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연구소 예산이 깎이면서 이 시료들은 냉동고에 방치된 채 수년을 머물다가 프랑스 마르세유에 있는 지중해대 디디에르 라울 교수팀으로 흘러들어갔다. 이곳에서 연구자들은 시료들을 분석했고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변종 레지오넬라균 4가지를 찾아냈다. 그런데 마지막 남은 시료 하나가 골치였다. 시료에 있는 아메바 속에 분명 박테리아로 추정되는 미생물이 들어있음에도 박테리아의 실체를 규명하는 실험이 번번이 실패했기 때문.
소득 없는 1년 반이 지난 2003년 초 어느 날, 연구자인 베르나르 라 스콜라 박사는 배율이 20만 배나 되는 강력한 전자현미경으로 시료를 자세히 관찰해보기로 했다. 그곳에는 지름이 0.4㎛(마이크로미터, 1㎛=10-6m) 정도인 작은 박테리아가 있었는데 모양이 좀 이상했다. 보통 박테리아는 공이나 끝이 둥근 막대기 같은 모양인데 이 경우는 6각형이었다. 3차원으로 보자 6각형의 실체는 20면체였다. 이런 기하학적 구조물은 바이러스에서나 볼 수 있는 형태다. 연구자들이 당연히 박테리아로 여겼던 생명체의 실체는 뜻밖에도 바이러스였던 것이다.
몇몇 박테리아보다도 커

연구자들은 아메바 속에 있는 거대한 바이러스에 ‘미미바이러스’(mimivirus)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크기 때문에 박테리아인 줄 알고 깜빡 속아 넘어갔기 때문에 ‘박테리아를 모방한다(mimic)’는 뜻을 강조했다. 라울 교수는 마르세유에 있는 구조생물학 및 미생물연구소의 생명정보학 전문가 장-미셀 클라베리 박사에게 미미바이러스 게놈 분석을 의뢰했다. 대략적인 분석 결과 놀랍게도 게놈 크기가 80만 염기쌍이나 됐고 담고 있는 유전자도 최대 900개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라울 교수팀과 클라베리 박사팀은 이 논문에서 미미바이러스 게놈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여럿 밝혀냈다. 먼저 게놈 크기는 80만 염기쌍이 아니라 120만 쌍이었고 유전자도 최대 1200개가 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가운데 실제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는 911개로 추정했는데 기존에 알려진 유전자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한 결과 이 중 298개는 그 기능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인류의 조상은 바이러스?
미미바이러스의 유전자 가운데는 이때까지 알려진 바이러스 유전자에서는 볼 수 없는 종류가 있었다. 예를 들어 mRNA에서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필요한 유전자가 여럿 들어 있었고 DNA 복제에 실수가 있을 때 고치는 효소를 만드는 유전자도 있었다. 그렇다면 미미바이러스는 어떻게 이런 커다란(!) 몸집을 갖게 됐을까. 조그만 전형적인 바이러스가 숙주인 박테리아나 진핵생물의 유전자를 ‘도둑질’한 결과일까.
연구자들은 미미바이러스 게놈의 구조를 분석한 결과 그 반대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미미바이러스도 원래 더 크고 완벽한, 아마도 독립적인 생활을 했을 조상 바이러스가 기생생활을 택하면서 퇴화하는 과정에서 유전자 일부를 잃은 상태라는 것. 이 가설에 따르면 오늘날 보이는 바이러스 대부분은 기생에 최적화하기 위해 극단적으로 퇴화한 상태다. 따라서 미미바이러스는 오히려 ‘원시적인’ 형태의 바이러스인 셈이다. 1억 년 전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악어나 상어, 은행나무가 살아있는 화석으로 여겨지는 것과 비슷하다. 최근 해양수 시료를 분석한 결과 거대 바이러스와 비슷한 염기서열이 많이 나와 플랑크톤이 거대 바이러스의 숙주일 가능성을 보여줬다.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은 미미바이러스 유전자가 박테리아보다는 진핵생물과 더 가깝다는 점이다. 진핵생물(곰팡이, 식물, 동물)의 유전자가 비록 핵은 없지만 같은 세포 생물체인 박테리아보다 핵산과 단백질 입자인 바이러스와 더 가깝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라울 교수는 “이번에 밝혀진 사실은 바이러스가 진핵생물의 출현에 연관돼 있다는 가설과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어바인 캘리포니아대 바이러스학자 루이스 빌라리얼 교수를 비롯해 몇몇 바이러스학자들은 바이러스와 세포핵의 유사점을 들어 ‘바이러스-세포핵 가설’을 만들었다. 즉 둘 다 끈 같은 게놈을 갖고 있고 (박테리아 게놈은 목걸이처럼 연결돼 있다) DNA에서 mRNA를 만들지만 mRNA에서 단백질을 만드는 데는 관여하지 않는다. 바이러스의 경우는 숙주세포가, 핵의 경우는 핵막 밖의 세포질에서 단백질을 만든다. 또 게놈을 복제할 때 바이러스의 경우 단백질 캡슐이 흩어지고 진핵세포의 경우 세포핵막이 사라진다.
따라서 과거 어느 시점에서 세포핵이 없는 생명체에 바이러스가 침입한 뒤 자리를 잡아 세포핵으로 변화했다는 것. 만일 유전자가 많은 덩치가 큰 바이러스가 있다면 이 가설은 좀 더 그럴듯하게 보일 것이다. 게다가 바이러스의 유전자가 해당하는 진핵생물의 유전자와 비슷하다면 설득력은 더욱 높아진다. 바로 미미바이러스 게놈이 두 가지 모두를 만족시켰다.
바이러스에 기생하는 바이러스

연구자들은 게놈 크기가 1만 8000 염기쌍이고 유전자가 21개뿐인 이 작은 바이러스를 ‘스푸트니크’라고 명명했는데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박테리아에 감염하는 바이러스를 박테리아파지라고 부르는데 착안한 연구자들은 바이러스를 감염시키는 스푸트니크를 위해 ‘바이로파지’(virophage)라는 새로운 범주를 만들었다.
이번 연구결과에 대해 클라베리 박사는 “거대 바이러스가 살아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바이러스가 생명체인가에 대한 논란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했다. 수년 간 냉동고에 처박혀 있던 시료를 잊지 않고 다시 조사한 몇몇 과학자들의 시도가 생명과학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도 있는 연구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미미바이러스.
유전자를 다른 생명체의 유전자와 비교한 결과.
박테리아보다는 진핵생물과 더 가깝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은 바이러스가 진핵생물의 출현에 연관돼 있다는 가설과 부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