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 반도체를 대체할 꿈의 나노소재로 불리는 그래핀. 최근 그래핀을 넓은 면적으로 합성하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휘는 디스플레이나 전자종이, ‘입는 컴퓨터’(wearable computer)가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왔다. 그래핀의 개발 과정부터 그 잠재력까지 살펴본다.
컴퓨터 못지않은 성능을 갖춘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을 즐기고 화상통화를 하며 손톱만 한 크기의 USB메모리에 노래 수천 곡을 저장해 다니는 디지털 유목민. 영화 같은 이야기가 이렇게 빨리 현실이 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1947년 트랜지스터가 등장한 뒤 IT기술은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속도로 발전했다. 1946년 제작된 세계 최초의 컴퓨터 에니악(ENIAC)에는 1만 8000여 개의 진공관이 쓰였으며 그 크기는 집채만 했다. 하지만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연산 속도는 현재 쓰이는 손바닥만 한 전자계산기 수준에도 못 미쳤다.
지난 수십 년 동안 IT기기는 더 빠른 속도, 더 큰 저장 용량, 더 작은 크기를 향해 발전해왔다. 그러나 실리콘을 기반으로 하는 반도체 기술은 한계에 부딪혔고,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해 정보를 주고받는 유비쿼터스 시대가 오며 최근에는 전자기기의 패러다임이 휴대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IT기술이 모든 일상생활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사용의 편리함이나 휴대의 간편함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이런 요구는 인간 친화적인 특성을 갖는 플렉시블(flexible) 전자기기의 필요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반도체 시장 지각변동 일으킬 꿈의 물질
반도체나 디스플레이를 만드는 데 쓰이는 실리콘, 태양전지나 평면 디스플레이를 만드는 데 쓰이는 투명전극인 산화인듐주석(ITO)은 늘리거나 구부리면 깨지거나 쉽게 전기전도성을 잃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전자기기는 이를 보호하기 위해 단단한 케이스가 필요하다. 휘는 디스플레이나 전자종이, 나아가 입는 컴퓨터 같은 전자기기를 개발하려면 실리콘이나 ITO와 비슷한 수준의 전기전도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변형에 잘 견디는 유연한 소재가 필요하다. 이런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소재가 바로 꿈의 나노물질로 불리는 ‘그래핀’(graphene)이다.
그래핀은 평면에서 탄소원자가 육각형 형태로 무수히 연결돼 벌집구조를 이루는 물질로, 연필심에 쓰이는 흑연을 뜻하는 ‘그래파이트’(graphite)와 화학에서 탄소 이중결합을 가진 분자를 뜻하는 접미사인 ‘-ene’을 결합해 만든 용어다. 탄소 원자 한 층으로 돼 있는 그래핀은 두께가 0.35nm(나노미터, 1nm=10-9m) 정도로 얇지만 물리·화학적으로 안정하고 전기전도성이 뛰어나다.
그래핀은 상온에서 단위면적당 구리보다 약 100배 많은 전류(최대 108A/cm2)를 실리콘보다 100배 이상 빠르게 전달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래핀은 열전도성이 가장 좋은 물질로 평가받는 다이아몬드보다 열전도성이 2배 이상 높다. 또한 그래핀은 강철보다 약 200배 이상 기계적 강도가 강하며 신축성도 좋아 10% 이상 면적을 늘리거나 완전히 접어도 전기전도성을 잃지 않는다. 반면 ITO는 약 2%만 변형해도 쉽게 깨지거나 전기전도성을 잃는다.
그래핀은 탄소가 마치 그물처럼 연결돼 벌집 구조를 만드는 데, 이때 생긴 공간적 여유로 신축성이 생겨 구조가 변해도 비교적 잘 견딜 수 있다. 그래핀이 갖는 양자역학적 특성도 전도성을 잃지 않도록 만든다. 그래핀은 육각형의 탄소구조가 가지는 전자배치 특성 때문에 화학적으로도 안정하다. 이는 방향족탄소 화합물에서 탄소 수가 4n+2개일 때 안정하다는 ‘휘켈의 규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n=정수).
탄소원자로만 이뤄진 그래핀은 동판화를 만들 때 많이 쓰이는 조각법인 ‘에칭’같은 방법으로 나노미터 크기의 패턴(회로)을 쉽게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전기적 특성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래핀을 가늘고 긴 리본 형태로 만든 뒤 가장자리 부분을 지그재그 모양이 되도록(탄소 원자 6개가 모여 만든 정육각형의 꼭지점 부분이 오도록) 자르면 금속성을 갖고 팔걸이의자 모양(정육각형의 꼭지점 2개를 연결해 생긴 6개의 선 중 하나가 가장자리로 오도록)으로 자르면 반도체 성질을 갖는다. 그래핀이 반도체 시장에 지각 변동을 일으킬 ‘꿈의 물질’로 평가받는 이유다.
양자역학이 지배하는 탄소나노 구조체
그래핀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필에 쓰이는 흑연의 구성 물질이다. 그래핀이 겹겹이 쌓이면 흑연이 되고, 김밥처럼 말리면 탄소나노튜브가 된다. 탄소원자 60개로 이뤄진 축구공 모양은 풀러렌으로 불린다. 그런데 이런 나노미터 크기의 탄소나노 구조체들은 옴의 법칙이나 뉴턴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고 파동 방정식과 불확정성 원리 등으로 기술되는 양자역학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핀이 뛰어난 전기전도성을 보이는 이유는 이런 양자역학적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래핀은 차세대 전자소재로 평가받는 탄소나노튜브보다 더 우수한 물질이다. 그래핀을 말아서 원통형으로 만든 구조가 탄소나노튜브이기 때문에 두 물질의 화학적 성질은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그래핀을 감는 방향에 따라 반도체와 도체의 특성이 달라지는 탄소나노튜브와 달리 그래핀은 금속성을 균일하게 갖기 때문에 산업적으로 응용하기에 좋다.
그래핀을 수십 나노미터 이하 크기의 리본 형태로 가공하면 반도체 성질을 갖는데, 이점을 활용하면 그래핀으로만 구성된 트랜지스터를 만들 수 있다. 아직까지 실리콘 기반 트랜지스터 성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핀 트랜지스터 개발의 가능성을 보였다는 측면에 의의를 둘 수 있다. 기술이 발달하는 추세를 볼 때 앞으로 10~20년 뒤에는 그래핀이 실리콘 반도체 기술을 대체해 초고속 반도체 메모리를 만드는 데 쓰일 것으로 예측된다.
스카치테이프로 떼서 만든 그래핀
그래핀이 흑연을 구성하는 원자층 한 층이라면 연필로 글씨를 쓰면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필자가 2004년 미국 컬럼비아대 물리학과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있었던 김필립 교수팀은 원자현미경을 이용해 나노미터 크기의 연필을 만든 뒤 마치 종이에 글씨를 쓰듯이 그래핀을 만드는 연구를 몇 년 동안 계속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과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런 방식으로 그래핀을 분리해내진 못했다.
그러던 중 2004년 10월 영국 맨체스터대 물리학부의 안드레 가임 교수팀은 흑연에서 그래핀 한 층을 분리하는 방법을 찾아내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게재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너무나 간단하고 기발해 전 세계 과학자를 놀라게 했다. 흑연 결정을 스카치테이프에 붙이고 기판 표면에 오랫동안 문지르면 수율이 매우 낮기는 하지만 그래핀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 김필립 교수는 가임 교수팀과 함께 같은 방법으로 그래핀을 분리한 뒤 물리학계에 오랜 숙제로 남아 있던 ‘반정수 양자홀 효과’를 실험으로 증명해 2005년 과학저널 ‘네이처’에 결과를 발표했다.
일반적으로 2차원 나노구조에서 ‘양자 홀 효과’는 정수나 분수로 나타나지만 그래핀에서는 전자의 스핀 효과 때문에 마치 전자가 분열한 것과 같은 반정수(n+1/2)를 보일 것으로 예측됐는데 이를 실험으로 증명한 것이다. 또한 이상적인 2차원 결정구조를 갖는 그래핀의 경우 전하를 운반하는 전자와 홀의 유효질량 이 0에 가깝게 돼 전하 운반자가 빛의 속도에 가깝게 움직일 수 있다는 이론적인 예측까지 실험으로 규명했다. 이 연구는 그래핀이 기존 반도체가 가진 한계를 극복한 신개념 소자로 쓰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연구로 평가받았고 김필립 교수가 한국인 과학자 중 노벨상 수상에 가장 근접한 과학자로 평가받는 계기가 됐다.
화학증기증착법으로 크기 키운다
그래핀을 산업에 활용하려면 면적을 크게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12인치 크기의 접는 모니터를 만든다면 그래핀을 12인치 크기로 합성해야 한다. 하지만 스카치테이프로 떼어내는 방식으로는 그래핀을 원하는 형태나 넓은 면적으로 합성하기 힘들다. 화학적으로 분리한 작은 그래핀 조각들을 모자이크처럼 이어붙이는 방법도 전기전도성이 떨어져 투명전극으로 사용하기 어렵다. 반면 화학증기증착법(CVD)을 이용하면 전기전도성이 우수하고 투명하며 유연성을 갖는 그래핀을 얻을 수 있다.
필자의 연구팀은 화학증기증착법으로 가로세로 약 10cm 크기의 그래핀을 합성하는 기술과 회로를 만드는 패터닝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지난 2월 과학저널 ‘네이처’에 논문을 게재했다. 이렇게 만든 투명필름은 ITO 못지않은 전기전도성과 투명도를 가질 뿐 아니라 약 12%정도 면적을 늘리거나 구부려도 전기적 특성이 거의 변하지 않아 투명전극으로 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다. 그래핀으로 투명전극을 만드는 데 성공하면 대량 생산기술을 확립해 ITO 수입을 대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차세대 플렉시블 전자산업 기술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화학증기증착법을 이용한 그래핀 합성과정은 비교적 간단하다. 먼저 촉매층으로 활용할 니켈(Ni)을 기판 위에 증착 하고 약 1000˚C의 고온에서 메탄(CH4)과 수소를 혼합한 가스와 반응시켜 두께 약 300nm의 니켈 촉매층에 탄소를 녹인다.
니켈을 촉매로 쓰는 이유는 뭘까. 탄소를 녹여 그래핀 성장 촉매로 쓸 수 있는 물질에는 니켈, 구리, 실리콘 등이 있는데 그 중 니켈에 탄소가 가장 잘 녹기 때문이다. 고온에서 쉽게 열분해 돼 탄소 원자를 내놓는 메탄은 탄소의 공급원으로 쓰인다. 수소는 니켈 촉매 표면을 환원시켜 탄소원자가 쉽게 녹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촉매층에 탄소가 충분히 녹은 뒤 기판을 냉각시키면 니켈 속에 녹아있던 탄소원자가 다시 니켈 표면에서 결정화되면서 그래핀 구조를 형성한다. 이렇게 합성한 그래핀은 촉매층을 제거해 분리하면 투명전극으로 쓸 수 있다.
그래핀을 상업적 용도로 응용하기 위해서 앞으로 해결해야 할 점이 있다. 그래핀이 실리콘 반도체 기술을 대체하려면 그래핀 필름을 더 크게 키우는 대면적 성장법과 함께 그래핀 층수를 조절하는 기술이 개발돼야 한다. 이는 촉매의 두께와 반응시간, 냉각속도 등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또한 반도체 특성을 개선하기 위해 그래핀 표면과 가장자리의 화학적 특성을 분석하고 기능화하는 일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그래핀으로 만든 나노리본의 가장자리에 질병을 일으키는 특정 생체분자가 결합할 경우 미세하게 전자의 분포가 변한다. 이때 그래핀에서 전류를 측정하면 변화값이 매우 크게 나타나기 때문에 특정 분자를 인식하는 바이오센서로 활용할 수 있다. 이외에도 그래핀의 연구 범위와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 그래핀 연구 분야는 한국인 최초의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탄생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분야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분야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미래의 과학도들이 도전해야 할 블루오션이다.
뛰어난 전기전도성 만든 양자 홀 효과
양자 홀 효과는 이미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두 번이나 배출했다.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폰 클리칭 박사는 양자 홀 효과를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일반적으로 반도체 소자에 전류를 흘려보내면 로렌츠 힘 때문에 전자들은 반도체 소자의 한쪽 가장자리로 이동한다. 이때 전류의 수직 방향으로 전압차가 유도되며(홀 효과) 홀 저항은 옴의 법칙(R=V/I)에 따라 유도된 전압차를 전류로 나눈 값을 갖는다. 그런데 모든 반도체 소자는 필연적으로 불순물을 함유하고 있어 대부분의 과학자는 반도체 소자의 저항 값이 소자가 함유한 불순물 양에 따라 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1980년 폰 클리칭 박사는 절대온도 0K(-273˚C) 근처의 극저온 상태에서 평면에 수직한 방향으로 자기장을 걸어주면 가로 방향의 전도도가 e2/h의 정수배 값을 갖는다는 양자 홀 효과를 발견했다(e는 전자전하량, h는 플랑크 상수). 반도체 시료가 가진 불순물의 양과는 관계없이 일정한 저항 값을 갖는 것이다.
또한 1982년 스탠퍼드대 로버트 러프린 교수와 미국 콜럼비아대 호르스트 슈퇴르머 교수, 미국 프린스턴대 대니얼 추이 교수는 불순물이 더 적은 반도체 소자에서는 마치 전자가 쪼개진 것처럼 가로 전도도가 불순물의 양과 관계없이 h_ 에 3분의1을 곱한 분수 값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반정수 양자홀 효과). 이들은 199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양자 홀 효과는 좀 더 빠른 반도체를 개발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도전의식을 자극하고 있는 셈이다.
유효질량
전자가 도체 안에서 움직일 때 느끼는 질량
증착
금속이나 비금속의 작은 조각을 진공 속에서 가열해 증기로 만들어 물체에 부착시키는 방법이다.
홍병희 교수는 1998년 포항공대 화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 컬럼비아대 물리학과 김필립 교수팀에서 박사후연구원을 지냈다. 2007년 귀국해 성균관대 화학과 및 나노과학기술원 교수를 맡고 있으며 현재 탄소나노튜브와 그래핀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컴퓨터 못지않은 성능을 갖춘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을 즐기고 화상통화를 하며 손톱만 한 크기의 USB메모리에 노래 수천 곡을 저장해 다니는 디지털 유목민. 영화 같은 이야기가 이렇게 빨리 현실이 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1947년 트랜지스터가 등장한 뒤 IT기술은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속도로 발전했다. 1946년 제작된 세계 최초의 컴퓨터 에니악(ENIAC)에는 1만 8000여 개의 진공관이 쓰였으며 그 크기는 집채만 했다. 하지만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연산 속도는 현재 쓰이는 손바닥만 한 전자계산기 수준에도 못 미쳤다.
지난 수십 년 동안 IT기기는 더 빠른 속도, 더 큰 저장 용량, 더 작은 크기를 향해 발전해왔다. 그러나 실리콘을 기반으로 하는 반도체 기술은 한계에 부딪혔고,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해 정보를 주고받는 유비쿼터스 시대가 오며 최근에는 전자기기의 패러다임이 휴대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IT기술이 모든 일상생활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사용의 편리함이나 휴대의 간편함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이런 요구는 인간 친화적인 특성을 갖는 플렉시블(flexible) 전자기기의 필요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반도체 시장 지각변동 일으킬 꿈의 물질
반도체나 디스플레이를 만드는 데 쓰이는 실리콘, 태양전지나 평면 디스플레이를 만드는 데 쓰이는 투명전극인 산화인듐주석(ITO)은 늘리거나 구부리면 깨지거나 쉽게 전기전도성을 잃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전자기기는 이를 보호하기 위해 단단한 케이스가 필요하다. 휘는 디스플레이나 전자종이, 나아가 입는 컴퓨터 같은 전자기기를 개발하려면 실리콘이나 ITO와 비슷한 수준의 전기전도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변형에 잘 견디는 유연한 소재가 필요하다. 이런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소재가 바로 꿈의 나노물질로 불리는 ‘그래핀’(graphene)이다.
그래핀은 평면에서 탄소원자가 육각형 형태로 무수히 연결돼 벌집구조를 이루는 물질로, 연필심에 쓰이는 흑연을 뜻하는 ‘그래파이트’(graphite)와 화학에서 탄소 이중결합을 가진 분자를 뜻하는 접미사인 ‘-ene’을 결합해 만든 용어다. 탄소 원자 한 층으로 돼 있는 그래핀은 두께가 0.35nm(나노미터, 1nm=10-9m) 정도로 얇지만 물리·화학적으로 안정하고 전기전도성이 뛰어나다.
그래핀은 상온에서 단위면적당 구리보다 약 100배 많은 전류(최대 108A/cm2)를 실리콘보다 100배 이상 빠르게 전달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래핀은 열전도성이 가장 좋은 물질로 평가받는 다이아몬드보다 열전도성이 2배 이상 높다. 또한 그래핀은 강철보다 약 200배 이상 기계적 강도가 강하며 신축성도 좋아 10% 이상 면적을 늘리거나 완전히 접어도 전기전도성을 잃지 않는다. 반면 ITO는 약 2%만 변형해도 쉽게 깨지거나 전기전도성을 잃는다.
그래핀은 탄소가 마치 그물처럼 연결돼 벌집 구조를 만드는 데, 이때 생긴 공간적 여유로 신축성이 생겨 구조가 변해도 비교적 잘 견딜 수 있다. 그래핀이 갖는 양자역학적 특성도 전도성을 잃지 않도록 만든다. 그래핀은 육각형의 탄소구조가 가지는 전자배치 특성 때문에 화학적으로도 안정하다. 이는 방향족탄소 화합물에서 탄소 수가 4n+2개일 때 안정하다는 ‘휘켈의 규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n=정수).
탄소원자로만 이뤄진 그래핀은 동판화를 만들 때 많이 쓰이는 조각법인 ‘에칭’같은 방법으로 나노미터 크기의 패턴(회로)을 쉽게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전기적 특성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래핀을 가늘고 긴 리본 형태로 만든 뒤 가장자리 부분을 지그재그 모양이 되도록(탄소 원자 6개가 모여 만든 정육각형의 꼭지점 부분이 오도록) 자르면 금속성을 갖고 팔걸이의자 모양(정육각형의 꼭지점 2개를 연결해 생긴 6개의 선 중 하나가 가장자리로 오도록)으로 자르면 반도체 성질을 갖는다. 그래핀이 반도체 시장에 지각 변동을 일으킬 ‘꿈의 물질’로 평가받는 이유다.
양자역학이 지배하는 탄소나노 구조체
그래핀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필에 쓰이는 흑연의 구성 물질이다. 그래핀이 겹겹이 쌓이면 흑연이 되고, 김밥처럼 말리면 탄소나노튜브가 된다. 탄소원자 60개로 이뤄진 축구공 모양은 풀러렌으로 불린다. 그런데 이런 나노미터 크기의 탄소나노 구조체들은 옴의 법칙이나 뉴턴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고 파동 방정식과 불확정성 원리 등으로 기술되는 양자역학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핀이 뛰어난 전기전도성을 보이는 이유는 이런 양자역학적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래핀은 차세대 전자소재로 평가받는 탄소나노튜브보다 더 우수한 물질이다. 그래핀을 말아서 원통형으로 만든 구조가 탄소나노튜브이기 때문에 두 물질의 화학적 성질은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그래핀을 감는 방향에 따라 반도체와 도체의 특성이 달라지는 탄소나노튜브와 달리 그래핀은 금속성을 균일하게 갖기 때문에 산업적으로 응용하기에 좋다.
그래핀을 수십 나노미터 이하 크기의 리본 형태로 가공하면 반도체 성질을 갖는데, 이점을 활용하면 그래핀으로만 구성된 트랜지스터를 만들 수 있다. 아직까지 실리콘 기반 트랜지스터 성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핀 트랜지스터 개발의 가능성을 보였다는 측면에 의의를 둘 수 있다. 기술이 발달하는 추세를 볼 때 앞으로 10~20년 뒤에는 그래핀이 실리콘 반도체 기술을 대체해 초고속 반도체 메모리를 만드는 데 쓰일 것으로 예측된다.
스카치테이프로 떼서 만든 그래핀
그래핀이 흑연을 구성하는 원자층 한 층이라면 연필로 글씨를 쓰면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필자가 2004년 미국 컬럼비아대 물리학과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있었던 김필립 교수팀은 원자현미경을 이용해 나노미터 크기의 연필을 만든 뒤 마치 종이에 글씨를 쓰듯이 그래핀을 만드는 연구를 몇 년 동안 계속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과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런 방식으로 그래핀을 분리해내진 못했다.
그러던 중 2004년 10월 영국 맨체스터대 물리학부의 안드레 가임 교수팀은 흑연에서 그래핀 한 층을 분리하는 방법을 찾아내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게재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너무나 간단하고 기발해 전 세계 과학자를 놀라게 했다. 흑연 결정을 스카치테이프에 붙이고 기판 표면에 오랫동안 문지르면 수율이 매우 낮기는 하지만 그래핀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 김필립 교수는 가임 교수팀과 함께 같은 방법으로 그래핀을 분리한 뒤 물리학계에 오랜 숙제로 남아 있던 ‘반정수 양자홀 효과’를 실험으로 증명해 2005년 과학저널 ‘네이처’에 결과를 발표했다.
일반적으로 2차원 나노구조에서 ‘양자 홀 효과’는 정수나 분수로 나타나지만 그래핀에서는 전자의 스핀 효과 때문에 마치 전자가 분열한 것과 같은 반정수(n+1/2)를 보일 것으로 예측됐는데 이를 실험으로 증명한 것이다. 또한 이상적인 2차원 결정구조를 갖는 그래핀의 경우 전하를 운반하는 전자와 홀의 유효질량 이 0에 가깝게 돼 전하 운반자가 빛의 속도에 가깝게 움직일 수 있다는 이론적인 예측까지 실험으로 규명했다. 이 연구는 그래핀이 기존 반도체가 가진 한계를 극복한 신개념 소자로 쓰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연구로 평가받았고 김필립 교수가 한국인 과학자 중 노벨상 수상에 가장 근접한 과학자로 평가받는 계기가 됐다.
화학증기증착법으로 크기 키운다
그래핀을 산업에 활용하려면 면적을 크게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12인치 크기의 접는 모니터를 만든다면 그래핀을 12인치 크기로 합성해야 한다. 하지만 스카치테이프로 떼어내는 방식으로는 그래핀을 원하는 형태나 넓은 면적으로 합성하기 힘들다. 화학적으로 분리한 작은 그래핀 조각들을 모자이크처럼 이어붙이는 방법도 전기전도성이 떨어져 투명전극으로 사용하기 어렵다. 반면 화학증기증착법(CVD)을 이용하면 전기전도성이 우수하고 투명하며 유연성을 갖는 그래핀을 얻을 수 있다.
필자의 연구팀은 화학증기증착법으로 가로세로 약 10cm 크기의 그래핀을 합성하는 기술과 회로를 만드는 패터닝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지난 2월 과학저널 ‘네이처’에 논문을 게재했다. 이렇게 만든 투명필름은 ITO 못지않은 전기전도성과 투명도를 가질 뿐 아니라 약 12%정도 면적을 늘리거나 구부려도 전기적 특성이 거의 변하지 않아 투명전극으로 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다. 그래핀으로 투명전극을 만드는 데 성공하면 대량 생산기술을 확립해 ITO 수입을 대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차세대 플렉시블 전자산업 기술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화학증기증착법을 이용한 그래핀 합성과정은 비교적 간단하다. 먼저 촉매층으로 활용할 니켈(Ni)을 기판 위에 증착 하고 약 1000˚C의 고온에서 메탄(CH4)과 수소를 혼합한 가스와 반응시켜 두께 약 300nm의 니켈 촉매층에 탄소를 녹인다.
니켈을 촉매로 쓰는 이유는 뭘까. 탄소를 녹여 그래핀 성장 촉매로 쓸 수 있는 물질에는 니켈, 구리, 실리콘 등이 있는데 그 중 니켈에 탄소가 가장 잘 녹기 때문이다. 고온에서 쉽게 열분해 돼 탄소 원자를 내놓는 메탄은 탄소의 공급원으로 쓰인다. 수소는 니켈 촉매 표면을 환원시켜 탄소원자가 쉽게 녹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촉매층에 탄소가 충분히 녹은 뒤 기판을 냉각시키면 니켈 속에 녹아있던 탄소원자가 다시 니켈 표면에서 결정화되면서 그래핀 구조를 형성한다. 이렇게 합성한 그래핀은 촉매층을 제거해 분리하면 투명전극으로 쓸 수 있다.
그래핀을 상업적 용도로 응용하기 위해서 앞으로 해결해야 할 점이 있다. 그래핀이 실리콘 반도체 기술을 대체하려면 그래핀 필름을 더 크게 키우는 대면적 성장법과 함께 그래핀 층수를 조절하는 기술이 개발돼야 한다. 이는 촉매의 두께와 반응시간, 냉각속도 등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또한 반도체 특성을 개선하기 위해 그래핀 표면과 가장자리의 화학적 특성을 분석하고 기능화하는 일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그래핀으로 만든 나노리본의 가장자리에 질병을 일으키는 특정 생체분자가 결합할 경우 미세하게 전자의 분포가 변한다. 이때 그래핀에서 전류를 측정하면 변화값이 매우 크게 나타나기 때문에 특정 분자를 인식하는 바이오센서로 활용할 수 있다. 이외에도 그래핀의 연구 범위와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 그래핀 연구 분야는 한국인 최초의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탄생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분야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분야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미래의 과학도들이 도전해야 할 블루오션이다.
뛰어난 전기전도성 만든 양자 홀 효과
양자 홀 효과는 이미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두 번이나 배출했다.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폰 클리칭 박사는 양자 홀 효과를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일반적으로 반도체 소자에 전류를 흘려보내면 로렌츠 힘 때문에 전자들은 반도체 소자의 한쪽 가장자리로 이동한다. 이때 전류의 수직 방향으로 전압차가 유도되며(홀 효과) 홀 저항은 옴의 법칙(R=V/I)에 따라 유도된 전압차를 전류로 나눈 값을 갖는다. 그런데 모든 반도체 소자는 필연적으로 불순물을 함유하고 있어 대부분의 과학자는 반도체 소자의 저항 값이 소자가 함유한 불순물 양에 따라 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1980년 폰 클리칭 박사는 절대온도 0K(-273˚C) 근처의 극저온 상태에서 평면에 수직한 방향으로 자기장을 걸어주면 가로 방향의 전도도가 e2/h의 정수배 값을 갖는다는 양자 홀 효과를 발견했다(e는 전자전하량, h는 플랑크 상수). 반도체 시료가 가진 불순물의 양과는 관계없이 일정한 저항 값을 갖는 것이다.
또한 1982년 스탠퍼드대 로버트 러프린 교수와 미국 콜럼비아대 호르스트 슈퇴르머 교수, 미국 프린스턴대 대니얼 추이 교수는 불순물이 더 적은 반도체 소자에서는 마치 전자가 쪼개진 것처럼 가로 전도도가 불순물의 양과 관계없이 h_ 에 3분의1을 곱한 분수 값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반정수 양자홀 효과). 이들은 199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양자 홀 효과는 좀 더 빠른 반도체를 개발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도전의식을 자극하고 있는 셈이다.
유효질량
전자가 도체 안에서 움직일 때 느끼는 질량
증착
금속이나 비금속의 작은 조각을 진공 속에서 가열해 증기로 만들어 물체에 부착시키는 방법이다.
홍병희 교수는 1998년 포항공대 화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 컬럼비아대 물리학과 김필립 교수팀에서 박사후연구원을 지냈다. 2007년 귀국해 성균관대 화학과 및 나노과학기술원 교수를 맡고 있으며 현재 탄소나노튜브와 그래핀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