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경사가 생기기 전이나 성인(聖人)이 탄생하기 전 모습을 드러낸다는 상상의 새 봉황(鳳凰). 전설에 따르면 봉황은 아름다운 빛깔의 오색 깃털을 자랑하며 5가지 음이 뒤섞인 기묘한 울음을 우는 새로 묘사된다. 팔음(八音) 분류법 중‘포(匏)’부에 속하는 생황은 박으로 만든 바가지에 길이가 각기 다른 대나무 관을 여러 개 꽂아서 만든 악기로 봉황의 생김새와 울음소리를 따라 만들었다.
생황은 그 생김새가 봉황이 날개를 접은 모양과 비슷하다고 해서‘봉생(鳳 笙)’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국악기 가운데 봉황처럼 동시에 2가지 이상의 음을 낼 수 있는 유일한 화음악기다.
2가지 이상의 음을 동시에 내는 화음악기
생황은 본래 중국의 악기로 악기의 기원과 관련해 재밌는 설화가 전해진다. 유가의 경전인 ‘예기 명당위(禮記 明堂位)’에 실린 고대신화에서 따르면 인간을 창조한 여신인 여와가 생황을 만들었다.
이때 여와는 하늘에 생긴 구멍을 막은 뒤 인간 세상의 변란을 모두 잠재웠다. 그 뒤 여와는 사람들이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봉황을 닮은 악기를 만들어 인간 세상에 보냈다. 조롱박에 13개의 관을 꽂아 만든 생황이었다. 사람들이 이 악기를 불자 청아한 소리가 나며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한다.
이처럼 생황은 여와의 분신인 박을 사용해 만들었지만 악기를 제작하는 데 적합한 크기와 모양의 박통을 구하기 어렵고 잘 깨지기 때문에 나무통으로 만들거나 금속으로 만드는 경우도 많다. 통의 위쪽에는 구멍을 뚫고 각각 크기가 다른 대나무 관을 돌려 가며 꽂는다. 관에는 검은 대나무인 오죽을 쓰며 관이 길수록 단위시간당 진동수가 낮아져 낮은음이 나고 관이 짧을수록 진동수가 높아져 높은음이 난다.
숭실대 소리공학연구소 배명진 교수는“이처럼 관의 길이에 따라 다른 음이 나는 이유는 물체가 길이에 따라 고유진동수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고유진동수는 외부에서 물체에 힘을 줄 때 물체가 흔들리는 진동수로, 같은 힘을 줄 때 길이가 짧은 고무줄이 길이가 긴 고무줄보다 고유진동수가 높아 더 빠르게 진동한다. 마찬가지로 길이가 짧은 관에서는 긴 관보다 공기가 빠르게 진동하며 높은음을 낸다.
그런데 생황은 다른 국악기와 달리 하모니카처럼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소리가 난다. 바가지나 금속통 옆으로 길게 나온 취구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대나무 관 아래쪽에 뚫린 지공(指孔)을 손가락으로 막는다.
지공을 막으면 관 속에 있는 쇳조각인 ‘쇠청’이 울려 소리가 나고 열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쇠청은 일종의 마우스피스로 숨을 들이 쉬고 내쉴 때마다 진동하면서 소리를 낸다.
이론적으로 생황은 손가락으로 막는 지공 숫자만큼 동시에 여러 음을 낼 수 있다. 10개의 손가락으로 모든 지공을 막으면 동시에 10개의 음을 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연주에서는 3개의 음만을 동시에 낸다.
2개의 음은 한 옥타브 차이의 음을 내 입체감을 느끼게 하며 나머지 1개 음은 4도 또는
5도 아래의 음을 내 화음을 맞춘다.
생황에쓰인대나무관의개수는본래13개, 17개, 19개, 23개, 36개 등으로 다양했다. 대나무 관이 13개인 것을 화생(和笙), 36개인 것을 우생( 笙)이라 하며 관의 수에 따라 다양하게 불렀으나 지금은 모두 생황이라고 부른다. 현재는 관이 17개인 것이 주로 쓰인다. 17개의 관 가운데 ‘윤관(閏管)’ 또는‘의관(義管)’이라고 불리는 1개의 관은 사용하지 않고 실제 연주에는 16개만을 사용해 12율 4청성을 낸다.
신라 비천무늬상에 등장
생황은 언제 국내에 전해졌을까. 신라 성덕왕 24년(725년)에 만들어진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에 새겨져 있는, 선녀가 하늘을 날며 생황을 연주하는 비천무늬상으로 볼 때 삼국시대 이전에 이미 생황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역사서인‘수서’와‘당서’에도 고구려와 백제가 음악 연주에 생황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려사’에도 고려 예종 9년(1114년)과 예종 11년(1116년)에북송에서 연향악과 제례악 연주에 쓰기 위해 생황을 들여 왔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생황은 제작하기 어려워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해 오는 경우가 많았을 뿐 아니라 연주하기 어려워 연주자도 많지 않았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 조선에서 생황을 만드는 방법은 거의 단절됐다. 전란을 수습한 뒤 영조는 일부 악사를 중국에 보내 그 제조법을 배워 오려고 노력했지만 그 이후에는 제조법은 전해지지 않고 연주법만 겨우 전해졌다.
더욱이 조선 후기에는 악사를 양성하는 데조차 실패해 사대부들은 청나라에서 생황을 몰래 들여와 장식품으로 쓰거나 기생들이 구전방식으로 연주법을 전수받아 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까지 생황은 그 제작법이 전해오지 않아 중국의 것을 본떠 사용했다.
2007년 국립국악원 악기연구소는 제작방법이 단절됐던 생황을 악학궤범에 나온 그대로 복원해 제작했고 지난 4월에는 복원한 생황을 종묘제례악에 편성해 연주했다. 현재 생황은 단소와 함께 수룡음이나 염양춘 같은 국악가곡을 연주하는 데 쓰이며 서양악기와 어울려 현대음악에도 자주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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