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4월이면 박물관은 활기가 넘친다. 겨우내 쌓인 먼지를 털어버리고 새봄을 맞으며 찾아올 관람객을 맞을 준비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박물관 소장품 보존실에서는 ‘특별한 손님’을 대비한다는데…. 박물관 ‘불청객’인 해충으로부터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손길이 바빠지고 있다.

오는 5월 후속편을 개봉하는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밤만 되면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의 이야기로 큰 인기를 끌었다. 박물관의 야간 경비인 래리 댈리(벤 스틸러 분)는 전시물들이 돌아다니며 저지른 일을 수습하느라 애를 먹는다. 그런데 박물관에는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많은 ‘존재’들이 박물관을 엉망으로 만들 음모를 꾸미고 있다. 박물관의 유물을 먹이로 삼는 해충이 바로 그들이다.

문화재 갉아먹는 인삼벌레와 권연벌레
길고 긴 겨울이 가고 만물(萬物)이 깨어나는 4월에 자칫 관리를 잘못하면 박물관은 순식간에 해충 ‘천국’으로 변할 수 있다. 특히 박물관에 전시될 유물을 보관하는 ‘수장고’에 해충이 유입돼 급격히 퍼지면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수장고는 유물의 손상이나 변형을 막기 위해 1년 내내 항온(20℃), 항습(습도 55%)의 환경을 유지하며 목재나 종이, 섬유로 만든 ‘먹을거리(유물)’도 많아 해충 번식에 최적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이나 수장고에 보관된 유물을 호시탐탐 노리는 해충에는 어떤 게 있을까. 일반적으로 문화재에 해를 입히는 곤충의 생활방식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유충 때 유물 내부에서 영양분을 섭취하며 살아가다가 성충이 되면 유물에 구멍을 뚫고 밖으로 나오는 종류와 대부분의 일생을 유물 안에서 살아가며 유물을 망가트리는 종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오준석 학예연구사(이하 학예사)는 “박물관에 해를 입히는 유해생물은 좀, 흰개미, 메뚜기, 파리, 나비, 딱정벌레 등 무수히 많다”며 “그중 우리나라에서 피해를 가장 많이 입히는 개체는 인삼벌레와 권연벌레”라고 설명했다. 인삼벌레와 권연벌레는 이름은 낯설지만 누구나 한 번쯤 집안의 낡은 장롱이나 목제품 근처에서 기어다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만큼 흔한 곤충이다.

인삼벌레는 몸길이가 3mm 내외로 적갈색이며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에 서식한다. 인삼벌레 성충은 수명이 약 85일로 1년에 약 3번 세대교체를 하며 한번에 75~100개의 알을 낳아 번식속도가 빠르다. 권연벌레는 몸길이 3.5~4mm에 짙은 적갈색으로 우리나라를 포함한 온대지방과 일부 열대지방에서 발견된다.

두 벌레 모두 잡식성으로 애벌레일 때 목공예품이나 서적, 동·식물 표본을 먹고 산다. 그 뒤 유물을 갉아 먹을 때 생긴 톱밥이나 부스러기를 배설물과 타액을 이용해 굳힌 다음 그 속에서 번데기가 된다. 성충은 약 1주일 정도 고치 안에서 지낸 뒤 유물에 작은 구멍을 만들며 밖으로 나온다.

‘종합적유해생물관리’로 해충 원천봉쇄한다
해충은 어떤 경로로 유물에 침입할까. 오 학예사는 “해충은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나 박물관의 창문이나 문틈, 박물관 주변의 화단이나 쓰레기로부터 들어올 수 있다”며 “구입하거나 기증받은 유물에 살던 해충이 함께 박물관으로 들어온 뒤 다른 유물로 퍼지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전 세계 박물관은 유해생물로부터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화학약제를 무분별하게 살포해 왔다. 그러나 화학약제가 박물관 직원이나 관람객의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과 유물을 손상시킬 가능성이 제기돼 최근에는 가능한 화학약제를 덜 사용하고 친환경적인 방법으로 해충을 관리하는 ‘종합적유해생물관리’(IPM)라는 개념이 도입되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2004년 IPM을 도입해 해충을 원천봉쇄하고 있다. 우선 박물관의 전시실과 수장고에 어떤 해충이 살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끈끈이 트랩을 사용해 해충의 수와 종류를 조사한다. 모니터링을 통해 박물관에 살고 있는 해충의 종류와 성장단계, 해충이 어떤 재질의 유물에 피해를 입히는지 알 수 있으며 해충의 유입 통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창문이나 벽의 갈라진 틈, 문틈과 같은 해충 유입 통로를 차단하는 작업을 한다. 만약 권연벌레나 인삼벌레 같이 특정 해충이 집중적으로 늘면 화학약제를 살포하지 않고 그 해충의 페로몬이 장착된 트랩을 활용한다. 페로몬에 이끌린 수컷을 포획해 번식을 막는 방식이다. 박물관에서 구입하거나 기증받은 유물에 살고 있는 해충이 수장고에 퍼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훈증소독이나 저산소농도 살충처리도 한다.

소독에는 브롬화메틸(CH3Br)과 산화에틸렌(C2H4O)을 86대 14의 비율로 혼합한 가스를 사용한다. 브롬화메틸은 살충 작용을 하며 산화에틸렌은 살균 작용을 한다. 현재 이 혼합가스는 외국에서 건축용이나 가구용 목재를 수입할 때 방역과정에도 쓰인다. 오 학예사는 “1m3당 혼합가스 약 100g을 사용해 20℃에서 이틀 동안 소독하면 대부분의 해충을 없앨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소독하는 데 이틀이나 걸리는 이유는 뭘까. 유물 속 깊이 숨어 있는 해충의 알이나 애벌레, 고치 속에 있는 번데기는 잘 죽지 않기 때문이다. 가스가 유물 속에 완전히 스며들어 방제효과를 보려면 대략 이틀이 걸린다.


조상들의 해충 방제법 ‘거풍’과 ‘포쇄’
해충에 의한 피해는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조상들은 곤충이나 곰팡이가 서적이나 옷, 그림을 훼손하는 일을 막기 위해 거풍(擧風)이나 포쇄(曝)라는 풍습을 만들었다. 거풍은 의류나 서적을 바람에 쐬는 행사며 포쇄는 의류와 서적을 햇볕에 말리는 일을 말한다.

포쇄는 고려 공민왕 11년(136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장마철이 지나면 사고에 보관된 실록을 꺼내 말렸다. 계명문화대 학술정보원장 배현숙 교수가 서울대에서 발행하는 학술지 ‘규장각’에 게재한 ‘조선조 사고의 장서관리’란 논문에 따르면 조선시대(1392~1910년)에는 사고에 보관된 실록을 말리는 포쇄를 311번 시행했다.

조선 숙종 때 실학자 홍만선이 농업과 일상생활에 대해 다양한 사실을 기술한 백과사전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서화를 보관할 때 운향(蕓香), 사향(麝香), 장뇌(樟腦) 같은 ‘약향’(藥香)을 넣어 좀을 퇴치했다는 기록도 있다. 부녀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직조, 염색, 양잠 기술을 엮어 1809년 편찬한 생활백과사전인 ‘규합총서’에는 뱀장어 뼈나 상추잎을 이용해 옷이나 비단에 생기는 좀을 없애는 방법도 실려 있다.

일본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방법으로 유물의 피해를 막았다. 일본은 에도시대(1603년~1867년)에 해충의 피해를 막기 위해 약향을 사용하거나 건조한 봄과 가을에 유물을 말리는 포쇄와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

자연적인 방식으로 해충을 방제한 우리나라나 일본과 달리 서양에서는 각종 화학약제를 사용했다. 미국 스미소니언 국립자연사박물관에서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비소 같은 독극물을 이용해 해충을 없앴다. 하지만 비소는 사람이 흡입할 경우 소화기와 호흡기 장애를 일으키며 심하면 피부암과 간암을 유발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곧 사용이 금지됐다.

19세기 말부터는 옷장에 넣는 방충제로 널리 쓰이는 나프탈렌이 사용됐으며, 20세기 중반부터는 파라디클로로벤젠과 브롬화메틸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 보건후생국(DHHS)은 지난 2006년 1월 나프탈렌을 발암물질로 분류했다. 파라디클로로벤젠도 발암물질로 판명돼 현재 미국에서는 두 물질로 가정용 살충제를 만들거나 박물관에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친환경 생물방제법으로 문화재 안전 지킨다
최근에는 친환경 생물방제법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친환경 생물방제법에는 저산소농도법과 이산화탄소법, 저온처리법, 고온처리법이 있다. 저산소농도법은 1990년대부터 유럽과 미국에서 쓰였으며 질소나 아르곤 가스를 이용한 대규모 처리방식과 탈산소제를 이용한 소규모 처리 방식이 있다.

저산소 농도법은 밀폐 공간에 질소나 아르곤 가스를 주입해 산소농도를 0.3% 아래로 낮춰 해충을 질식시킨다. 이 방법은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고 유물에도 해를 입히지 않는다. 하지만 처리시간이 약 25~30℃에서 3주나 되며 그동안 외부에서 산소가 유입되지 않도록 밀폐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든다. 수장고나 훈증실처럼 많은 유물이 모인 곳에서 사용하기 어려운 단점도 있다. 이산화탄소법은 약 60%의 고농도 이산화탄소를 분사해 해충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이산화탄소는 독성이 없지만 농도가 높을 경우 해충이 질식사한다. 이산화탄소법은 25℃에서 약 2주 동안 처리해야 한다.

최근에는 유물을 얼리거나 온도를 50~60℃로 높여 해충을 없애는 방법도 쓰인다. 오 학예사는 “일반적으로 영하 20℃에서 영하 30℃면 대부분의 해충이 죽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단일 소재로 된 제품이 아니라면 결빙법은 사용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의류는 사용된 실의 종류마다 수축하고 팽창하는 정도가 달라 얼렸다 녹이면 옷의 일부가 늘어나 형태가 바뀔 수 있다. 마찬가지로 목제품을 결합시켜 만든 제품들은 결합부위가 뒤틀려 부서지고 그림은 안료가 떨어져 나갈 수 있다.

국내에서 훈증 가스에 널리 쓰이는 브롬화메틸은 오존층 파괴물질인 브롬 화합물이다. 1997년 제9회 몬트리올의정서당사국 회의에서 브롬화메틸이 오존층 파괴물질로 사용금지 결정이 내려져 미국이나 일본은 2005년부터 브롬화메틸을 사용할 수 없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개발도상국도 2015년부터 더 이상 브롬화메틸을 사용할 수 없다.

지구온난화로 기온이 상승하고 여름이 길어지면 해충의 위협은 더 커질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국내에서 이를 대체할 뚜렷한 방제법이 없다. 무관심한 사이 창궐(猖獗)하는 해충에게 ‘조상의 숨결’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국내 최초로 자체 제작한 훈증실
“2004년 문화재 보존을 위한 종합적유해생물관리(IPM) 교육을 받으러 일본의 동경문화재연구소에 다녀온 뒤 우리 박물관에도 IPM과 훈증실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오준석 학예사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국립민속박물관은 2005년 30m3규모의 훈증실을 국내에서 최초로 자체 제작했다. 아직까지 국내에는 훈증설비를 제작하는 업체나 관련 기술을 연구하는 곳이 없어 대부분의 박물관에서는 훈증시설 전체를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다. 일본에서 6m3 규모의 훈증실과 장비를 수입할 경우 2~3억 원이 든다.

하지만 국립민속박물관은 약 5분의 1정도 가격에 5배 크기의 훈증실을 제작했다.
훈증실을 설치한 뒤 소독에 들어가는 비용과 유물 피해는 크게 줄고 안전성은 향상됐다.
오 학예사는 “훈증실이 없던 2004년까지는 주기적으로 1년에 두 차례 수장고 전체를 일반소독 하거나 수장고 전체를 훈증소독 한 적도 있다”며 “이런 방식은 넓은 범위에 무차별적으로 소독해야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들며 소독약제에 의한 유물 손상 우려도 컸다”고 설명했다.

그뿐 아니라 수장고 전체를 훈증소독할 경우 수장고 벽이나 바닥에 스며들었던 훈증가스가 배기시킨 뒤에도 배어 있어 수장고에서 작업 중인 사람들에게 구토나 두통, 무기력증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훈증실은 완전히 격리된 공간으로 벽을 훈증가스가 스며들지 않는 철판으로 만들었다. 훈증가스를 배기한 뒤에는 훈증실 내부에 가스가 잔류하지 않아 유물을 안전하게 수장고로 옮길 수 있다.


오 학예사는 문화재연구소의 요청에 따라 훈증실 제작 자문위원과 입찰 업체 기술 심사위원도 맡았다. 문화재 훈증소독과 관련된 노하우 전수에 나선 것이다.
오 학예사는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대부분 국공사립박물관에는 제대로 해충방제 시설을 갖추지 못한 곳이 많다”며 “문화재 보존을 위한 노력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운향(蕓香), 사향(麝香), 장뇌(樟腦)
운향은 한약재로 쓰이며 독특한 냄새로 해충의 접근을 막는다. 사향은 천연동물성 향료로 무스크라고도 한다. 해충방제 외에 기절했을 때 정신을 들게 하는 약에도 쓰인다. 장뇌는 곰팡이를 방지하며 방충제로 쓰인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09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이준덕 기자

🎓️ 진로 추천

  • 미술사학
  • 문화인류학
  • 문헌정보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