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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낯선 땅이다. 극심한 가난과 배고픔, 끊임없는 가뭄, 정체 모를 질병, 생소한 동식물들…. 이런 이미지만 떠오른다. 머나먼 그 땅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탐험가도, 외교관도 아니다. 바로 한국 과학자들이다.

4800케냐실링(KSH). 1달러가 약 80KSH이니 우리 돈으로 7만 5000원이 좀 넘는다. 아무리 그 유명한 아프리카 사파리라 쳐도 좀 비싸다 싶긴 했지만, 어쨌든 입장료를 내고 나쿠루국립공원에 들어갔다.

울창한 숲 사이로 차를 몰아 20여 분쯤 갔을까. 드디어 눈앞에 나쿠루호수가 펼쳐졌다. 호수 건너편이 가물가물해 마치 바닷가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희한하게도 호수 가장자리가 불그스름하다. 홍학이다! 도무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홍학 떼가 호숫가에서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다. 순간 돈 생각은 거짓말처럼 싹 달아났다.

나쿠루호수는 세계 최대의 홍학 서식지로 유명하다. 많을 땐 100만 마리도 넘게 몰려든다고 한다. 적도가 관통하는 이곳 케냐의 7~8월은 한국과 달리 선선한 가을 날씨다. 밤엔 긴소매 옷을 입고 자야 할 정도로 춥기까지 하다. 게다가 나쿠루와 수도 나이로비는 모두 해발고도 1600m 이상인 고산지대. 바람과 습도도 적당해 천혜의 기후조건을 갖춘 땅으로 불린다.

호숫가 근처에서 재잘대는 소리가 들렸다. 현지 학생들이 타고 온 스쿨버스가 보였다. 호기심에 이끌려 학생들 틈에 섞였다. 9살부터 12살, 13살까지, 아마 학교 규모가 작아 여러 학년이 같이 공부하는 모양이다. 어울려 사진을 몇 장 찍고 돌아서는데, 한 여학생(왼쪽 사진)이 버스에 타려다 말고 말했다.

“저 내년에 졸업하는데, 한국에 좀 데려가 주세요. 한국에 가서 공부하고 싶어요.”데려가지 못하는 이유를 선뜻 답하지 못해 잠시 당황했다. 그 당찬 여학생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무엇이 이 어린 학생에게 ‘코리안 드림’을 꾸게 했을까. 아프리카의 과학자들이 한국에 손을 내밀고 있다는 걸 그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을까.



재래 과일과 채소 모양 제각각인 이유

나이로비에 발을 디디면 2가지 점에 놀란다. 한편은 당최 아프리카 같지 않아서고, 다른 한편은 너무나도 아프리카다워서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진입하다 보면 길 양쪽으로 현대식 건물과 공원이 펼쳐진다. 건물이 하도 많아 마치 서울의 삼성동이 연상될 정도다. 유엔환경회의(UNEP)를 비롯한 각종 국제기구와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여러 비정부기구(NGO)가 이곳에 사무실을 차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영국의 식민지였던 탓인지 이곳 상류층 사람들은 이미 서구화된 생활이 몸에 배어 있다.

그러나 시내 곳곳에는 아직도 빈민가가 즐비하다.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지은 집에는 전기와 수도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 나이로비 시내를 벗어나면 사정은 더 나쁘다. 나이로비와 나쿠루를 오가는 산자락에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앉아 있는 젊은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만큼 일자리가 없다는 증거다. 부패한 정치인을 비롯한 이곳 상류층 대부분은 서민들의 어려운 생활에 관심이 없단다.

찻길 옆에 들어선 재래시장에 잠시 내렸다. 무작정 사진기를 들이대면 현지인들은 몹시 불쾌해했다. 그동안 수많은 관광객이 신기한 듯한 눈빛으로 양해도 없이 사진을 마구 찍어갔을 것으로 짐작한다. 여기선 사진 촬영에도 ‘흥정’이 필요하다. 한 아주머니에게 과일 하나를 좀 비싼 값에 산 다음 조심스럽게 초상권 허가를 받았다.

재래시장에 나온 과일과 채소를 보니 모양이나 크기가 제각각이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대형마트에 진열된 농작물도 사정은 비슷하다. 케냐 주민들의 주요 수입원은 농작물과 가축. 전형적인 농업국가다. 전체 국토의 절반가량인 46.5%가 농지다. 케냐 농민의 약 70%가 가축을 기른다.

그럼에도 이 나라에선 아직 육종(育種)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육종은 농작물이나 가축을 더 우수한 품종으로 개량하는 농학 기술이다. 한국 농민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육종에 눈을 떴다. 그 결과 한국인의 식탁은 크기가 고르고 모양이나 색깔이 맛깔스럽고 맛도 좋은 농작물로 채워졌다. 물론 농가의 소득향상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곳 농업과 축산업 기술은 한국의 1970년대 이전 수준이다. 농작물은 병충해나 자연재해에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자라고, 사람이 쓸 전기와 수도도 모자라니 가축은 대부분 방목한다. 생산량이 적어 농가에서 직접 먹기에도 모자란 데다 남은 걸 내다 팔자니 품질이 떨어져 대형 유통회사나 수입산 농작물에 밀릴 수밖에 없다. 그나마 병에 걸려 죽고 나면 아이들 먹일 것도 모자란다.

나이로비에 있는 국제축산연구소(ILRI)에는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농업 전문가들이 모여 있다. ILRI의 홍보담당자 수잔 맥밀란 씨는 “소규모 농가가 좀 더 위생적이고 효율적인 재배기술이나 축산기술을 익혀 스스로 시장에 나와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게 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케냐 첫 개량 송아지 출생 예정

케냐에서 5일간 머물며 든 생각은 사람들이 우유를 참 많이 마신다는 거다. 그냥도 마시고 수시로 커피에 타고 밥 먹을 때도 항상 우유가 옆에 있다. 집에서 직접 짜 플라스틱 통에 담아 갖고 나온 듯한 우유를 길가에서 들고 파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우유는 대부분 멸균되지 않아 외부 사람들이 사 마시면 바로 배탈이 날 수 있다고 한다.

케냐에서 생산되는 총 우유의 약 80%가 자국 내에서 소비된다. 그러니 소가 중요하다. 케냐의 재래종 소는 괘씸하게도 먹이는 많이 먹으면서 우유는 적게 생산한다. 케냐 과학자들이 가축 개량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적은 사료로 양질의 우유와 고기를 많이 생산해 좋은 값에 팔아야 농민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대표적인 가축 개량 기술이 바로 체외수정이다. 유전적으로 우수한 암소의 난자에 우수한 수소의 정자를 주입해 만든 수정란을 대리모 소에 착상시켜 송아지를 얻는 방식이다. 정자와 난자 같은 생식세포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하고, 착상 후 자궁 내 환경도 세밀하게 조절해야 해 여간 까다롭지 않다. 임신율이 10%에도 못 미치기 일쑤다.


  





 

ILRI의 가축유전학자 오케요 므와이 박사팀은 최근 체외수정 기술을 배웠다. 바로 한국인 과학자들에게서 말이다. 그 기술로 임신에 성공한 첫 체외수정송아지가 곧 태어난다. 므와이 박사는 8월 20일을 출산 예정일로 잡고 있다. 그는 “케냐에서 체외수정으로 송아지를 얻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농촌진흥청 국립축산과학원과 경상대 연구팀의 기술 전수로 우리도 이제 임신율을 40%까지 끌어올릴 수 있게 됐다”며 고마움을 나타냈다.

나쿠루에서도 이미 한국 축산기술에 대한 신뢰가 두터워졌다. 한국에서 공학을 공부한 김기환 사장이 1990년대 후반 양계공장(Kim’s Poultry Farm)을 운영하면서부터다. 김 사장은 배합사료 제조법과 최신 부화기술을 익혀 현지 400여 개 농가에 양질의 사료와 병아리를 공급하고 있다. 농가에서 자란 닭을 사들여 공장 내 도계장에서 잡아 현지 유통회사에 파는방식으로 연간 약 20억 원의 매출을 올린다.

김 사장은 “닭이 병에 걸리면 아무런 손도 못 쓴 채 10% 이상을 폐사시키며 막대한 손해를 입었던 이곳 농민들이 우리 회사와 거래하면서 사료제조기술과 부화기술, 첨단 질병검사법 등에 눈을 뜨고 있다”며 “한국이 우수한 농업기술과 효율적인 정책을 도움이 필요한 외국으로 확장하는 데 적극 나서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케냐 농민의 대부분은 1만 6500m2 미만에서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란다. 좁은 땅에서 생산
량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방법을 연구해 온 한국의 농업기술이 진출하기에 적합하다는 게 김 사장을 비롯한 이곳 농업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한국 과학자들이 새로운 농업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시작하면서 케냐에선 한국에 거는 기대가 점점 커지고 있다.
 

미지의 땅 개척하는‘과학외교관’

케냐를 비롯한 동부아프리카에 사는 재래종 소‘보란(Boran)’에겐 천적이 있다. ‘체체파리(tsetse flies)’다. 소의 천적이 파리라고 하면 우스울지 모르지만, 체체 파리는 치명적인 기생충을 갖고 있다. 파리 침샘을 통해 이 기생충에 감염되면 아무리 건강한 보란이라도 신경이 마비돼 수개월 내에 죽는다. 이 병은 아프리카에서 수면병이라고 불린다. 두통에 시달리고 잠이 쏟아지는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부아프리카의 재래종 소 ‘엔다마(N’Dama)’는 희한하게도 체체파리에 물려도 끄떡없이 살아남는다. 같은 아프리카에 사는 소라도 서식지나 종마다 체체파리 기생충에 대한 저항성이 다르다는 얘기다. 국립축산과학원에서 파견된 오성종 박사는 ILRI에서 영국 리버풀대 스티브 캠프 교수팀과 함께 엔다마의 유전자를 분석해 다른 소와 달리 특정 유전자(ARHGAP15)에 돌연변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체체파리는 현재 습도가 높은 열대지방에만 산다. 그러나 지구온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언제 다른 지방으로 퍼질지 모를 일이다. 과학자들의 우려도 바로 이 점이다. 체체파리는 사람도 문다. 아직 메커니즘도 잘 모르고 별다른 해결책도 없는 열대성 질병이 인류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케냐에서의 공동연구로 다행히 한국은 열대성 질병에 대한 정보를 일찌감치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전통적으로 케냐에선 소고기나 양고기를 많이 먹었다. 그러나 최근 젊은이들이 돼지고기나 닭고기를 선호하면서 새로운 맛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닭을 기르는 농가가 늘 거라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ILRI에서 근무하는 이탈리아 투시아대 박사과정 셰일라 세실리 옴메 연구원은 아프리카의 재래종 닭이 유전적으로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을 최근 알아냈다. 이에 비해 한국이나 중국, 유럽 등지에서 상업용으로 개량된 닭은 유전적 다양성이 크게 줄었다. 옴메 연구원은 “아프리카 닭 가운데 일부는 특정 유전자(Mx)에 다른 나라 개량종 닭과 다른 돌연변이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Mx는 조류인플루엔자(AI)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성이 있다고 알려진 유전자다.

국립축산과학원 류재규 박사팀은 옴메 연구원팀과 함께 아프리카 재래종 닭 가운데 AI에 강한 품종을 정확히 찾아내고, 이를 이용해 AI에도 강하고 육질도 좋은 새로운 품종의 닭을 개발하고 있다.
 

아프리카는 여전히 미지의 땅이다. 그만큼 가능성이 크다. 우리의 과학기술을 아프리카에 전수해주고 새로운 연구영역 확보, 농업과 축산업 해외진출, 다양한 가축 유전자원 개척 같은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면 서로 윈윈하는 셈이다. 아프리카로 눈을 돌린 과학자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민간외교 모델이다.
 
“젊은 과학도들이여,아프리카로 오라!”

ILRI에는 한국인 학생들이 있다. 박철현, 서민정, 어현주, 정덕원 씨. 이들 4명은 올 3월 농촌진흥청이 외국의 저명한 농업 관련 연구기관에 파견하는 ‘글로벌 농업 인턴’ 1기에 선발돼 이곳에 왔다. 모두 국내에서 축산 관련 학과에서 학사나 석사학위를 받았다.

박 씨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유학하는 것보다 배우는 지식은 적을지 몰라도 젊은 나이에 아프리카에서 국제공동연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아 지원했다”고 말했다.박 씨와 정 씨는 이곳에서 영국팀과 함께 수면병에 걸린 쥐에서 각종 장기조직이 어떻게 손상되는지를 직접 확인하고 있다.

서 씨는 아프리카 식용작물인 얌에서 성장발육이나 피부에 좋다고 알려진 성분 디오시제닌을 추출하고, 어 씨는 식용작물 카사바에 많은 바이러스 질병을 진단하는 기법을 개발한다. 서 씨는 “한 케냐인 동료에게 이곳 대학에선 기기가 부족해 실험을 거의 못 하고 기본원리 중심으로 공부한다고 들었다”며“그 덕분에 실험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땐 케냐 동료들이 오히려 해결방법을 더 쉽게 찾는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을 지도하는 국립축산과학원 오성종 박사는“젊을 때 낯선 땅에서 외국인과 부딪히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경험은 한 과학도의 일생을 바꿀 수도 있다”고 말했다.

 

2009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나쿠루, 나이로비=임소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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