나 보라색, 녹색으로 물들 것이다. 불쾌한 기분이 들겠지만, 인류의 조상들은 이 우연한 경험에서 색을 얻는 방법을 배웠다. 옷을 물들
이는 일에 재미를 느낀 인류는 동식물과 광물에서 다양한 색을 찾기 시작했다.

식물의 꽃, 동물의 피, 숯에서 얻은 색깔

고대의 염색 기술은 중국 왕릉에서 발견된 약 5500년 전의 붉은 견(비단) 조각, 기원전5000년 이집트 미라가 입은 남색 아마직물 등에서 볼 수 있다. 고대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나오는 황제와 귀족의 붉은 보라색 옷은 지중해 조개(Murex brandaris)에서 얻은 염료로 물들인 것이다(티리언 퍼플). 이 염료를 1.4g 얻으려면 조개를 1만 2000마리나 잡아야 했다.

우리 조상은 삼국시대부터 옷을 물들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분과 계급에 따라 띠의 색깔이 달랐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백제는 자색(7품)과 청색(10품), 황색(11품), 백색(13품 이상)으로 계급을 구분했다. 옷을 물들이는 일을 하는 관청(염궁)이 있을 만큼 염색에 관심이 높았던 신라는 이 4가지 색에 녹색과 적색(赤), 비색(緋), 흑색(黑), 벽색(碧) 등을 더 사용했다. 고려도 염색을 맡은 관서(도렴서)를 세웠는데, 당시 염료가 매우 귀한 탓에 양반을 제외한 일반 백성들은 색을 물들이지 않은 흰 옷을 입었다.

염료를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자연은 바로 식물이다. 꽃과 열매, 뿌리, 나무껍질, 잎
등에서 색소를 추출해 여러 색을 낼 수 있다. 조상들은 다양한 식물성 염료를 이용해 적색(잇꽃, 꼭두서니, 소방)과 황색(치자열매), 청색(쪽), 흑색(뽕나무, 오리나무, 아선약, 로그우드)을 물들였다. 양반이 선호했던 옥색은 쥐똥나무에서 얻었다. 초록색은 느티나무 꽃, 고동색은 감의 씨에서 즙을 냈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과거에는 동물성 염료도 많이 사용했다. 동물의 피나 분비물, 췌장이나 신장 등에서 색을 찾은 것이다. 19세기 프랑스에서는 멕시코 선인장에 기생하는 연지벌레 암컷을 가루로 빻아 군복바지를 붉게 물들였다(코치닐). 코치닐 1kg당 연지벌레 10만 마리가 필요했다. 생산량이 적은 데다 손이 많이 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고 한다.

철이나 크롬, 황토 같은 광물성 물질에서도 옷감을 염색하는 염료를 찾아냈다. 광물성 염료는 물에 젖어도 염료가 쉽게 빠지지 않고 색깔이 다양하다. 크롬 화합물은 노란색과 귤색, 녹색을 내며, 철 화합물은 갈색을 낸다. 이집트 미라를 감싸는 천을 남색으로 물들였던 철황은 가장 오래된 광물성 염료로 꼽힌다. 광물성 염료는 1856년 영국 화학자 윌리엄 퍼킨이 최초의 합성염료 모브를 개발한 뒤 점차 사라졌다.

합성염료는 섬유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면과 마 같은 식물성 섬유에는 직접염료를, 견과 모 같은 동물성 섬유에는 산성염료를 사용한다. 염기성염료는 면과 견, 아크릴, 레이온 등에 두루 사용한다. 합성염료는 광범위하게 사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가격이 매우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다.

세계적으로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해지고 제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기존의 섬유염색 산업도 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날염으로 전체공정을 컴퓨터로 처리해 염색공정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켰다. 소량으로 다품종을 생산하며 염색공정에 약품이나 용매, 열을 사용하지 않아 환경 친화적이기도 하다. 디지털 날염은 쉽게 설명하면 컴퓨터로 그린 그림을 천에 인쇄하는 것이다. 디자인과 색상을 모니터에서 확인하고 수정할 수 있어 생산 과정에서 오류가 적다. 이를 이용해 명화를 인쇄한 옷이나 가방, 넥타이 등이 이미 팔
리고 있다.

유전공학과 세포 융합기술을 섬유 염색에 활용하기도 한다. 베이지색과 갈색, 녹색처럼 자연적으로 색깔을 띠는 면섬유(천연착색면화)가 한 예다. 천연착색면화는 화학염료를 사용하지 않아 피부에 자극을 주지 않으며 환경에도 매우 좋다. 또 세탁을 하거나 자외선을 쬐어도 변색되지 않는다. 미국 몬산토는 청바지의 소재로 인디고 염색을 대체할 수 있는 파란 면섬유를 개발하고 있다.

‘기분’에 따라 색깔 변하는 ‘예민한’ 옷

최근에는 환경에 따라 색깔이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섬유(크로믹 섬유)가 주목받고 있다. 옷 색깔이 변하는 비밀은 외부환경에 민감한 유기색소재료에 있다. 주변 온도나 빛의 세기, 습도가 달라지면 색소의 화학구조가 바뀌어 다른 색을 나타낸다. 이런 특성을 가진 섬유를 각각 서모크로믹 섬유, 포토크로믹 섬유, 솔베토크로믹 섬유라 부른다. 소비자는 이제 장소에 따라, 시간에 따라, 날씨에 따라 색이 화려하게 변하는 옷을 입을 수 있게 된 셈이다.

서모크로믹 섬유는 기온이 낮으면 색상이 어두워진다. 그 결과 주변 열을 많이 흡수해 몸을 따뜻하게 유지한다. 반대로 기온이 높으면 색상이 밝아져 열의 흡수를 막아준다. 직물 표면에 색소와 발색제, 소색제가 든 마이크로캡슐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높은 온도에서는 소색제에 녹아 있는 색소가 발색제와 결합하지 못해 색소 본래의 색을 띤다. 하지만 온도가 낮아지면 소색제에서 분리된 색소가 발색제와 결합해 제2의 색을 나타낸다. 현재 11~19℃에서 색이 변하는 스키복과 13~22℃에서 색이 변하는 의상이 팔리고 있다.

포토크로믹 섬유는 자외선(햇빛)에 노출되면 색소의 분자의 형태가 달라지면서 색이 달라진다. 분자를 이루던 색소가 빛을 만나 이온으로 변해 다른 색깔을 내기도 한다. 포토크로믹 색소는 섬유 외에 안경이나 자동차 유리에도 사용된다. 실내에서는 투명하지만 밖으로 나가면 선글라스처럼 진한 색으로 변하는 안경이 이런 원리다.

습도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솔베토크로믹 섬유는 대기 중의 수분뿐 아니라 몸에서 나는 땀에도 반응한다. 이 섬유는 색을 내는 펄과 실리카를 혼합해 직물 표면에 바른 것이다. 건조한 상태에서는 실리카가 빛을 반사하지만, 습기가 차면 실리카가 투명해지면서 펄이 색을 낸다. 물 밖에 있다가 물속에 들어가면 색이 달라지는 수영복의 비밀은 바로 솔베토크로믹 섬유에 있다.

보는 방향에 따라 수천가지 색을 내는 아름다운 섬유(몰포텍스)도 있다. 과학자들은 멕시코에 사는 몰포나비의 날개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 나비는 파란색을 내는 색소는 전혀 없지만 영롱한 파란색 날개를 가지고 있으며 보는 방향에 따라 색깔이 달라진다. 날개를 구성하는 비늘 입자 때문이다. 나노 크기의 작은 비늘 입자 수백만, 수천만 개가 자외선을 포함해 파란색 구간의 빛을 거의 완벽하게 반사한다. 과학자들은 이 비늘 입자를 흉내 내 어떤 염색 원료로도 만들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을 창조했다.

‘익살맞은’ 과학자들은 이제 염색을 넘어 색을 띠지 않는 의상에도 주목하고 있다. 바로 투명 의상이다. 섬유입자에 스크린 역할을 하는 미세유리를 가공해 붙인 뒤 특수 카메라로 촬영하면 빛이 굴절하면서 물체의 뒷모습을 비춘다. 전문가들은 ‘투명 수술 장갑’을 개발하면 메스를 쥔 의사의 손에 수술 부위가 가리는 불편이 사라지고, ‘투명 바닥’을 만들면 비행기 조종사가 앉은 상태에서 발밑으로 활주로를 보면서 조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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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최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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