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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다니는 과학 실험실 아라온 호, 남극 간다

11월 5일 오전 10시, 인천내항 제1부두 출입관리소를 지나자마자 아라온 호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배 전면을 둘러싼 붉은색과 그 위로 솟은 선루의 흰색이 어울려 강렬한 인상을 줬다. 인도명명식을 하루 앞둔 시점이었기에 아라온 호에서는 막바지 정비 작업으로 승무원을 비롯한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지구온난화로 해빙이 크게 줄어들면서 전 세계 각국이 앞다퉈 남극과 북극에 진출하고 있다. 남·북극 심해에는 원유와 가스하이드레이트가 다량 매장돼 있을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올해 말 100종류가 넘는 해양연구 과학장비를 갖춘 아라온 호로 남극에 진출한다.

극지연구소 극지운영실 남상헌 실장은 “아라온 호는 12월 19일 남극으로 출항해 84일 동안 쇄빙능력 시험과 과학실험을 한 뒤 내년 3월 12일 인천항으로 돌아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또한 아라온 호는 남극 세종기지에 필요한 물품을 보급한 뒤 내년 5월까지는 제2의 남극기지를 건설할 후보지역으로 꼽히는 케이프 벅스와 테라 노바 베이를 답사할 계획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쇄빙연구선

쇄빙선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 때문이었을까. 왠지 거대한 규모의 배를 떠올렸지만 예상과 달리 아라온 호는 그리 크게 느껴지진 않았다. 아라온 호는 폭 19m에 길이는 111m에 이르며 총 중량은 7487t에 달한다. 2007년 건조된 러시아의 쇄빙선 ‘승전 50주년 기념호’가 폭 30m, 길이 159m에 총 중량 2만 5000t인 것과 비교할 때 아라온 호의 규모는 그다지 큰 편은 아니다. 하지만 아라온 호는 첨단 연구장비를 가장 많이 탑재한 쇄빙연구선으로 연구 수행 능력만큼은 세계 최고로 평가받는다.

아라온(ARAON)은 바다를 뜻하는 순우리말 ‘아라’에 전부를 나타내는 ‘온’을 합쳐 만든 이름이다. 얼어붙은 남·북극을 포함한 전 세계 바다를 자유롭게 누비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아라온 호는 해양생태계나 해저지질을 조사하고 극지의 환경변화를 관측하는 ‘바다 위의 종합연구실’이다. 연구원 60명과 승무원 25명을 태우고 70일 동안 연속으로 항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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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년 동안 우리나라는 남극기지에 물자를 보급하거나 극지를 연구하기 위해 외국의 쇄빙연구선을 빌려야 했기 때문에 제약이 많았다. 남상헌 실장은 “외국 쇄빙연구선을 빌리는 데 하루에 8000만 원씩 지불했다”며 “게다가 그들이 사용하지 않는 시간에 빌려야 했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시기에 필요한 장소를 가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이처럼 쇄빙연구선은 극지방 연구에 반드시 필요하다. 남극에 기지를 둔 20개 국가 중에서 이전까지 쇄빙선을 보유하지 않은 국가는 우리나라와 폴란드뿐이었다.

우리나라도 이제부터는 아라온 호로 남·북극해역에서 독자적으로 연구와 조사활동을 할 수 있다. 연구 대상지역도 남극대륙 전체와 결빙해역, 북극해 전역까지 넓어진다. 기존에는 쇄빙선이 없어 남극 세종기지와 주변해역으로 연구지역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국제적으로 위상도 크게 높아져 남·북극해 종합관측 국제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수 있을 전망이다.

남 실장은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남극이나 북극의 빙하 위에서 진행되는 관측프로그램에 일부분밖에 참가하지 못했다”며 “이제는 우리가 국제 공동연구를 기획하고 연구도 주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년 7월 아라온 호는 북극으로 진출해 북극항로를 개척하기 위한 기초조사에 나설 계획이다.


얼음에 올라타거나 제자리에서 360˚ 돌거나

아라온 호는 외관상 주변에 정박해 있는 일반 선박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꽁꽁 언 얼음바다 위를 아라온 호는 어떻게 항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남상헌 실장은 “쇄빙선은 충돌로 얼음을 부순 뒤 길을 만들어 나아간다”며 “그래서 쇄빙선은 일반 배보다 강력한 엔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라온 호의 추진력은 일반 선박보다 4~5배 강하다. 말 6800마리가 끄는 힘과 맞먹는다. 남 실장은 “아라온 호는 일반 선박과 달리 발전기를 이용한 전기모터로 추진력을 얻는다”고 설명했다.

바다에서 연구하기 위해서는 소음과 진동이 적고 변속이 부드러운 전기모터가 적합하기 때문이다. 충돌 때 생기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뱃머리는 해군의 대형 상륙함인 독도함보다 2배나 두꺼운 39.5mm의 강판으로 만들었다. 영하 40℃의 극한 환경에서도 끄떡없도록 강판 아래에는 열선도 깔았다.

충돌로 부수기 어려운 큰 얼음이라면 얼음을 선체로 눌러서 깨트린다. 배의 무게중심을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기술 덕분이다. 아라온 호 밑바닥에는 117t의 물탱크가 설치돼 있다. 물탱크의 물을 순간적으로 배 뒤로 쏠리게 하면 무게중심이 뒤로 이동해 뱃머리를 들 수 있다.

이때 엔진의 추력으로 전진하면 배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배 앞부분이 얼음 위로 올라간다. 결국 7487t에 이르는 아라온 호의 무게로 얼음을 짓눌러 부수는 것. 남 실장은 “아라온 호는 최고 속도가 16노트(시속 약 30km)에 이르며 두께가 1m인 얼음을 부수면서 3노트(시속 약 5.5km)로 항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얼음 사이에서 꼼짝달싹할 수 없이 갇히는 위기상황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도 했다. 배의 선체를 들어 얼음을 깨려다가 얼음 위에 선체가 완전히 올라갈 경우 얼음에 갇힐 우려가 있다. 그래서 아라온 호는 배 앞부분을 날카로운 칼날처럼 만들었다. 실제 이름도 ‘아이스 나이프’다. 길이 10m의 아이스 나이프는 뱃머리가 얼음 위로 올라갈 때 얼음을 쉽게 부수도록 돕는다. 배의 앞뒤에 있는 추진장치를 이용하면 제자리에서 360˚로 회전해 온 길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또한 아라온 호는 얼음에 갇힐 경우 얼음을 털어 버릴 수 있도록 설계됐다. 영하 40℃의 극한 환경에서는 해수도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만약 선박이 항해하다가 정지할 경우 주변이 결빙되면서 갇혀 버릴 수 있다. 이때는 물탱크의 물을 좌우로 순환시켜 배를 좌우로 흔들어 얼음을 부순다.

남 실장은 “아라온 호는 3분 정도면 선체를 좌우로 3.5˚씩 기울여 얼음을 털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배 바닥의 좌우 측면에는 강한 압력으로 공기를 내뿜는 장치도 있다. 이 장치는 부서진 얼음 조각이 선체에 달라붙거나 부딪혀 전진을 방해하는 일을 막는다.

가스하이드레이트 찾고 해저 6000m 샘플 채취

메인데크라고 불리는 1층에는 수심별로 채취한 해수에서 어류의 종류와 수질을 분석하는 채수실, 물고기와 플랑크톤을 기르는 수조실, 생물 실험실, 냉장·냉동실험실 등 10여 개의 실험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아라온 호의 정중앙에는 중력을 측정하는 중력계실도 있다. 고위도로 올라가면서 작아지는 중력을 측정하기 위한 곳으로 오차를 줄이기 위해 배의 흔들림이 가장 적은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아라온 호는 극지의 해양생물과 지질, 기후변화를 연구할 수 있도록 100여 종의 첨단 장비를 갖췄다. 다중채널 탄성파 장비는 에어건에 충전시킨 압축공기를 발사해 충격파(진동수가 작은 저주파)를 일으키는 장치다. 해저면에 부딪혀 돌아오는 탄성파를 수신하면 바다 밑을 파지 않더라도 해저면의 단층구조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해수를 통과한 저주파는 해저면의 지층을 만나 일부는 반사되고 일부는 투과한다. 투과한 저주파가 암반을 만나면 다시 일부가 반사된다. 이처럼 특정 깊이에서 반사되는 저주파를 분석하면 지층의 구조를 알 수 있다.



고주파를 이용해 해저면을 스캐너처럼 훑는 다중빔 해저지형탐사기도 눈에 들어왔다. 남상헌 실장은 “20억 원이 넘는 고가의 장비”라고 귀띔했다. 고주파는 저주파와 달리 해저면을 만나면 투과하지 못하고 대부분 반사된다. 진동수가 작은 저주파는 투과력이 높아 깊이 들어갈 수 있지만 진동수가 큰 고주파는 투과력이 낮기 때문이다. 남 실장은 “다중빔 해저지형탐사기로 얻은 영상을 분석하면 석유를 비롯한 광물자원이 많이 묻혀 있는 대륙붕이나 대륙사면을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해저면의 단단한 정도를 알 수 있는 천부지층탄성파 장비도 실렸다. 이 장비는 해저면에 부딪혀 돌아오는 반사파를 탐지해 해저 지각이 단단한지 물렁한지 알 수 있다. 특히 해저 지각 밑에 원유나 가스하이드레이트가 매장돼 있을 경우 다른 지각보다 무르다. 또 반사파를 이용해 어류자원의 양과 분포를 탐지하는 과학 어군탐지기와 어군탐지 소나 같은 장비도 있다. 이 장비를 활용하면 크릴과 어족자원의 분포를 실시간으로 알 수 있다.

아라온 호는 심해저에서 샘플을 채취하기 위해 다양한 장비도 갖췄다. ‘염분 수온 수심 측정기(CTD)’는 바다의 각 지점별로 해수의 온도와 전기전도도, 염분, 수심을 한꺼번에 측정할 수 있는 다목적 관측장비다. CTD로 플랑크톤이 얼마나 사는지 분석할 수도 있다. 심해저의 해양샘플을 채취하기 위한 TV 그랩(GRAB)이란 장치도 실렸다. 이 장치는 고해상도 카메라가 설치돼 있어 해저 6000m까지 내려가며 특정위치의 샘플을 채취할 수 있다.

자동항법장치로 알아서 찾아간다

아라온 호 1층 안쪽 끝까지 들어가자 식당과 주방이 있었다. 항해 내내 전직 호텔요리사들이 함께하며 승무원과 연구원의 식단을 책임진다. 주방은 배의 안전을 고려해 가스 대신 전기를 사용하는 핫플레이트 같은 조리기구를 갖췄고 해양 오염을 막기 위한 처리시설도 있었다.

아라온 호 조리사 김남훈 씨는 “남극은 청정해역이기 때문에 음식물 찌꺼기나 설거지에서 나온 물을 그냥 버릴 수 없다”며 “건조기에서 물을 뽑아내고 압축해 10분의 1 크기로 줄인 뒤 처리한다”고 말했다. 2층부터 4층까지는 연구원과 선원의 침실(1~4인실), 회의실, 세미나실, 휴게실로 꾸며져 있다. 6층에는 아라온 호의 컨트롤 타워에 해당하는 조타실이 위치하고 있다. 조타실에 들어서자 마치 방송실처럼 전기 장비가 가득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라온 호의 조타실에는 배의 상징인 원형의 조타장치가 없었다. 일반적인 선박은 원형의 조타장치를 돌려 배의 운행 방향을 조종한다. 조타장치에 따라 배 뒷부분의 방향타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아라온 호 김현율 선장은 “배 앞뒤에 달려 있는 지름 약 4m의 추진기 4대가 각각 독립적으로 움직여 선박의 방향을 360˚ 자유자재로 틀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자동위치조정유지시스템도 아라온 호의 자랑거리다. 배 위치를 알려주는 화면을 보며 가고자 하는 지점을 컴퓨터로 입력하면 배가 알아서 찾아가는 자동항법장치다. 자동위치조정유지시스템을 갖춘 쇄빙선은 세계에서 아라온 호가 유일하다. 비상시 승무원들이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도록 헬기도 2대 탑재한다.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아라온 호는 우리나라 선박과 조선 분야 선도 기업들이 대거 참여해 완성했다. 선박기본성능을 검토하기 위한 기본·개념설계는 삼성중공업이, 이를 토대로 한 실시설계는 STX조선이, 선박 건조는 한진중공업이 각각 맡았다. 그래서 남극으로 떠나는 아라온 호의 어깨는 가볍지만은 않다. 우리 선박 기술을 전 세계에게 선보이는 무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09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이준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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