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하는데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면 서운하기 마련이다. 실리콘반도체가 사람처럼 마음이 있다면 요즘 이런 심정일 것이다. 오늘날 컴퓨터를 비롯한 각종 전자기기의 중추이면서도 늘 ‘언젠가는 대체돼야 할’ 대상으로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실리콘반도체, 즉 무기반도체는 집적도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좀 더 고밀도의 전자소자를 만들려면 새로운 소재를 찾아야 합니다. 저희가 연구하는 자기조립 단분자막 소자도 그런 대안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유기반도체로 가려면 극복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닙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야죠.”
지난 3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성균관대로 자리를 옮긴 이 교수는 분자로 비휘발성메모리 소자를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다. 메모리 소자는 전원이 꺼졌을 때 정보 저장 여부에 따라 휘발성과 비휘발성으로 나뉜다. D램(RAM)이 대표적인 휘발성메모리이고 하드디스크나 USB메모리가 비휘발성메모리다.
전자를 포용하는 분자 설계
비휘발성메모리의 핵심은 전원이 꺼졌을 때도 메모리에 입력된 전자 상태가 변하지 않아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분자를 갖고 메모리를 만들 경우 분자는 외부 신호, 즉 전압이 변해서 전자를 하나 받으면 그 다음 신호가 올 때까지 전자를 잡고 있어야 한다. 이 단장은 피리딘이라는 고리형 구조를 3개 갖는 터피리딘 분자 2개에 루테늄(Ru)이란 금속의 이온을 결합해 고리 모양을 이루는 분자를 만들었다.
보통 분자는 전자가 들어와 이온 균형이 깨지면 불안정해져서 들어온 전자가 곧 다시 나가지만 피리딘 6개로 된 고리분자는 안에 전자가 하나쯤 들어가도 충분히 포용할 수 있는 구조다.
이 교수팀의 실험실에는 여느 화학합성 실험실과 비슷하게 유기용매 냄새가 배어 있고 실험대 위 유리용기 안에는 각종 액체가 담겨 있다. 실험실에서 분자 소자를 설계하고 직접 합성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메모리로 쓰일 잠재력이 있는 분자를 만들어도 이를 메모리 소자로 제작해 실현 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건 또 다른 얘기다.
“사실 이 부분이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고분자로 된 메모리 후보는 여럿 만들었지만 소자로 만들 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죠.”
고분자는 워낙 덩치가 크다 보니 원하는 회로에만 딱 걸쳐 있지 않고 여기저기 뻗쳐 있어 신호에 오류가 잦다. 이 교수팀이 화학결합으로 연결된 사슬 같은 고분자 대신 지름이 1nm(나노미터, 1nm=10-9m)도 안 되는 루테늄-터피리딘 고리분자를 만든 이유다. 문제는 이 분자를 회로에 얹는 일이다.
“고민을 하다가 고리 양쪽에 짤막한 사슬분자를 붙이는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사슬 끝에는 작은 벨크로(찍찍이)가 달려 있다고 보면 됩니다.”
이렇게 만든 분자를 녹인 용액에 금으로 된 전극을 넣으면 사슬의 끝이 금 표면에 찰싹 달라붙는다. 결국 금 표면에 고리분자가 촘촘히 박혀 마치 모내기 철 논에서 볼 수 있는 모판과 같은 형상이 된다. 분자들이 스스로 모여(자기조립) 분자 하나 두께로 금 표면을 덮고 있으므로 이를‘단분자막’이라고 부른다.
메모리 소자를 만들려면 단분자막의 반대 면에 또 다른 전극을 붙여야 한다. 전극 사이에 전압을 걸어줘야 전기신호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분자는 고리 양쪽에 사슬을 붙여도 길이가 3nm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단분자막은 매우 연약하다. 따라서 금을 가열해 증기로 만들어 단분자막 위에 살짝 증착시키는 방법으로 전극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증착 과정에서 미세한 금 입자가 막의 틈 사이로 끼어들어가 박힌다는 것. 이렇게 되면 양쪽 전극에 전압을 걸어줄 때 전류 흐름을 교란한다. 연구팀은 PEDOT:PSS라는 전도성고분자를 먼저 단분자막 위에 덮어준 뒤 그 위에 금을 증착시키는 방법을 고안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전극 사이의 전압을 올리자 어느 순간 분자 고리에 전자가 포획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이렇게 잡힌 전자는 전원을 끊어도 약 300초 동안 분자 고리 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즉 그동안은 비휘발성메모리였던 셈이죠.”
‘잊을 수 없는 단분자막’물론 현재 쓰이고 있는 실리콘 비휘발성메모리는 적어도 10년은 이런 상태가 유지되므로 거기에 비하면 300초는 ‘순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휘발성메모리의 잔류시간이 100만분의 1초 수준인 데 비하면 단분자막에서 ‘비휘발성’의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했다고 할 만하다. 이 연구결과는 권위 있는 화학저널인 ‘앙게반테 케미’ 10월 26일자에 실렸다.
저널은 이 교수팀의 논문을 소개하면서 ‘잊을 수 없는 단분자막(an unforgettable monolayer)’라는 문학적인 표현을 곁들이기도 했다. 그만큼 분자로 비휘발성메모리 소자를 구현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한 셈이다.
“앞으로 분자구조를 개선해 전자를 좀 더 안정적으로 포획할 수 있게 된다면 단분자막으로만든 메모리가 현재의 비휘발성메모리에 필적하는 성능을 구현하리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연구팀은 루테늄-터피리딘 고리 분자의 양쪽에 붙인 사슬의 길이를 길게 할수록 메모리를 유지하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현상에 깔린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비휘발성이 향상된 분자메모리 소자를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분자메모리의 가장 큰 장점은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작은 부피 안에 담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아래쪽엔 가로 방향으로 전극을 놓고 위쪽은 세로 방향으로 전극을 배열하면 바둑판처럼 교차점이 생기는데, 그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메모리 공간이 될 수 있다.
만일 전극이 10nm 간격이라면 1cm2에 무려 1조 개의 교차점이 존재한다. 물론 두 전극 사이를 연결하는 건 단분자막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분자가 일상 환경에서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실리콘산화물이야 일종의 돌가루이므로 안정한 물질이지만 분자는 열이나 습도, 공기 중의 산소 등에 취약할 수 있다.
“지금 단분자막 소자는 300℃에서도 성능에 문제가 없는 걸로 나타났습니다. 습도나 산소에 대한 안정성 확보도 시간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교수는 지금까지 연구단의 연구결과가 분자메모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데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 과학의 발전은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성능개선이나 실용화 연구는 경제성이 있다면 언젠가는 따라오기 마련이다.
“현재 메모리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앞으로도 선두를 지키려면 다양한 차세대 비휘발성메모리 소자를 개발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저희 기능성 분자메모리 연구단도 한몫을 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