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맞는 휴일. 차 한 잔을 들고 편안한 옷차림으로 거실에 우아하게 앉아 클래식 음악을 듣는데 신경에 거슬리는 잡음이 섞여 나온다면? 에이, 짜증 난다. 오디오에서 잡음이 생기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기계 자체에 결함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전선도 잡음을 만드는 원인 중 하나다. 전선은 전자가 정보를 싣고 지나다니는 길이다.
오디오에서 전자는 CD나 테이프에서 나온 소리정보를 싣고 전선을 통해 스피커까지 전달한다. 보통 전선은 구리나 은 같은 금속으로 만든다. 일반적인 구리나 은은 내부를 구성하는 원자가 불규칙하게 배열돼 사이사이에 빈 공간(원자틈)이 생긴다. 전선 속에서 이동하던 전자가 원자틈을 만나면 매끄럽게 지나가지 못한다. 바로 이때 소리가 변형돼 잡음이 생긴다.
필자가 이끄는 기업 ‘엠씨랩’은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일반적인 금속 말고 ‘단결정(單結晶, single crystal)’을 사용한 덕분이다.
맑은 소리 비결은 원자배열의 규칙성
내부의 구성 원자가 규칙적으로 배열된 순수한 고체를 단결정이라고 부른다. 다이아몬드나 루비, 사파이어 같은 보석, 투명한 소금이 대표적인 단결정이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를 이루고 있는 원자는 탄소(C)다. 수많은 탄소가 규칙적으로 배열되면 다이아몬드가 되지만 불규칙하게 아무렇게나 붙어 있으면 ‘다결정(多結晶, polycrystal)’인 흑연이 된다. 같은 원자로 이뤄져 있지만 배열에 따라 전혀 다른 물질이 되는 것이다.
엠씨랩에서는 처음으로 단결정 은을 이용해 오디오용 전선 ‘솔리톤’을 만들었다. 단결정 은 내부는 은 원자들이 규칙적으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 틈이 거의 없다. 덕분에 솔리톤은 일반적인 오디오용 전선보다 훨씬 맑고 깨끗한 소리가 나며 잡음이 생기지 않는다.
솔리톤은 상당히 비싸다. 현재 가장 비싼 모델은 2.3m에 950만 원까지 한다. 일반적인 전선이 1m당 1000원 선인데 비해 솔리톤은 15만 원가량이다. 앞으로 대량생산 체계를 갖추면 1m 당 5000원까지 값을 낮출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비싸지만 솔리톤의 인기는 꾸준하다.
특히 국내 오디오 마니아나 음악 애호가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더 잘 팔리고 있다. 최근에는 네덜란드와 일본의 오디오 회사에 수출까지 시작했다. 기초과학기술로 개발한 성과물이 일반인의 취미생활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만큼 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무척 보람을 느낀다.
엠씨랩은 솔리톤을 만들기 위해 부산대 단결정은행에서 단결정 은 제조기술을 전수받았다. 단결정은행은 1997년부터 교육과학기술부 국가지정연구소재은행으로 운영돼왔다. 은을 비롯한 약 120종의 단결정을 보관하면서 연구자나 기업에 싼 값에 공급해주고 있다.
10원짜리 동전만 한 구리 단결정이 단결정은행에선 10만 원 정도다. 국내 연구자나 기업이 이를 일본에서 수입하려면 약 250만 원을 줘야 한다. 단결정은행이 국내에 공급하는 단결정은 매년 약 4000개에 달한다. 그만큼의 수입대체 효과도 내고 있는 것이다.
지름 1cm 키우는 데 1달 걸려
단결정은 소리뿐 아니라 전기나 열도 다른 금속이나 광물보다 더 잘 전달한다. 일반적인 전선은 전류를 많이 흘리면 열이 나면서 뜨거워지거나 아예 터져 버리기도 한다. 원자틈을 지나는 동안 전자들이 부딪히면서 저항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자틈이 거의 없는 단결정은 단위면적당 저항이 훨씬 적다. 더 많은 전자가 빠른 속도로 지나갈 수 있기 때문에 전류도 더 많이 흐른다. 열전도도도 좋아 내부에 열이 쌓이지 않고 잘 방출된다. 전류 흐름이 정확하기 때문에 오작동도 현저히 줄어든다. 자동차 내부의 모든 전기 시스템 소재를 단결정으로 바꾸면 에너지를 10% 이상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시스템 전체의 무게도 줄고 전기 소모량도 감소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장점 덕분에 단결정 소재는 이미 국내외 산업계에서 활발히 쓰이고 있다. 가까운 예로 매일 들여다보는 시계도 단결정으로 만든다. 시계에는 수정(석영)이라는 광물이 들어 있는데, 수정은 전기를 가하면 규칙적으로 진동하는 특성이 있다. 예전에는 태엽을 감아 시간을 맞췄지만 요즘 시계는 수정의 진동횟수로 정확한 시간을 알려준다. 단결정 수정을 사용하면 진동이 더 규칙적이기 때문에 시간 오차도 훨씬 준다.
반도체를 만드는 소재인 실리콘도 단결정이다. 실리콘 내부에 틈이 조금만 있어도 반도체는 오류가 생긴다. 결함이 전혀 없는 단결정 실리콘을 만드는 게 반도체 성능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휴대전화에 들어 있는 단결정은 리튬나이오베이트나 리튬탄탈레이트다. 주파수의 특성을 선별하는 부품(SAW)이 이런 단결정으로 이뤄져 있다. 휴대전화로 혼선 없이 통화할 수 있는 것도 결국 단결정 덕분인 셈이다. 이 밖에 작은 가전제품부터 대형 최첨단 장비까지 단결정은 현대문명이 낳은 대부분의 전자기기에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업계에서 쓰이는 단결정은 거의 실험실에서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금속이나 광물은 대부분 내부 구성성분이 오랜 기간 동안 높은 온도와 압력을 받아 굳어져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불순물도 함께 섞인다. 그래서 대부분 원자 배열이 불규칙한 다결정 형태가 된다.
실험실에서 단결정을 만들려면 먼저 재료를 물에녹인다. 녹은 상태에서 서서히 물을 증발시키면 바닥에 아주 작은 알갱이가 생긴다. 이 가운데 지름 1mm 이하의 알갱이를 머리카락이나 가는 낚싯줄로 매달아 단결정 재료가 가득 녹아 있는 포화용액에 넣는다. 시간이 지나 포화용액이 증발하면서 녹지 못한 입자가 이 알갱이에 차곡차곡 달라붙어 단결정으로 성장한다. 900~1200℃의 열에 녹여 결정을 키우는 방법도 있다.
언뜻 들으면 간단한 것 같지만 실제로 해보면 여간 까다롭지 않다. 원자들이 달라붙는 동안 온도나 습도, pH 같은 환경조건이 단결정 종류마다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증발이나 냉각 속도가 너무 빨라도 안 된다. 원자들이 급하게 달라붙으면서 배열에 규칙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지름이 1~3cm로 자라려면 적어도 보름, 길게는 한 달까지 걸린다.
차세대 컴퓨터 메모리 소재로 주목
과학계에서 단결정이 처음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는 X선이 연구에 쓰이기 시작한 1900년대 초부터다. 물질 내부의 구조를 들여다보려면 원자 크기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작은 파장의 빛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지우개 크기를 눈금 1m짜리 자로 잴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파장은 자로 치면 눈금에 해당한다.
원자 하나의 크기는 1~10Å(옹스트롬, 1Å=10-10m)이고, X선은 파장이 약 1.54Å다. X선으로 물질 내부 구조를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되면서 단결정 연구는 빠르게 진전됐고, 이후 1950년대에 들어 실리콘 단결정이 반도체 생산에 사용되기 시작하자 단결정은 산업화 소재로 본격적으로 주목받았다. 지금도 X선은 단결정 내부 구조를 확인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널리 쓰인다.
최근 전자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요구가 많아지고 점점 소형화되는 추세가 이어지면서 더 ‘개성 있는’ 단결정 소재가 필요해졌다. 전기전도도나 열전도도 같은 일반적인 특성뿐 아니라 강한 자성이나 높은 빛 굴절률 같은 독특한 능력을 갖춘 소재가 개발돼야 할 시점인 것이다.
자성이 강한 단결정은 차세대 컴퓨터 메모리인 M램을 만드는 소재로 쓰일 수 있다. M램을 장착한 컴퓨터는 전원을 껐다 켜도 작업하던 내용이 지워지지 않는다.
최근 세계적으로 쓰이고 있는 단결정 종류는 수백 가지나 된다. 세계 실리콘 단결정 시장만 해도 현재 수십조~수백조 원에 이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내에선 미국과 유럽, 일본에 비해 단결정 연구가 매우 저조하다. 일본에는 단결정 관련 연구소만 수십 곳이 있고 관련 기업은 200개가 넘는다. 반면 한국엔 관련 기업이 10개도 안 된다. 단결정의 특성을 연구하는 기관은 거의 전무하다. 최근 첨단 나노과학이 붐을 이루면서 단결정 분야를 한물 지난 고전적인 연구로 치부하는 경향마저 생겼다.
그러나 단결정의 산업 기여도는 여전히 크고 앞으로 오히려 더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단결정 연구에 적극적인 투자와 관심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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