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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과학 - 16세기 과학혁명의 주역 지동설

천체관측

16, 17세기를 우리는 흔히 과학 혁명기라고 한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없이 종래의 지구중심체계(천동설) 우주관에서 태양중심체계(지동설) 우주관으로 변천을 주도한 두 과학자, 즉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비스툴라 강가의 토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이며 관리여서 가정은 유복했다. 그러나 그는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아저씨 루카스 바젤로데에 의해 양육됐는데, 그의 아저씨는 1489년 에름탄트의 주교가 됐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아저씨를 따라 1496년에서 1506년까지 이탈리아에 유학했다.

그 후 1512년 아저씨가 사망하자 귀국해 발트해안의 프라우엔부르크에서 성직을 맡았다. 여기서 30년에 걸친 그의 활동은 의학 정치 교회 재정 등에 관한 것이었으나, 그의 주된 관심은 젊어서 이탈리아에 유학할 때 부터 생각한 새로운 우주 체계에 대한 것이었다.

발상의 전환-코페르니쿠스

이것은 그간 믿어져 내려온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의 중심은 지구'라는 지구 중심체계를 부정하고, 기원 전 일부 그리스인의 생각이기도 했던 '우주의 중심은 태양'이라는 발상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당시가 그리스 로마 문명의 쇠퇴 이후 1천년에 걸친 천문학적 휴면기임을 생각하면, 이와 같은 생각은 가히 혁명적 발상의 전환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새로운 우주체계는 태양을 중심에 두고 지구에 세 가지 운동을 부여한 것이었다. 즉 지구는 하루를 주기로 자전한다는 것과, 1년을 주기로 태양을 중심으로 운동한다는 것, 그리고 지축을 중심으로 하는 세차운동(歲差運動)이 그것이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논평' 이라는 작은 책을 썼는데, 1530년 경부터 그의 친구들 사이에서 이 책의 사본이읽혀졌다. 이에 심취한 게오르그 레티쿠스는 2년 동안 코페르니쿠스의 밑에서 공부한 끝에 1540년 이 책의 해설을 공표하기도 했다.

레티쿠스는 코페르니쿠스의 역저인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발간하는 일도 하게 되지만 후에 루터파의 목사인 오시안더가 이 일을 맡게 됐다 오시안더는 코페르니쿠스의 저서에 서언을 추가해 마침내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의 서언에는 코페르니쿠스의 생각과 달리 "이 새로운 이론은 반드시 사실은 아니며, 천체의 겉보기 운동을 설명함으로써 앞으로의 위치를 예측하기 위한 단순한 수학적 수단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라 쓰여 있어 당시 종교적 관념과 관측적 사실 사이의 갈등을 엿보게 해주고 있다.

행성의 겉보기 운동

태양중심설이니 지구중심설 등은 단순히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관측을 토대로 발전한 것이다. 이 중 행성들의 운행에 관해서는 행성의 겉보기 운동 해석이 토대가 됐다.

태양계 내의 행성들 중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은 육안으로 충분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밝다. 이들을 매일 밤 관측해 보면, 천체의 일주 운동과는 달리 행성은 천구상의 별자리 사이를 조금씩 옮겨 다니는 것을 알수 있다.

행성의 이러한 운동은 지구에 대한 행성의 상대적인 공전 운동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행성들의 실제 운동이 아니므로 겉보기 운동이라 한다. 별보기 운동은 특이해 고대로부터 많은 관측이 이루어져 왔으며, 이러한 관측 결과를 토대로 우주관과 태양계의 모습이 발달돼 온 것이다(그림 1).
 

(그림1)금성의 겉보기 운동^태양이 진 직후 금성의 위치를 매일 관측하면 1-2-3-4와 같이 이동해 태양을 중심으로 겉보고 운동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행성들의 겉보기 운동은 수성과 금성의 경우 항상 태양을 중심으로 좌, 우 일정한 각 내에서만 관측된다. 이들이 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이루어지는 태양으로부터의 각 거리를 최대 이각이라고 하며 수성은 28˚, 금성은 약 48˚의 값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관측적 사실을 프톨레마이오스는 행성들이 주 전원이라는 작은 원 주위를 돌면서 이심원이라는 큰 원을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설명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러한 사실을 수성과 금성이 지구보다 태양 가까이에서 태양 주위를 돌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그림2).

[생각해 보기] 금성의 최대 이각에 비해 수성의 최대 이각이 작은 이유를 공전 궤도와 관련지어 생각해 보자.

 

(그림 2)지동설과 천동설^(가)에서 보듯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 의하면 지구에서는 항상 금성의 반대쪽 전면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초생달 모양만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와 같이 코페르니쿠스 우주 체계에 의하면 초생달 반달 보름달의 모양이 모두 가능하고 특히 보름달 모양일 때에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 크기가 작고 반대의 경우에는 커지게 된다. 망원경에 의한 관측 결과는 코페르니쿠스 체계에서 예측된 결과를 보여 주었고 이것은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강력한 증거로 생각됐다.



갈릴레오와 망원경

천문학자로서의 갈릴레이는 태양계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체제를 그대로 받아 들이는 대신 자기가 직접 망원경으로 관측한 사실을 토대로 새로운 이론을 전개했다. 1609년 파도바 대학의 수학 교수였던 그는 네덜란드의 리페르셰가 유리를 갈아서 만든 기구를 통해 먼 곳에 있는 물체를 가까이 본다는 소문을 듣고 곧 배율이 수십배나 되는 정교한 망원경을 만들었다. 그는 새로 발명한 망원경으로 관측한 결과를 1610년 '별세계의 보고(Siderius Nuncios)'라는 책으로 발간했다.

갈릴레이는 '별세계의 보고'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천문학자로 명성을 얻은 후 투스카니 대공작의 궁정 수학자 자리를 얻고 프로렌스로 거주지를 옮겨 천체 관측을 계속했다.

갈릴레이는 여러가지 발견한 사실들을 암호 문장으로 간결하게 적기도 했는데, 금성을 관측한 결과는 '사랑의 여신은 신시어(Cynthia)의 모습을 흉내내고 있었다'라 적고 있다. 이 암호 문장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망원경을 통해 달의 울퉁불퉁한 표면을 보고 놀랐다. 그것은 하늘에 떠 있는 달도 지구와 같이 추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상식으로 돼 있던 신성한 천상계와 추한 지상계의 구분이 이제는 필요없게 된 것이다.

이 사실에 입각해서 갈릴레이는 천체가 그 전까지 믿어온 것처럼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은하수란 많은 별의 집단이라는 것과 태양에도 흑점이 있으며, 이것이 움직이는 것을 통해서 태양도 자전하고 있음을 알아냈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통해 발견한 사실 중에서 놀랄 만한 것은 목성에 위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몇개월간 목성을 면밀히 추적함으로써 위성이 목성의 주위를 공전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갈릴레이는 메디치 군주의 집안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 별의 이름을 메디치의 별이라 불렀다. 목성에 또다른 작은 별이 돌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태양이 지구보다 클 때에는 지구도 태양의 주위를 돌 수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발견은 금성의 위상 변화였다. 금성에서도 달과 마찬가지로 차고 기우는 현상이 있음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금성이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당시의 망원경은 대부분 장남감이나 전쟁 용기로 사용됐으나 그는 그것을 하늘로 돌려서 그 관측 기록(사진1)을 근거로 삼아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지지했던 것이다.
 

(사진1)갈릴레이의 관측기록


금성의 위상변화 - 지동설의 강력한 증거

갈릴레이는 금성의 위상 변화를 관측한 결과를 해석, 그 크기가 변하는 것으로 보아 금성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으며 그 위상이 변하는 것으로 보아 금성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태양빛을 반사해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우리는 여행할 때 차창 밖으로 보이는 전봇대의 크기가 그 거리에 따라 서로 다르게 보이며 이를 이용하면 각 전봇대까지의 거리를 구할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림3)과 같이 차창 밖으로 전봇대들이 늘어서 있다면 가장 먼 전봇대까지의 거리는 가장 가까운 전봇대까지 거리의 약 4배가 된다. 이것은 연주시차(年周視差)를 측정해 별까지의 거리를 구하는 원리와 같은 것이다. 즉 별의 거리 r, 별의 연주시차 P는 r=$\frac{1}{p}$의 관계가 있음을 상기하자.
 

(그림3) 전봇대까지의 거리와 크기^가장 작게 보이는 것이 가장 멀리 있는 것이다. 결국 거리와 각 크기는 서로 반비례한다.


이와 같은 원리로 망원경을 통해 금성의 각 크기를 측정하면 각각의 거리를 계산할 수 있다.(사진2).
 

(사진2) 망원경 관측에 의한 금성의 크기 변화^ 모든 사진은 같은 배율로 촬영한 것이다.


[생각해 보기] (표1)은 1994년 금성의 각 크기를 월별로 나타낸 것이다.
 

(표1) 1994년 금성의 각 크기


금성이 가장 크게 보일 때와 가장 작게 보일 때의 거리의 비는 얼마인가? 또 금성이 가장 밝게 보일 때는 언제인가?

(표1)에서 알 수 있듯이 금성이 가장 크게 보일 때는 11월 6일로 61.61"이고 가장 가까울 때는 1월1일로 9.75"이다. 이를 이용하면 가장 가까울 때의 거리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의 거리의 비는 약 6배가 된다.

이와 같은 관측적 사실을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심원의 약 2/3에 해당하는 크기의 주전원을 가정해야 하는데, 이는 당시 알려진 것과 큰 차이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갈릴레이는 금성이 초생달 모양으로 보일 때 가장 크게 보이며 보름달 모양으로 보일 때 가장 작게 보인다는 사실을 관측했다. 이것은 천동설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갈릴레이는 관측을 통해 금성이 달처럼 위상이 변하는 것은 천동설에서는 설명이 안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는 잘 맞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이는 당시 천동설을 인정하는 교회의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을 일으키게 돼 1616년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반대하라는 교회의 압력을 받게 됐다(그림4).
 

(그림 4)금성의 위상 변화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그의 맹세를 직접적으로 위반하지는 않기 위해 세사람이 대화하는 형식을 취해 1632년 '두가지 주요 세계의 계통에 대한 대화'라는 책을 발간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은 교회의 입장을 대표하는 심플리시오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갈릴레이를 나타내는 살비아티, 그리고 세번째 사람은 항상 사물을 빠르게 이해하고 살비아티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그레도다.

이 책에서 갈릴레이는 살비아티라는 인물을 통해 또 심플리시오를 희생시켜서 당시 전통적이며 종교적인 천문학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반박했다. 그의 지동설을 부인하는 장문의 서문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발간으로 인해 1633년 갈릴레이는 종교 재판을 받게 됐다.

그 후 3백50여년이 지난 1983년 비로소 교회는 당시 교회의 잘못을 인정하고 갈릴레이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관측적인 사실을 토대로 한 과학적인 증거가 관념적 사고를 누른 쾌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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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이석형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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