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빙선이 왜 필요하냐고요? 집을 오가려면 교통수단이 필요하잖아요. 그동안 한국은 남극에 기지(집)는 있었지만 이곳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쇄빙선(교통수단)은 없었어요. 쇄빙선이 꼭 필요할 때면 하루에 8000만 원을 써가며 다른 나라에서 빌렸습니다. 앞으로는 꽁꽁 언 바다를 뚫고 기지에 보급품을 실어 나르거나 극지 주변 바다에서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게 된 거죠. 한국이 극지에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결정적인 발판이 생긴 겁니다.”
7월 1일, 인천 송도 극지연구소에서 만난 남상헌 극지연구실장. 올해 6월 11일 진수된 한국 최초 연구용 쇄빙선 아라온 호의 탄생 배경을 설명하는 그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아라온 호의 건조 과정을 이끌어 온 그에게 아라온 호는 애지중지해야 할 아기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남 실장은 “아라온 호는 덩치가 아주 큰 편은 아니지만 연구 능력만큼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심해의 ‘열수분출구’에서 광물과 생물 자원을 확보하는 프로젝트를 가동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한창 연구 장비가 실리고 있는 아라온 호는 올해 10월 동해로 장비 성능을 점검하기 위해 출항한다. 12월에는 남극 주변 바다를 향해 출발해 쇄빙 능력을 시험할 예정이다.
얼음 깨는‘싸움의 기술’은 박치기와 누르기
암초를 제외하면 배의 정상적 항해를 가로막는 대표적인 장애물은 유빙(遊氷), 즉 바다를 떠다니는 얼음이다. 특히 수많은 얼음이 출몰하는 극지 주변 바다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배가 얼음에 충돌하거나 꽁꽁 언 바다에 갇힌다면 이는 촌각을 다투는 비상 상황이다. 하지만 얼음을 부수는 배인 ‘쇄빙선(ice breaker)’이라면 이런 위기를 애초에 피하거나 쉽게 헤쳐갈 수 있다.
이런 쇄빙선의 능력은 강력한 엔진에서 나온다. 한국 최초의 쇄빙선 아라온 호도 마찬가지다. “아라온 호의 추진력은 일반 배의 4~5배에 이릅니다. 얼음을 밀어붙여 깨뜨리려면 이 정도 힘은 있어야 하죠.” 쇄빙선의 기본 메커니즘은 얼음을 향해 돌진하는 ‘박치기’라는 얘기다.
아라온 호의 뱃머리를 보통 배보다 훨씬 두꺼운 강철판으로 만든 목적도 엔진이 뿜어내는 엄청난 힘을 감당하기 위해서다. 단단한 얼음과 직접 맞부딪치는 뱃머리를 두꺼운 철판으로 만들지 않으면 아무리 엔진 힘이 강해도 얼음에 힘껏 박치기를 할 수 없다. 실제 아라온 호의 견고함은 군함을 뛰어넘는다.
“아라온 호 뱃머리 철판 두께는 39.5mm나 됩니다. 2005년 해군이 진수한 아시아 최대 수송함인 독도함의 경우 20mm 정도이지요. 아라온 호는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배입니다.”
아라온 호가 갖고 있는‘싸움의 기술’은 박치기뿐만이 아니다. ‘누르기’도 있다. 박치기로 조각내기 어려운 큰 얼음이라면 아예 얼음 위로 선체를 올려 짓누른다. 배를 얼음 위에 올릴 수 있는 비밀은 배 밑바닥에 설치된 물탱크에 있다. 물탱크의 물을 순간적으로 배 뒤편으로 쏠리게 하면 뱃머리가 들린다. 똑바로 서 있는 사람의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격이다.
이때 스크루를 돌리면 배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선체 앞부분이 얼음 위에 걸쳐진다. 돌덩어리에 앞바퀴를 올려놓은 자전거 같은 모습이 된다. 다시 순간적으로 물탱크의 물을 앞으로 쏠리게 하면 배가 정면으로 기울면서 얼음에 엄청난 힘이 가해진다. 길이 111m, 폭 19m, 깊이 9.9m의 아라온 호는 웬만한 얼음은 산산조각 내고 만다. 남 실장은 “아라온 호는 시속 5.5km로 전진하면서 두께 1m의 얼음을 깰 수 있다”고 밝혔다.
100여 종의 연구장비, 세계 정상급
총톤수 6950t인 아라온 호는 사실 쇄빙선치고 작은 편이다. 중국처럼 해양과 인접한 많은 국가에선 1~2만t급 쇄빙선을 운영한다. 하지만 이런 쇄빙선 상당수는 연구용이 아니라 운송용이다. 사람이나 짐을 옮긴다는 얘기다. 남 실장은 “질적, 양적 수준에서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연구용 쇄빙선을 보유한 나라는 독일 정도에 그친다”며 아라온 호에 대한 자긍심을 나타냈다.
“아라온 호의 총 건조 비용 1030억 원 가운데 200억 원이 연구 장비를 갖추는 데 쓰였어요. 연구원 60명과 승무원 25명을 태우고 70일간 임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괴력을 가진 엔진, 강도 높은 선체와 함께 중무장한 과학기술장비는 아라온 호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다. 남 실장에게 아라온 호에 탑재되는 100여 종의 연구용 기기 가운데 대표적인 장비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지층 내부를 들여다보는 ‘다중채널 탄성파 장비’와 지형을 바라보는 ‘다중빔 측심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각각 50억 원, 30억 원에 이를 정도로 비싼 장비다.
‘다중채널 탄성파 장비’는 일종의 투명 삽이다. 바다 밑을 파지 않고도 지층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압축 공기를 바닷속에 쏴서 만드는 저주파가 삽의 날 역할을 한다.
“해수를 통과한 저주파가 첫 번째 장애물인 바다 밑 흙을 만나면 일부는 반사되고 다른 일부는 계속 아래로 파고들어 가죠. 그러다가 암반을 만나면 일부는 또 반사되고 일부는 아래로 다시 스며듭니다. 예를 들어 저주파가 해저 1500m, 2000m에서 유달리 더 반사됐다면 지층에 변화가 있다는 얘기예요. 지층의 구조와 두께를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다중채널 탄성파 장비가 저주파를 이용한다면 다중빔 측심기는 고주파를 이용한다. 고주파는 저주파와 달리 맨 처음 만나는 장애물에서 대부분 튕겨 나간다. 따라서 다중빔 측심기를 쓰면 수심과 해저 지형의 겉모습을 샅샅이 알아낼 수 있다.
다중빔 측심기는 아라온 호의 선체 좌우에 달린다. 수면 근처에서 해저를 향해 고주파를 쏴 스캐너처럼 훑는다. 이렇게 하면 해저 지형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추를 내려 수심을 측정하고 해저 지형을 가늠하는 구식 방법보다 훨씬 정확하고 빠른 측정이 가능하다.
앞으로 아라온 호는 어떤 연구에 쓰일까.
“2010년부터 극지 주변지역에 분포한 중앙 해령의 열수분출구를 탐사하는 데 활용될 예정입니다. 열수분출구란 심해에서 마그마에 데워진 바닷물이 뿜어져 나오는 구멍인데, 여기엔 무궁무진한 연구 소재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과학계에 따르면 열수분출구 주변에는 구리, 아연, 니켈, 코발트 등의 금속 덩어리가 널려 있다. 암석에 섞여 있다가 최고 350℃에 이르는 열수에 의해 녹아내려 밖으로 나왔거나 마그마가 찬 바닷물과 만나 형성된 광물이다. 자원의 보고(寶庫)인 셈이다.
“열수분출구 주변은 수온이 높은 데다 독성 물질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주변에서 살아남는 미생물이 있어요. 연구자들은 이 미생물에서 신약 개발에 쓰일 특이한 물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 전 세계에서 이 연구에 많은 시선이 쏠리고 있어요.”
한국은 열수분출구에 대한 탐사와 연구를 미국 우즈홀해양연구소와 공동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극지와 가까운 고위도는 바다가 험해 중앙 해령 연구가 미진했지만 아라온 호를 앞세워 이 같은 답보 상태를 돌파하겠다는 뜻이다.
남극 대륙기지 위한 투자
지금은 한국 극지 연구를 이끌 기대주지만 처음부터 아라온 호가 사랑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1988년 남극에 세종 기지가 문을 열면서 쇄빙선의 건조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됐지만 한동안은 필요하다는 원칙론만 언급됐을 뿐이었다. 천문학적 비용이 드는 쇄빙선 건조가 굳이 필요하냐는 사회적 인식이 걸림돌이었다.
“건조 계획이 구체화된 건 2000년 들어서였어요. 세종 기지가 건설된 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죠. 저는 쇄빙선에 회의적인 시각이 제기될 때면 ‘그건 철학의 문제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분야에나 당면한 과제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미래를 내다본 투자가 없으면 비약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어렵죠. 쇄빙선도 그런 투자 가운데 하나였다고 봅니다. 결국엔 한국의 자산이 된 거죠.”
남 실장은 무궁화 위성의 관제시스템을 세종 기지에 설치한 것을 예로 들었다. 사실 세종기지가 건립될 때에도 회의적인 시선이 있었지만 한국이 위성을 띄우면서 관제소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는 것이다. “한반도에 다다르기 50여 분 전 남극을 지나는 위성에 명령을 전달해 특정 지역을 촬영하도록 하는 과정도 세종 기지가 관측소로 활용되기 때문에 원활히 이뤄지는 것”이라고 남 실장은 밝혔다.
아라온 호 건조가 결정된 뒤에도 전개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설계팀이 배의 형태를 구상하면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배 밑바닥을 V자 형태로 만들어 속도를 내려다 보니 쇄빙 능력에 문제가 있었고, U자 형태로 만드니 깨진 얼음이 배 바깥으로 신속히 떨어져 나가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수차례 설계를 변경하며 고심한 끝에 최종안을 만
들었죠.”
과학계에서는 아라온 호 덕분에 한국이 남극기지 운영 방식을 크게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현재 건설을 추진 중인 남극 대륙기지가 제대로 연구기능을 수행하려면 고도의 과학장비를 갖추고 남극을 자주 드나들 수 있는 쇄빙선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현재 킹조지 섬에서 운영 중인 세종 기지는 남극 대륙 주변부에 있어요. 대륙에 가면 빙하, 고층 대기, 자기장처럼 좀 더 다양한 연구거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세종 기지는 해양 연구 중심으로 특화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한국 최초 쇄빙선 아라온 호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책임지고 있는 남상헌 실장. 그가 그려 나갈 한국 극지 연구의 변화상에 관심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7월 1일, 인천 송도 극지연구소에서 만난 남상헌 극지연구실장. 올해 6월 11일 진수된 한국 최초 연구용 쇄빙선 아라온 호의 탄생 배경을 설명하는 그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아라온 호의 건조 과정을 이끌어 온 그에게 아라온 호는 애지중지해야 할 아기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남 실장은 “아라온 호는 덩치가 아주 큰 편은 아니지만 연구 능력만큼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심해의 ‘열수분출구’에서 광물과 생물 자원을 확보하는 프로젝트를 가동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한창 연구 장비가 실리고 있는 아라온 호는 올해 10월 동해로 장비 성능을 점검하기 위해 출항한다. 12월에는 남극 주변 바다를 향해 출발해 쇄빙 능력을 시험할 예정이다.
얼음 깨는‘싸움의 기술’은 박치기와 누르기
암초를 제외하면 배의 정상적 항해를 가로막는 대표적인 장애물은 유빙(遊氷), 즉 바다를 떠다니는 얼음이다. 특히 수많은 얼음이 출몰하는 극지 주변 바다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배가 얼음에 충돌하거나 꽁꽁 언 바다에 갇힌다면 이는 촌각을 다투는 비상 상황이다. 하지만 얼음을 부수는 배인 ‘쇄빙선(ice breaker)’이라면 이런 위기를 애초에 피하거나 쉽게 헤쳐갈 수 있다.
이런 쇄빙선의 능력은 강력한 엔진에서 나온다. 한국 최초의 쇄빙선 아라온 호도 마찬가지다. “아라온 호의 추진력은 일반 배의 4~5배에 이릅니다. 얼음을 밀어붙여 깨뜨리려면 이 정도 힘은 있어야 하죠.” 쇄빙선의 기본 메커니즘은 얼음을 향해 돌진하는 ‘박치기’라는 얘기다.
아라온 호의 뱃머리를 보통 배보다 훨씬 두꺼운 강철판으로 만든 목적도 엔진이 뿜어내는 엄청난 힘을 감당하기 위해서다. 단단한 얼음과 직접 맞부딪치는 뱃머리를 두꺼운 철판으로 만들지 않으면 아무리 엔진 힘이 강해도 얼음에 힘껏 박치기를 할 수 없다. 실제 아라온 호의 견고함은 군함을 뛰어넘는다.
“아라온 호 뱃머리 철판 두께는 39.5mm나 됩니다. 2005년 해군이 진수한 아시아 최대 수송함인 독도함의 경우 20mm 정도이지요. 아라온 호는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배입니다.”
아라온 호가 갖고 있는‘싸움의 기술’은 박치기뿐만이 아니다. ‘누르기’도 있다. 박치기로 조각내기 어려운 큰 얼음이라면 아예 얼음 위로 선체를 올려 짓누른다. 배를 얼음 위에 올릴 수 있는 비밀은 배 밑바닥에 설치된 물탱크에 있다. 물탱크의 물을 순간적으로 배 뒤편으로 쏠리게 하면 뱃머리가 들린다. 똑바로 서 있는 사람의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격이다.
이때 스크루를 돌리면 배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선체 앞부분이 얼음 위에 걸쳐진다. 돌덩어리에 앞바퀴를 올려놓은 자전거 같은 모습이 된다. 다시 순간적으로 물탱크의 물을 앞으로 쏠리게 하면 배가 정면으로 기울면서 얼음에 엄청난 힘이 가해진다. 길이 111m, 폭 19m, 깊이 9.9m의 아라온 호는 웬만한 얼음은 산산조각 내고 만다. 남 실장은 “아라온 호는 시속 5.5km로 전진하면서 두께 1m의 얼음을 깰 수 있다”고 밝혔다.
100여 종의 연구장비, 세계 정상급
총톤수 6950t인 아라온 호는 사실 쇄빙선치고 작은 편이다. 중국처럼 해양과 인접한 많은 국가에선 1~2만t급 쇄빙선을 운영한다. 하지만 이런 쇄빙선 상당수는 연구용이 아니라 운송용이다. 사람이나 짐을 옮긴다는 얘기다. 남 실장은 “질적, 양적 수준에서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연구용 쇄빙선을 보유한 나라는 독일 정도에 그친다”며 아라온 호에 대한 자긍심을 나타냈다.
“아라온 호의 총 건조 비용 1030억 원 가운데 200억 원이 연구 장비를 갖추는 데 쓰였어요. 연구원 60명과 승무원 25명을 태우고 70일간 임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괴력을 가진 엔진, 강도 높은 선체와 함께 중무장한 과학기술장비는 아라온 호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다. 남 실장에게 아라온 호에 탑재되는 100여 종의 연구용 기기 가운데 대표적인 장비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지층 내부를 들여다보는 ‘다중채널 탄성파 장비’와 지형을 바라보는 ‘다중빔 측심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각각 50억 원, 30억 원에 이를 정도로 비싼 장비다.
‘다중채널 탄성파 장비’는 일종의 투명 삽이다. 바다 밑을 파지 않고도 지층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압축 공기를 바닷속에 쏴서 만드는 저주파가 삽의 날 역할을 한다.
“해수를 통과한 저주파가 첫 번째 장애물인 바다 밑 흙을 만나면 일부는 반사되고 다른 일부는 계속 아래로 파고들어 가죠. 그러다가 암반을 만나면 일부는 또 반사되고 일부는 아래로 다시 스며듭니다. 예를 들어 저주파가 해저 1500m, 2000m에서 유달리 더 반사됐다면 지층에 변화가 있다는 얘기예요. 지층의 구조와 두께를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다중채널 탄성파 장비가 저주파를 이용한다면 다중빔 측심기는 고주파를 이용한다. 고주파는 저주파와 달리 맨 처음 만나는 장애물에서 대부분 튕겨 나간다. 따라서 다중빔 측심기를 쓰면 수심과 해저 지형의 겉모습을 샅샅이 알아낼 수 있다.
다중빔 측심기는 아라온 호의 선체 좌우에 달린다. 수면 근처에서 해저를 향해 고주파를 쏴 스캐너처럼 훑는다. 이렇게 하면 해저 지형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추를 내려 수심을 측정하고 해저 지형을 가늠하는 구식 방법보다 훨씬 정확하고 빠른 측정이 가능하다.
앞으로 아라온 호는 어떤 연구에 쓰일까.
“2010년부터 극지 주변지역에 분포한 중앙 해령의 열수분출구를 탐사하는 데 활용될 예정입니다. 열수분출구란 심해에서 마그마에 데워진 바닷물이 뿜어져 나오는 구멍인데, 여기엔 무궁무진한 연구 소재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과학계에 따르면 열수분출구 주변에는 구리, 아연, 니켈, 코발트 등의 금속 덩어리가 널려 있다. 암석에 섞여 있다가 최고 350℃에 이르는 열수에 의해 녹아내려 밖으로 나왔거나 마그마가 찬 바닷물과 만나 형성된 광물이다. 자원의 보고(寶庫)인 셈이다.
“열수분출구 주변은 수온이 높은 데다 독성 물질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주변에서 살아남는 미생물이 있어요. 연구자들은 이 미생물에서 신약 개발에 쓰일 특이한 물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 전 세계에서 이 연구에 많은 시선이 쏠리고 있어요.”
한국은 열수분출구에 대한 탐사와 연구를 미국 우즈홀해양연구소와 공동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극지와 가까운 고위도는 바다가 험해 중앙 해령 연구가 미진했지만 아라온 호를 앞세워 이 같은 답보 상태를 돌파하겠다는 뜻이다.
남극 대륙기지 위한 투자
지금은 한국 극지 연구를 이끌 기대주지만 처음부터 아라온 호가 사랑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1988년 남극에 세종 기지가 문을 열면서 쇄빙선의 건조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됐지만 한동안은 필요하다는 원칙론만 언급됐을 뿐이었다. 천문학적 비용이 드는 쇄빙선 건조가 굳이 필요하냐는 사회적 인식이 걸림돌이었다.
“건조 계획이 구체화된 건 2000년 들어서였어요. 세종 기지가 건설된 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죠. 저는 쇄빙선에 회의적인 시각이 제기될 때면 ‘그건 철학의 문제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분야에나 당면한 과제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미래를 내다본 투자가 없으면 비약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어렵죠. 쇄빙선도 그런 투자 가운데 하나였다고 봅니다. 결국엔 한국의 자산이 된 거죠.”
남 실장은 무궁화 위성의 관제시스템을 세종 기지에 설치한 것을 예로 들었다. 사실 세종기지가 건립될 때에도 회의적인 시선이 있었지만 한국이 위성을 띄우면서 관제소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는 것이다. “한반도에 다다르기 50여 분 전 남극을 지나는 위성에 명령을 전달해 특정 지역을 촬영하도록 하는 과정도 세종 기지가 관측소로 활용되기 때문에 원활히 이뤄지는 것”이라고 남 실장은 밝혔다.
아라온 호 건조가 결정된 뒤에도 전개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설계팀이 배의 형태를 구상하면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배 밑바닥을 V자 형태로 만들어 속도를 내려다 보니 쇄빙 능력에 문제가 있었고, U자 형태로 만드니 깨진 얼음이 배 바깥으로 신속히 떨어져 나가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수차례 설계를 변경하며 고심한 끝에 최종안을 만
들었죠.”
과학계에서는 아라온 호 덕분에 한국이 남극기지 운영 방식을 크게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현재 건설을 추진 중인 남극 대륙기지가 제대로 연구기능을 수행하려면 고도의 과학장비를 갖추고 남극을 자주 드나들 수 있는 쇄빙선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현재 킹조지 섬에서 운영 중인 세종 기지는 남극 대륙 주변부에 있어요. 대륙에 가면 빙하, 고층 대기, 자기장처럼 좀 더 다양한 연구거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세종 기지는 해양 연구 중심으로 특화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한국 최초 쇄빙선 아라온 호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책임지고 있는 남상헌 실장. 그가 그려 나갈 한국 극지 연구의 변화상에 관심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