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천체관측소인 소백산천문대에 SF(과학소설)계를 이끄는 젊은 작가 8명과 현직 천문학자 3명이 모였다. 2박 3일 동안 소백산 별빛 아래서 이들이 펼친, 불꽃 튀는 상상력의 향연을 동행 취재했다.
“블랙홀, 평행우주, 외계인까지…. 우주만큼 SF작가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소재가 또 있을까요?” (윤이형 작가)
“천문학자들은 SF에서 연구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도 합니다. SF작가와 천문학자는 상상력의 동료인 셈이죠.” (이명현 박사)
지난 2월 6일 서울 신촌의 연세대 전파천문대에서 우주에 대한 상상력을 먹고 사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만났다. 2월 11일부터 2박 3일 동안 소백산천문대에서 열릴 ‘천문학과 문학의 만남, 작가 창작 워크숍’에 참가하는 SF작가와 천문학자가 예비모임을 가진 것.
한국 SF계를 이끄는 젊은 작가 7명(윤이형, 김창규, 유광수, 김보영, 배명훈, 정소연, 박성환)과 캐나다 SF작가 고드 셀러, 그리고 SF에 관심이 많은 현직 천문학자 3명(한국천문연구원 소백산천문대 성언창 박사, ‘세계 천문의 해’ 한국조직위원회 문홍규 박사, 연세대 전파천문대 이명현 박사)이 바로 주인공이다.
이번 워크숍은 UN이 정한 ‘2009년 세계 천문의 해’를 맞아, 천문학자는 SF를 통해 천문학을 대중화하고 SF작가는 천문학자로부터 작품의 영감을 얻자는 취지로 한국천문연구원과 ‘세계 천문의 해 한국조직위원회’, 그리고 SF전문출판사 오멜라스 주관으로 열렸다. 별빛 쏟아지는 소백산천문대에서 이들은 어떤 얘기를 나눴을까.
준비운동
소백산천문대는 훌륭한 SF스릴러의 배경?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워크숍이 열린 2월 11일 오후, 해발 1300m 소백산 정상에 자리한 천문대를 올라가는 좁은 길은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게다가 구름인지 안개인지가 자욱하게 덮여 한 치 앞도 안 보였다.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는 문 박사는 ‘손님’들이 넘어지지나 않을까 연방 뒤를 돌아봤다. 조심조심 발끝을 보며 올라가다 보니 뿌연 구름 사이로 신라시대 첨성대 모양의 건물 위에 둥근 밥그릇을 엎어 놓은 듯한 모습을 한 건물이 어렴풋이 보였다. 문 박사가 우리나라에 처음 지어진 현대식 천문관측소로 지금은 쓰이지 않는 건물이라고 설명했다.
“오~, SF식 스릴러소설에 나올 법한 으스스한 분위기인데요.”
차가운 서리바람 사이로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린 본관 건물이 나타나자, 유광수 작가가 “천문대에서 2박3일 동안 벌어지는 일을 다룬 SF를 쓰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박성환 작가가 “폭설로 고립된 외딴 천문대, 천체관측으로 밤과 낮이 바뀐 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물이 어울리겠다”며 맞장구를 쳤다.
성 박사가 천문대 현관문을 열며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소백산천문대에서 10년을 지낸 ‘터줏대감’인 그는 “우리나라 전통천문학과 현대천문학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 역사적 건축물”이라고 소백산천문대를 소개하며, “SF의 소재가 될 만한 천문학 연구 업적과 사연이 많다”고 자랑했다.
1978년 9월 문을 연 소백산천문대는 조선시대 천체관측 관청인 관상감이 일제강점기에 없어진 뒤 처음으로 세워진 서양식 근대천문학 연구시설이다. 첨성대 모양의 건물 위에 설치된 지름 61cm 반사망원경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 하지만 건물이 낡아 1998년 지은 현재 본관 건물의 돔으로 망원경을 옮기면서, 첨성대 모양의 관측소는 소백산천문대의 상징으로서의 역할만 해오고 있다.
소백산천문대는 특히 변광성 연구로 유명하다. 성 박사는 “현재 소백산천문대 망원경은 지름이 수m에 이르는 외국의 망원경에 비해 성능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운용비용이 상대적으로 적어 최소 6개월 이상 꾸준히 관찰해야 하는 변광성 연구나 외계행성 탐색에는 경쟁력이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2월 미국 천문학회지 ‘애스트로노미컬 저널’(Astronomical Journal)에 게재돼 화제가 됐던, 태양이 두 개인 외계행성계의 발견 성과도 한국천문연구원 이재우, 김승리 박사와 충북대 천문우주학과 김천휘 교수팀이 지난 2000년부터 9년 동안 소백산천문대에서 관측한 결과였다.
김창규 작가는 태양이 6개나 있어 1000년에 한 번 밤이 찾아오는 행성 ‘라가쉬’가 등장하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1941년작 ‘전설의 밤’(Nightfall)을 소개하며, 이와 비슷한 행성을 소백산천문대에서 실제로 발견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Round 1
과학적 엄밀함이냐, 자연에 대한 경이감이냐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할 확률은 30만 분의 1입니다. 사람이 일생 동안 번개에 맞아 사망할 확률보다 높죠. 천문학자들은 SF영화 ‘딥임팩트’나 ‘아마겟돈’에서 볼 수 있는 소행성이나 혜성 충돌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워크숍 둘째 날은 소행성 충돌에 대한 문홍규 박사의 강연으로 시작됐다. 작가들은 SF와 과학을 넘나드는 천문학자들의 상상력과 이를 실제로 구현하는 노력에서 SF의 새로운 소재를 얻으려는 듯 귀를 쫑긋 세웠다.
문 박사의 강연에 이어 이 박사가 지난해 9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외계지적생명체탐색프로젝트(SETI) 연례회의에 참석한 결과를 보고했다. SETI는 푸에르토리코에 있는 지름 305m짜리 아레시보 전파망원경 등을 통해 수집되는 우주의 전파신호를, 인터넷으로 연결된 전 세계 수백만 대의 컴퓨터를 이용해 분석해 외계지적생명체를 찾는 국제 프로젝트다.
이 박사는 “SF에나 등장할 법한 외계인의 신호를 찾는 천문학자들의 노력이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다”며 “현재 SETI는 우주에서 오는 전파신호를 무작위로 수신한 뒤 엄청난 데이터 가운데 지적생명체가 보냈을 법한 신호를 찾는 방식에서, 외계인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천체를 목표로 정해 탐색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이 박사의 강연 가운데 작가들의 관심을 끈 내용은 외국의 한 천문학자가 제안한 펄서를 활용해 외계인의 신호를 찾는 방법이었다. 펄서는 빠르게 회전하며 규칙적인 신호를 내보내는 중성자별로 우주에서 가장 특이한 천체 가운데 하나다. 만약 우주에 이 신호를 검출할 정도의 지적 수준을 가진 생명체가 있다면 인간과 마찬가지로 펄서의 신호에 주목할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지구와 펄서, 그리고 외계지적생명체가 살고 있는 행성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고 하자. 만약 지구인이 펄서의 신호와 나란한 방향으로 신호를 보내면 펄서의 신호에 주목하던 지적생명체가 지구인의 신호를 알아챌 거라는 생각이다. 작가들은 SF에 등장할 법한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천문학자가 있다는 사실을 매우 흥미로워했다.
강연이 끝난 뒤 천문학자들과 작가들 사이에서 SF에 대한 격의 없는 ‘브레인스토밍’이 이어졌다. 천문학에서 SF의 소재를 찾고 이를 구체화하는 브레인스토밍이었지만, 먼저 SF를 바라보는 양측의 시각 차가 부각됐다.
먼저 포문을 연 쪽은 천문학자들이었다. 이 박사는 “최근 SF에 등장하는 과학적 설정이 사실과 다르거나, 이론을 오해한데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는 지적과 함께 “SF가 과학적 현실감을 주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소연 작가는 “엄격한 과학이론을 중심으로 하는 SF는 ‘하드SF’(Hard SF)라는 SF의 하부장르의 하나일 뿐”이라고 받아쳤다. 작가들은 하드SF가 갖는 역할의 중요성을 수긍하면서도, SF의 목적이 과학의 내용을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주는 ‘경이감’(sence of wonder)을 전달하는 데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등장하는 SF에서는 상대성이론 자체를 쉽게 설명하는 일보다 시공간이 굽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놀라움과 거기서 나타나는 인간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일이 먼저라는 얘기다.
성 박사는 “과학자들은 전통적으로 과학의 내용을 대중에게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계몽주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며, “좋은 SF란 과학적 설정과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가 밀착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소설”이라고 양측의 입장 차를 정리했다.
Round 2
상상력이라는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
“한 천문학자가 외딴 천문대에서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관찰하다가 엄청난 섬광이 번쩍하는 걸 관찰합니다. 그는 관찰 결과를 보고했지만, 그 외에는 아무도 섬광을 본 이가 없어 무시를 당하죠. 게다가 천문학자는 그 섬광을 본 뒤 시력을 점점 잃어갑니다….”
SF를 바라보는 작가와 천문학자 사이의 관점이 정리되고 나자, 브레인스토밍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먼저 유광수 작가가 소백산천문대에 대한 첫인상에서 문득 떠오른 스토리를 공개했다.
문 박사는 이야기를 들은 즉시 유 작가의 이야기에 도움이 될 만한 실제 연구 분야를 소개했다. 우주에서는 실제로 밤하늘 전체가 번쩍일 정도의 에너지를 방출하는 감마선폭발이라는 현상이 하루 한 번꼴로 일어나며, 이 폭발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 현대 천문학의 큰 과제 가운데 하나라는 설명이었다.
또 달의 표면에서도 때때로 알 수 없는 섬광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천문학자들은 이 현상을 ‘달 충돌’(Moon impact)이라고 부르며 운석이 달 표면에 충돌해 생기는 것이라고 추정한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한 작가는 천문대의 모든 관측과 데이터 분석을 담당하는 로봇 얘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이 박사는 이와 비슷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며 한국천문연구원에서 인터넷으로 원격조종해 천체를 관측하는 미국 애리조나주의 레몬산천문대 로봇망원경을 소개했다.
작가들은 “SF작가들의 상상이 이미 천문학자들에게는 현실이라는 사실이 놀랍다”면서 “천문학자가 직접 SF를 쓰는 것이 낫겠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자 이마저도 천문학자들에게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문 박사가 수년 전 떠올린 SF의 줄거리를 조심스럽게 털어놓기 시작한 것. 그의 얘기는 대략 이렇다.
조선시대 관상감의 한 천문학자가 초신성 폭발을 관찰하고 이를 기록했지만,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흐른 현재. 한 젊은 천문학과 박사과정 학생이 알 수 없는 감흥을 받고 특정 천체를 관측하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힌다. 고생 끝에 초신성 폭발의 흔적을 발견한 주인공은 이 초신성에 대한 기록이 조선시대 한 천문학자의 죽음과 관련돼 있음을 알고, 여기에 얽힌 비밀을 파헤친다는 스토리다.
김보영 작가는 “과학적인 사실이 스토리 전체에 잘 녹아 있지만, 개연성이 부족한 것 같다”고 평한 뒤 “초신성을 발견한 인물의 원한이 그럴 듯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대안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객성으로 불리던 초신성의 발견은 당시 왕의 죽음을 암시하기 때문에, 역모를 꾀하던 일당이 이를 기록한 사람을 암살했다는 식이다.
배명훈 작가는 거기에 주인공이 정신적 감흥을 얻는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놨다. 주인공이 아무 이유 없이 특정 천체를 관측하고 싶어하는 정신적 감흥을 받는 것보다, ‘고고심령학’을 전공한 주인공의 친구를 등장시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조선시대 천문학자의 원한이 이어졌다는 설정이다. 고고심령학은 배 작가의 SF 단편 ‘누군가를 만났어’에 등장하는, 과거 영혼의 흔적을 찾는 가상의 학문이다.
SF작가들과 천문학자들이 주거니 받거니 펼치는 ‘상상력의 향연’은 자정이 넘도록 이어졌다. 별빛이 쏟아지는 소백산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정리운동
소백산천문대에서 태어난 SF, 책으로 펴낼 예정
“소설을 쓰는 일이 다 그렇지만, SF는 특히 공부를 많이 해야 해요. 작품 하나를 쓰기 위해 수개월 동안 논문을 찾고 자료를 뒤져 공부를 해도 모자랄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전문가를 붙잡고 물어보는 일이 최고죠.”
워크숍을 마친 뒤 소백산에서 내려오며 김보영 작가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새로운 소설에 대한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다”며 “천문학 내용을 언제든지 물어볼 수 있는 취재원이 생긴 일은 가장 큰 수확”이라고 말했다.
천문학자에게 이번 워크숍은 어떤 의미였을까. 문 박사는 “천문학은 엄밀한 학문이기 때문에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가설이나 이론을 증명하지 못하면 폐기되는 경우가 많다”며 “천문학자에게 SF의 매력은 이론의 입증이라는 엄밀한 과학의 잣대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번 워크숍을 주관한 SF전문출판사 오멜라스 박상준 대표는 “세계 천문의 해를 맞아 이런 특별한 자리가 만들어졌으나, 미국에서는 이런 만남의 자리가 상설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라며 “SF작가와 과학자가 만나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는 자리가 앞으로도 계속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 워크숍에 참여한 작가들은 SF 중·단편을 한 편씩 지어 10월쯤 작품집을 단행본으로 묶어낼 예정이다. 올 가을 한국 문학계의 역사에 남을 SF 작품집을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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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천문대에서 펼쳐진 2박 3일 상상력의 향연
SF거장 4인방, 상상 그 너머에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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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들은 SF에서 연구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도 합니다. SF작가와 천문학자는 상상력의 동료인 셈이죠.” (이명현 박사)
지난 2월 6일 서울 신촌의 연세대 전파천문대에서 우주에 대한 상상력을 먹고 사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만났다. 2월 11일부터 2박 3일 동안 소백산천문대에서 열릴 ‘천문학과 문학의 만남, 작가 창작 워크숍’에 참가하는 SF작가와 천문학자가 예비모임을 가진 것.
한국 SF계를 이끄는 젊은 작가 7명(윤이형, 김창규, 유광수, 김보영, 배명훈, 정소연, 박성환)과 캐나다 SF작가 고드 셀러, 그리고 SF에 관심이 많은 현직 천문학자 3명(한국천문연구원 소백산천문대 성언창 박사, ‘세계 천문의 해’ 한국조직위원회 문홍규 박사, 연세대 전파천문대 이명현 박사)이 바로 주인공이다.
이번 워크숍은 UN이 정한 ‘2009년 세계 천문의 해’를 맞아, 천문학자는 SF를 통해 천문학을 대중화하고 SF작가는 천문학자로부터 작품의 영감을 얻자는 취지로 한국천문연구원과 ‘세계 천문의 해 한국조직위원회’, 그리고 SF전문출판사 오멜라스 주관으로 열렸다. 별빛 쏟아지는 소백산천문대에서 이들은 어떤 얘기를 나눴을까.
준비운동
소백산천문대는 훌륭한 SF스릴러의 배경?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워크숍이 열린 2월 11일 오후, 해발 1300m 소백산 정상에 자리한 천문대를 올라가는 좁은 길은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게다가 구름인지 안개인지가 자욱하게 덮여 한 치 앞도 안 보였다.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는 문 박사는 ‘손님’들이 넘어지지나 않을까 연방 뒤를 돌아봤다. 조심조심 발끝을 보며 올라가다 보니 뿌연 구름 사이로 신라시대 첨성대 모양의 건물 위에 둥근 밥그릇을 엎어 놓은 듯한 모습을 한 건물이 어렴풋이 보였다. 문 박사가 우리나라에 처음 지어진 현대식 천문관측소로 지금은 쓰이지 않는 건물이라고 설명했다.
“오~, SF식 스릴러소설에 나올 법한 으스스한 분위기인데요.”
차가운 서리바람 사이로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린 본관 건물이 나타나자, 유광수 작가가 “천문대에서 2박3일 동안 벌어지는 일을 다룬 SF를 쓰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박성환 작가가 “폭설로 고립된 외딴 천문대, 천체관측으로 밤과 낮이 바뀐 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물이 어울리겠다”며 맞장구를 쳤다.
성 박사가 천문대 현관문을 열며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소백산천문대에서 10년을 지낸 ‘터줏대감’인 그는 “우리나라 전통천문학과 현대천문학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 역사적 건축물”이라고 소백산천문대를 소개하며, “SF의 소재가 될 만한 천문학 연구 업적과 사연이 많다”고 자랑했다.
1978년 9월 문을 연 소백산천문대는 조선시대 천체관측 관청인 관상감이 일제강점기에 없어진 뒤 처음으로 세워진 서양식 근대천문학 연구시설이다. 첨성대 모양의 건물 위에 설치된 지름 61cm 반사망원경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 하지만 건물이 낡아 1998년 지은 현재 본관 건물의 돔으로 망원경을 옮기면서, 첨성대 모양의 관측소는 소백산천문대의 상징으로서의 역할만 해오고 있다.
소백산천문대는 특히 변광성 연구로 유명하다. 성 박사는 “현재 소백산천문대 망원경은 지름이 수m에 이르는 외국의 망원경에 비해 성능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운용비용이 상대적으로 적어 최소 6개월 이상 꾸준히 관찰해야 하는 변광성 연구나 외계행성 탐색에는 경쟁력이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2월 미국 천문학회지 ‘애스트로노미컬 저널’(Astronomical Journal)에 게재돼 화제가 됐던, 태양이 두 개인 외계행성계의 발견 성과도 한국천문연구원 이재우, 김승리 박사와 충북대 천문우주학과 김천휘 교수팀이 지난 2000년부터 9년 동안 소백산천문대에서 관측한 결과였다.
김창규 작가는 태양이 6개나 있어 1000년에 한 번 밤이 찾아오는 행성 ‘라가쉬’가 등장하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1941년작 ‘전설의 밤’(Nightfall)을 소개하며, 이와 비슷한 행성을 소백산천문대에서 실제로 발견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Round 1
과학적 엄밀함이냐, 자연에 대한 경이감이냐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할 확률은 30만 분의 1입니다. 사람이 일생 동안 번개에 맞아 사망할 확률보다 높죠. 천문학자들은 SF영화 ‘딥임팩트’나 ‘아마겟돈’에서 볼 수 있는 소행성이나 혜성 충돌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워크숍 둘째 날은 소행성 충돌에 대한 문홍규 박사의 강연으로 시작됐다. 작가들은 SF와 과학을 넘나드는 천문학자들의 상상력과 이를 실제로 구현하는 노력에서 SF의 새로운 소재를 얻으려는 듯 귀를 쫑긋 세웠다.
문 박사의 강연에 이어 이 박사가 지난해 9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외계지적생명체탐색프로젝트(SETI) 연례회의에 참석한 결과를 보고했다. SETI는 푸에르토리코에 있는 지름 305m짜리 아레시보 전파망원경 등을 통해 수집되는 우주의 전파신호를, 인터넷으로 연결된 전 세계 수백만 대의 컴퓨터를 이용해 분석해 외계지적생명체를 찾는 국제 프로젝트다.
이 박사는 “SF에나 등장할 법한 외계인의 신호를 찾는 천문학자들의 노력이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다”며 “현재 SETI는 우주에서 오는 전파신호를 무작위로 수신한 뒤 엄청난 데이터 가운데 지적생명체가 보냈을 법한 신호를 찾는 방식에서, 외계인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천체를 목표로 정해 탐색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이 박사의 강연 가운데 작가들의 관심을 끈 내용은 외국의 한 천문학자가 제안한 펄서를 활용해 외계인의 신호를 찾는 방법이었다. 펄서는 빠르게 회전하며 규칙적인 신호를 내보내는 중성자별로 우주에서 가장 특이한 천체 가운데 하나다. 만약 우주에 이 신호를 검출할 정도의 지적 수준을 가진 생명체가 있다면 인간과 마찬가지로 펄서의 신호에 주목할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지구와 펄서, 그리고 외계지적생명체가 살고 있는 행성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고 하자. 만약 지구인이 펄서의 신호와 나란한 방향으로 신호를 보내면 펄서의 신호에 주목하던 지적생명체가 지구인의 신호를 알아챌 거라는 생각이다. 작가들은 SF에 등장할 법한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천문학자가 있다는 사실을 매우 흥미로워했다.
강연이 끝난 뒤 천문학자들과 작가들 사이에서 SF에 대한 격의 없는 ‘브레인스토밍’이 이어졌다. 천문학에서 SF의 소재를 찾고 이를 구체화하는 브레인스토밍이었지만, 먼저 SF를 바라보는 양측의 시각 차가 부각됐다.
먼저 포문을 연 쪽은 천문학자들이었다. 이 박사는 “최근 SF에 등장하는 과학적 설정이 사실과 다르거나, 이론을 오해한데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는 지적과 함께 “SF가 과학적 현실감을 주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소연 작가는 “엄격한 과학이론을 중심으로 하는 SF는 ‘하드SF’(Hard SF)라는 SF의 하부장르의 하나일 뿐”이라고 받아쳤다. 작가들은 하드SF가 갖는 역할의 중요성을 수긍하면서도, SF의 목적이 과학의 내용을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주는 ‘경이감’(sence of wonder)을 전달하는 데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등장하는 SF에서는 상대성이론 자체를 쉽게 설명하는 일보다 시공간이 굽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놀라움과 거기서 나타나는 인간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일이 먼저라는 얘기다.
성 박사는 “과학자들은 전통적으로 과학의 내용을 대중에게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계몽주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며, “좋은 SF란 과학적 설정과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가 밀착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소설”이라고 양측의 입장 차를 정리했다.
Round 2
상상력이라는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
“한 천문학자가 외딴 천문대에서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관찰하다가 엄청난 섬광이 번쩍하는 걸 관찰합니다. 그는 관찰 결과를 보고했지만, 그 외에는 아무도 섬광을 본 이가 없어 무시를 당하죠. 게다가 천문학자는 그 섬광을 본 뒤 시력을 점점 잃어갑니다….”
SF를 바라보는 작가와 천문학자 사이의 관점이 정리되고 나자, 브레인스토밍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먼저 유광수 작가가 소백산천문대에 대한 첫인상에서 문득 떠오른 스토리를 공개했다.
문 박사는 이야기를 들은 즉시 유 작가의 이야기에 도움이 될 만한 실제 연구 분야를 소개했다. 우주에서는 실제로 밤하늘 전체가 번쩍일 정도의 에너지를 방출하는 감마선폭발이라는 현상이 하루 한 번꼴로 일어나며, 이 폭발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 현대 천문학의 큰 과제 가운데 하나라는 설명이었다.
또 달의 표면에서도 때때로 알 수 없는 섬광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천문학자들은 이 현상을 ‘달 충돌’(Moon impact)이라고 부르며 운석이 달 표면에 충돌해 생기는 것이라고 추정한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한 작가는 천문대의 모든 관측과 데이터 분석을 담당하는 로봇 얘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이 박사는 이와 비슷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며 한국천문연구원에서 인터넷으로 원격조종해 천체를 관측하는 미국 애리조나주의 레몬산천문대 로봇망원경을 소개했다.
작가들은 “SF작가들의 상상이 이미 천문학자들에게는 현실이라는 사실이 놀랍다”면서 “천문학자가 직접 SF를 쓰는 것이 낫겠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자 이마저도 천문학자들에게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문 박사가 수년 전 떠올린 SF의 줄거리를 조심스럽게 털어놓기 시작한 것. 그의 얘기는 대략 이렇다.
조선시대 관상감의 한 천문학자가 초신성 폭발을 관찰하고 이를 기록했지만,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흐른 현재. 한 젊은 천문학과 박사과정 학생이 알 수 없는 감흥을 받고 특정 천체를 관측하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힌다. 고생 끝에 초신성 폭발의 흔적을 발견한 주인공은 이 초신성에 대한 기록이 조선시대 한 천문학자의 죽음과 관련돼 있음을 알고, 여기에 얽힌 비밀을 파헤친다는 스토리다.
김보영 작가는 “과학적인 사실이 스토리 전체에 잘 녹아 있지만, 개연성이 부족한 것 같다”고 평한 뒤 “초신성을 발견한 인물의 원한이 그럴 듯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대안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객성으로 불리던 초신성의 발견은 당시 왕의 죽음을 암시하기 때문에, 역모를 꾀하던 일당이 이를 기록한 사람을 암살했다는 식이다.
배명훈 작가는 거기에 주인공이 정신적 감흥을 얻는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놨다. 주인공이 아무 이유 없이 특정 천체를 관측하고 싶어하는 정신적 감흥을 받는 것보다, ‘고고심령학’을 전공한 주인공의 친구를 등장시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조선시대 천문학자의 원한이 이어졌다는 설정이다. 고고심령학은 배 작가의 SF 단편 ‘누군가를 만났어’에 등장하는, 과거 영혼의 흔적을 찾는 가상의 학문이다.
SF작가들과 천문학자들이 주거니 받거니 펼치는 ‘상상력의 향연’은 자정이 넘도록 이어졌다. 별빛이 쏟아지는 소백산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정리운동
소백산천문대에서 태어난 SF, 책으로 펴낼 예정
“소설을 쓰는 일이 다 그렇지만, SF는 특히 공부를 많이 해야 해요. 작품 하나를 쓰기 위해 수개월 동안 논문을 찾고 자료를 뒤져 공부를 해도 모자랄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전문가를 붙잡고 물어보는 일이 최고죠.”
워크숍을 마친 뒤 소백산에서 내려오며 김보영 작가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새로운 소설에 대한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다”며 “천문학 내용을 언제든지 물어볼 수 있는 취재원이 생긴 일은 가장 큰 수확”이라고 말했다.
천문학자에게 이번 워크숍은 어떤 의미였을까. 문 박사는 “천문학은 엄밀한 학문이기 때문에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가설이나 이론을 증명하지 못하면 폐기되는 경우가 많다”며 “천문학자에게 SF의 매력은 이론의 입증이라는 엄밀한 과학의 잣대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번 워크숍을 주관한 SF전문출판사 오멜라스 박상준 대표는 “세계 천문의 해를 맞아 이런 특별한 자리가 만들어졌으나, 미국에서는 이런 만남의 자리가 상설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라며 “SF작가와 과학자가 만나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는 자리가 앞으로도 계속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 워크숍에 참여한 작가들은 SF 중·단편을 한 편씩 지어 10월쯤 작품집을 단행본으로 묶어낼 예정이다. 올 가을 한국 문학계의 역사에 남을 SF 작품집을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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