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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들어온 고추 vs 태조 이성계가 즐긴 고추장

임금이 맵고 자극적인 요리를 피했을 것이라는 추측 외에도 조선시대 임금들이 고추장 떡볶이의 맛을 몰랐을 가능성을 충분히 제기할 수 있다. 고추가 한국에 들어온 시기가 임진왜란(1592년) 이후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한국식품문화연구의 최고봉이었던 이성우 전 한양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1978년, 고추가 일본에서 담배와 함께 전파됐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곧 통설로 굳어졌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고추는 원래 남아메리카 페루가 원산지인데,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고추를 비롯해 담배, 감자, 고구마, 토마토 등을 유럽에 가져왔고 해적들에 의해 인도까지 전파된 뒤, 무역이 활발했던 일본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이 근거로 이 교수는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백과사전인 이수광의 ‘지봉유설’(1613)의 한 대목을 “일본에서 건너온 왜(倭)개자에는 독이 있다”고 해석하며 왜개자가 고추라고 설명했다. 고추의 매운맛에 약한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독살시키기 위해 고추를 가져왔다는 뜻이다. 이 교수는 독살용으로 가져온 고추가 오히려 조선인들의 입맛에 맞아 음식으로 발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까지 하얗게 만들던 김치에 고춧가루를 넣어 빨간 김치를 만들게 됐다고 예를 들었다.

하지만 당시 서울대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하던 한국식품연구원 미래전략기술연구본부 권대영 박사는 그의 주장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전북 순창이 고향이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고추장에 얽힌 민담을 많이 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태조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부터 고추장을 좋아했다는 이야기였다. 태조는 스승인 무학대사와 순창에 있는 산안절(현 만일사)에 들렀다가 그 지방 고추장 맛에 감탄했고, 조선을 건국한 뒤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해 순창고추장을 수라상에 올리라고 명했다. 그 뒤 순창이 맛 좋은 고추장으로 유명해졌다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순창에서는 고추장의 역사를 늦어도 조선 건국(1392년) 전으로 보고 있다. 권 박사는 고추에 대한 구전설화가 과학적으로 100% 입증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없다고 생각했다.


한국 고추, 페루 고추보다 헝가리 고추와 비슷

그때부터 그는 자기 주요 분야인 효소와 단백질에 대한 연구를 하는 틈틈이 고추가 어디에서 전래됐는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그가 주목했던 점은 여러 종류의 음식이나 소스를 섞어 요리를 개발하는 지금과 달리 예전에는 우연히 발견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요리를 알게 됐다는 점이다. 고추장 역시 고추를 처음 본 사람이 멥쌀을 넣고 발효시키는 요리법을 떠올려 개발한 것이 아니라, 고추를 오랫동안 저장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수없이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우연히 발견된 음식이다.

식품학계에서는 한 재료에서 발효 음식이 우연히 발견되기까지는 200년 이상 걸린다고 본다. 고추가 전국적으로 퍼지는 데 짧아도 100년, 김치나 고추장 같은 저장법을 발견하는 데 약 200년…. 결국 고추가 임진왜란 때 들어왔다면 김치나 고추장은 1900년대에 들어서야 생긴 셈이고, 전국적으로 퍼지고 수십 가지 종류가 생기려면 그때부터 다시 100년 이상 걸린다. 하지만 현재 전국적으로 김치 종류만 100가지가 넘으니 말이 안 된다. 권 박사는 “고추장이 발견된 지 적어도 1000년이 됐고, 고추는 이보다도 훨씬 전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하며 많은 고문헌 자료를 근거로 제시했다.

만약 일본에서 고추가 전파되던 시기부터 고추장이나 김치가 존재했다면 고추와 함께 그 요리법이 전해졌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고추장과 김치는 한국 고유의 음식일 뿐만 아니라, 일본에는 고추를 재료로 한 요리가 거의 없다. 결국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조선으로 고추가 전래됐다고 하기엔, 고추장과 김치가 이만큼 발달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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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영 박사는 이성우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고 한국 고추의 올바른 역사를 찾기 위해 여러 근거들을 찾았다. 이 박사가 주요 근거로들었던 ‘지봉유설’을 살펴보면 가루로 빻은 왜개자를 술에 타 마시다가 사망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권 박사는 “지봉유설을 쓰기 전부터 고춧가루를 술에 타 마시던 방식이 있었다는 얘기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가져온 ‘독극물’을 어떻게 매일 밥상에 올리는 반찬인 김치에 넣었을까”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페루의 고추(아히, Aji)가 유럽을 거쳐, 일본을 지나 한국에 들어왔다는 설은 과학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만약 이 설이 맞는다면 아히는 한국 고추와 유전적으로 같은 품종이어야 한다. 그런데 아히는 둥글면서 쭈글쭈글하며 한국의 청양고추보다도 맵다. 다른 아메리카 품종인 타바스코 고추는 생김새가 한국 고추와 얼핏 닮았지만 역시 청양고추보다 3~4배나 맵다. 이들은 결정적으로 학명이 다르다. 아히는 캅시쿰 바카툼(Capsicum baccatum )이며 한국 고추는 캅시쿰 아눔(Capsicum annuum)이다.

재미있게도 권 박사는 1994년에 헝가리 여행을 갔다가 한국 고추와 매우 흡사한 고추(헝가리언 왁스)를 발견했다. 유럽 다른 국가에서는 피망이나 파프리카, 할라피뇨(멕시코 고추)를 샐러드나 요리의 양념으로 먹는 반면, 헝가리에서는 헝가리언 왁스를 말려 빻은 고춧가루를 곳곳에서 판매하며 끼니때마다 재료로 사용한다. 특히 헝가리 전통 수프인 굴라쉬는 ‘고사리가 빠진’ 육개장처럼 한국 음식과 비슷하다. 권 박사는 “고추가 일본에서 전래됐다는 설보다는 북방에서 전래됐다는 설에 무게를 둬야 한다”고 말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고추 종자 가져갔다”

권대영 박사는 일본에서 고추에 대한 자료를 찾기 위해 1990년 교토를 방문했다. 대학 시절 일본어를 배운 덕에 많은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국내 전문가의 주장과 달리 일본의 문헌에는 고추를 조선에서 가져왔다는 문헌이 존재했다. 1593년에 지어진 일본 나라지방의 일기 ‘다문원일기’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공격할 때 고추 종자를 가져왔다는 내용이 있다. 국내 학자들은 지금껏 고추가 일본에서 왔다고 잘못 알고 있었는데, 오히려 일본에서는 조선에서 고추를 들여왔다는 사실이 제대로 알려져 있던 셈이다.

권 박사는 귀국하자마자 옛 문헌에서 고추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기록은 상당수가 한글(훈민정음) 대신 한문으로 적힌 탓에 생화학자인 그가 문헌을 해석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또 옛 문헌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채 보관된 것도 문제였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 1998년 옛 문헌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이 이뤄지면서 아주 오래된 자료도 쉽게 검색할 수 있게 됐다. 권 박사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경란 연구원의 도움으로 고추에 대한 문헌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삼국사기’에서 당시에도 고추를 재배하고 생산했다는 기록을 찾았다. 1788년에 쓰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한국에서 순창과 천안이 고추장으로 유명한 지역이며, 한국 고추는 품질이 좋아 수출하면 이익이 남는다고 적혀 있다. 1680년 어의였던 이시필이 지은 요리책 ‘소문사설’에는 순창고추장을 만드는 방법이 있다. 일반 평민과 달리 임금은 대하와 전복, 홍합을 넣어 맛과 향이 뛰어나고 건강에도 좋은 고추장을 먹었다고 한다.

고추를 이용한 요리가 기록된 문헌도 있다. 세조 6년인 1460년에 적힌 ‘식료찬요’에는 조선시대 임금과 양반이 귀하게 생각했던 보신 요리로 닭볶음탕을 만드는 방법이 나온다. 비장과 위의 기가 약할 때 누런 수탉에 고추장을 주재료로 넣어 잘 삶으라는 내용이다.


결국 조선시대 임금이 고추로 만든 요리는 맵고 자극적이기 때문에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전혀 근거가 없다. 권 박사는 ‘지봉유설’에 나온 고추가 외래품종인 남만초이며, 원래 풍습대로 술에 타 먹었다가 한국 고추보다 너무 매운 탓에 죽은 사람이 나왔다고 결론지었다.

곳곳에 수많은 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추에 대해 잘못된 역사가 널리 알려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 사람이 잘못된 정보를 갖고 주장한 내용을 사람들이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확대해 퍼트린 결과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추 유래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고유 음식인 김치나 장을 발효시키는 미생물에 대한 연구도 국내보다 일본에 더 많다. 권 박사는 “우리 고유의 식품을 세계화하려면 얼마나 맛있고 건강에 좋은가를 알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음식에 얽힌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도 탄탄히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음식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고추에 대한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는 “고추의 종은 세계적으로 100가지가 넘으며 원산지도 각각 다르기 때문에 학명을 비교하는 일만으로는 어디에서 어떻게 전래가 됐는지 알기가 어렵다”며 “고추 품종마다 유전정보(DNA)를 분석하고 서로 비교해 다른 품종 간의 유전적 연관을 찾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한국 고추가 어떻게 전래됐는지 정확한 경로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2010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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