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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별미로 거듭난 꽁치

값싸고 맛있는 생선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꽁치다. 석쇠에 올려놓고 지글지글 굽다 보면 입안에 절로 침이 고이고, 밥상 위에 오르기가 무섭게 너 나 할 것 없는 젓가락질 공세로 어느새 뼈만 남기 일쑤다. 꽁치는 최고의 찌갯거리이기도 하다. 등산이나 낚시를 갈 때 김치와 함께 꽁치통조림을 챙기지 않으면 뭔가 중요한 것이 빠진 듯한 느낌이 들던 기억이 새롭다.

꽁치는 몸에 좋은 생선이기도 하다. 단백질, 지질, 비타민 같은 영영소가 골고루 들어 있고, 특히 DHA, EPA 같은 불포화지방산이 많기 때문에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줄여 동맥경화나 심근경색, 뇌졸중을 예방하며 뇌세포를 활성화하는 효과가 있다.

대중적 생선의 대명사였던 꽁치. 언제부턴가 세월의 흐름 탓인지 다른 먹을거리에 자리를 양보하고 서서히 그 인기를 잃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미식가들의 입소문으로 꽁치가 다시 이름값을 떨치기 시작했다. 경북 포항 인근 지역의 토속음식인 과메기가 겨울철 별미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추운 겨울 꽁치를 바깥에 내다 걸어 얼렸다 녹이는 과정을 반복하며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말리면 먹음직스런 과메기가 된다. 머리, 내장, 뼈, 껍질을 제거하고 몸통을 반으로 가른 과메기를 쪽파, 마늘, 고추 등과 함께 초고추장에 푹 찍어 김이나 생미역에 싸 먹으면 입에 착 달라붙는 특유의 맛을 느낄 수 있다.

학공치에 대한 오해
꽁치는 동갈치목 꽁칫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다. 우리나라에서는 꽁칫과에 속하는 물고기로 꽁치(Cololabis saira) 한 종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꽁치는 길고 납작한 체형에 주둥이가 뾰족한 생김새 때문에 종종 횟감이나 초밥용 물고기로 유명한 학공치(Hyporhampus sajori)와 혼동되기도 한다. 실제로 어부나 낚시꾼들 중에는 학공치를 꽁치라고 부르는 이들이 많다. 이런 사정은 예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서유구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의 일부인 ‘전어지’(佃漁志)에서 학공치를 꽁치로 부르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 뒤 그 구별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공치(貢侈魚, 꽁치)와 비슷한 것으로 또 한 종류가 있는데, 모양은 비슷하나 몸빛깔이 청색이고 주둥이가 학처럼 매우 길어 학치어(鶴侈魚, 학공치)라고 부른다.”

서유구는 꽁치와 학공치의 가장 큰 차이를 부리 모양으로 봤다. 아래턱과 위턱의 길이가 거의 비슷한 꽁치에 비해 학공치는 아래턱이 바늘처럼 길고 뾰족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학공치(주둥이가 학처럼 생긴 꽁치)라는 이름도 아래턱의 모양에서 유래한 것이다. 중국 주나라의 강태공이 학공치의 부리를 떼어 낚싯바늘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꽁치는 몸 뒤쪽에 조그만 토막지느러미가 나란히 늘어서 있다는 점에서도 학공치와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왜 물 위로 튀어 오를까
동갈치목에는 꽁칫과 외에 동갈치과, 학공칫과, 날칫과 등의 무리가 있다. 이 무리에 속하는 물고기들은 대개 수면 가까운 곳을 헤엄치다가 적에게 쫓기면 물 위로 튀어 오르는 습성이 있다. 수면이란 대부분의 물고기에게 더 이상 몸을 피할 수 없는 막다른 장벽이지만, 이들은 공중으로 몸을 솟구쳐 수면을 새로운 탈출구로 삼는 전략을 개발한 셈이다. 날치야 하늘을 나는 물고기로 워낙 유명하지만 꽁치나 학공치도 뛰어오르는 걸 무척이나 좋아한다. 꽁치잡이 어선은 꽁치가 뛰는 마릿수를 보고 고기의 전체 양을 짐작해 그물을 내리고, 천적에게 쫓기던 학공치가 물수제비를 뜨듯 수면 위를 뛰어다니는 모습도 낚시꾼들에게는 친숙한 장면이다.

꽁치는 우리나라 동해와 남해, 일본 근해부터 미국 서해안에 이르는 북태평양 해역에 주로 서식한다. 찬물을 좋아하는 냉수성 어류로 보통 가까운 바다에서 무리 지어 생활하며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습성이 있다. 겨울에는 동중국해나 일본의 남부 해역에서 지내다가 봄과 여름 사이에 북쪽으로 이동해 동해안 부근에서 알을 낳는다. 일부 무리는 더 북쪽으로 옮겨갔다가 가을이 되면 다시 남쪽으로 이동해 겨울을 난다.

꽁치는 성숙하면 몸길이가 25cm에 이르는데, 산란기인 5~8월에 바다 위를 떠다니는 해조류에 몰려가 1마리당 1500~9000개의 알을 낳는다. 꽁치의 알에는 실처럼 생긴 것이 발달해 해조류에 잘 달라붙는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는 해조류 근처에 머물면서 동물플랑크톤을 잡아먹으며 성장한다. 꽁치는 창자가 매우 짧고 위가 없기 때문에 몸집이 크게 자란 뒤에도 주로 소화가 잘 되는 작은 갑각류, 다른 물고기의 알과 어린 새끼 등을 잡아먹으며 살아간다. 몸길이는 40cm 정도까지 자라며, 수명은 2년 정도로 알려져 있다.

봄에는 손으로 꽁치 잡는다?
‘전어지’에 실린 내용을 소개하긴 했지만 우리나라 옛 문헌에서는 꽁치를 다루고 있는 내용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예전에는 꽁치가 중요한 어업 자원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꽁치를 대량으로 잡기 위한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1940년대에 이르기까지도 꽁치의 어획량은 소규모에 그쳤고, 광복 이후에야 비로소 많은 양을 잡기 시작해 지금은 연간 수만t의 어획고를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꽁치잡이는 봉수망(棒受網)이나 유자망(流刺網)을 이용한 어업 방식이 주를 이룬다. 꽁치의 주광성을 이용한 봉수망 어법은 기다란 봉을 사용해 그물을 보자기 모양으로 펼쳐 놓고 불빛으로 꽁치 떼를 유인해 그물 속으로 몰아넣은 다음, 갇힌 물고기를 손그물이나 펌프를 사용해 퍼 올리는 방식이다.

일본이나 러시아 수역에서는 봉수망 어업이 성행하지만 우리나라 연해에서 조업하는 꽁치잡이 어선들은 대개 봉수망 대신 유자망을 사용한다. 우리나라로 회유해 오는 꽁치는 산란을 앞두고 있으며 주광성이 약해 불빛으로 유인하기 힘들다. 대신 꽁치가 수면 가까이에서 헤엄치는 습성을 활용하기 위해 유자망을 동원한다. 즉 꽁치가 지나다니는 길목을 살펴 폭 5m, 길이 수km에 이르는 그물에 부표를 달아 띄워 놓으면 빠른 속도로 헤엄치던 꽁치들이 이를 피하지 못하고 빽빽한 그물코에 머리를 박고 걸려든다.

동해 북부나 울릉도 해역에서는 꽁치의 산란습성을 이용한 독특한 어업 방식이 전해온다. 해마다 5~6월경이면 산란기를 맞은 꽁치가 동해 연안으로 몰려든다. 이때 어부들은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모자반이라는 해조류를 밧줄이나 막대에 묶어 수면 아래로 늘어뜨린다. 이제 해조류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알을 낳기 위해 몰려든 꽁치가 해조류에 몸을 비벼대다가 손가락 사이에 들어오면 그대로 움켜쥐듯 잡아낸다. 이 방식이 바로 ‘손꽁치잡이’다. 최근에는 일반인들도 동해안에서 이 같은 전통어법을 체험할 수 있는 관광상품이 개발됐다고 하니 다가오는 봄에는 가족과 함께 동해로 떠나보는 것이 어떨까.

별미 맛보기
눈을 꿰었다고 해 ‘과메기’

과메기는 눈을 꿰었다는 뜻의 ‘관목(貫目)’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물고기를 말릴 때 눈을 꿰어 널었다고 해 ‘관목’이라 부르던 이름이 발음상의 변화를 거쳐 ‘과메기’라는 이름으로 굳어진 것이다.

과메기에는 꽁치로 만든 종류도 있지만 청어로 만든 종류도 있다. 시중에 유통되는 과메기의 대다수가 꽁치로 만든 것이지만 어떤 이들은 과메기의 진정한 원조가 청어 과메기라고 주장한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일단은 청어 과메기가 원조라는 주장에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다. 현지인들 중에는 청어 과메기를 먹던 옛 기억을 간직한 사람들이 많고, 옛 문헌을 살펴봐도 청어로 과메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지배적이다. 청어 과메기가 꽁치 과메기로 바뀌게 된 이유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해방 전후 혹은 1960년대 전후를 기점으로 해 청어 산출량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청어 대신 꽁치로 과메기를 만들기 시작했고, 꽁치를 쓰다 보니 청어에 비해 숙성기간이 짧고 맛도 좋아 오히려 ‘원조’ 청어를 밀어내게 됐다.

그러나 1918년경 최창선이 당시 민간에 구전되던 이야기를 집대성한 ‘소천소지’(笑天笑地)라는 책에서 이같은 해석을 뒤집을 만한 단서가 발견된다.
“과것길에 오른 한 선비가 해안가를 걸어가고 있었다. 민가는 보이지 않고 배는 고파왔다. 언덕 위에 서 있는 나무를 봤더니 물고기 한 마리가 가지에 눈이 꿰인 채 죽어 있었다. 이것을 찢어 먹었더니 맛이 기막혔다. 과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선비는 겨울마다 청어나 꽁치를 자신이 경험한 방법대로 말려 먹었다.”

이 글은 청어가 충분히 잡히던 예전에도 꽁치로 과메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조선 후기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나 정약전의 ‘현산어보’(자산어보)에도 꽁치로 과메기를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꽁치 과메기도 청어 과메기에 못지않은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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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이태원 서울세화고 생물 교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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