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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우울증의 독백

주요우울장애와 우울한 감정은 달라

그래. 내 이름을 듣기만 해도 기분이 처질 거야. 게다가 요즘 TV와 신문에서 다들 내 이름을 떠들어대니 지겹기도 하겠지. 어쩌면 지금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전문가들이 대한민국엔 수두룩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날 너무 과대포장하진 말아줘. 너무 걱정스럽게 바라보지도 않았으면 해. 내 얘기 좀 들어볼래?

마음의 ‘감기’ 아니라 ‘폐렴’
먼저 내가 누군지 설명할게. 신경정신과 의사선생님들은 대개 나를 이렇게 정의해. 사는 데 낙이 없으면서 식욕은 떨어지고, 잠은 못 자고, 집중도 안 되고, 계속 비관적인 생각만 드는 거야. 당연히 몸은 축축 늘어지겠지. 이런 증상이 2주 이상 계속되면 내가 맞아. 이건 세계보건기구(WHO)의 크리스토퍼 머리 박사가 개발한 체크리스트야.

그런데 한번 생각해봐. 만약 네 ‘베프’(친한 친구)가 실연을 당했어. 한 달 전쯤 여자친구와 헤어졌는데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 기분은 계속 울적하지. 할 일도 제대로 못 하고. 그럼 네 친구는 병원에 가야 할까?

사실 세계 인구의 4~10%가 나로 인해 끙끙 앓고 있고, 누구나 걸릴 가능성은 20%쯤 된다는 조사도 있고, 2020년엔 내가 세계 인구가 앓는 질병 ‘넘버 2’가 될 거라고도 해. 그래서인지 다들 지레 겁먹고 당장이라도 내가 자기를 괴롭힐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것 같아.

그런데 중요한 건 말이야, 사람은 누구나 우울할 수 있다는 거야. 그래서 일반적으로 우울한 감정인지, 아니면 진짜 병이라고 진단 내릴 만큼 심각하게 우울한지를 구분하는 일이 정말 중요해.

의학적으로도 나는 ‘주요우울장애’라고 해서 일반적으로 우울한 감정과는 구분이 돼. 다들 내가 ‘마음의 감기’라며 호들갑을 떠는데, 사실 마음의 감기가 아니라 ‘마음의 폐렴’ 쯤은 돼야 내 이름을 붙일 수 있지. 그러니까 조금 전에 얘기한 그 친구가 여자친구를 잃었다는 상실감으로 진짜 병을 앓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실연에 따른 자연스러운 감정의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는 뜻이야.

미국 러트거스대 사회행동과학과 알란 호르비츠 교수와 미국 뉴욕대 사회학과 제롬 웨이크필드 교수도 ‘슬픔의 상실’(2007년)이란 책에서 이 점을 얼마나 강조했는지 몰라. 의사선생님들이 진단내릴 때 증상만 확인하지 말고 환자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회적이고 감정적인 맥락을 고려해야한다고 말이야.

우울증 걸렸다 하면 자살?
내가 요즘 가장 답답한 부분이 뭔 줄 알아? 사람들이 나와 자살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처럼 얘기한다는 거야. 내가 요즘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라니까. 어떤 사람들은 나와 자살을 동일한 것처럼 말하기도 하는데, 이런 ‘낭설’이 언제 어디서 유포되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어.

우선 내가 어떻게 생기는지부터 얘기해 줄게. 사실 원인은 개인마다 달라.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정신병에 속하는 우울증이야. 그런데 이런 경우는 드물어. 요즘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우울증은 이런 부류가 아니라 몸의 영향을 받는 경우야. 정확히 말하면 뇌라고 해야겠지. 이게 두 번째야.

‘프로작’이란 약 이름 들어봤지? 1988년 개발된 뒤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해마다 130억 달러(약 18조 원)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는 우울증 치료제 말야.
이 ‘프로작’이라는 알약을 먹으면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 양이 늘어나. 세로토닌은 대뇌에서 분비되는데, 우리 몸에 세로토닌 양이 늘면 행복해지지. 반대로 세로토닌이 줄면 사회성이 떨어지고 만사가 귀찮아져. 근심걱정은 많아지고 충동적인 성향도 커지지. 이 세로토닌이 아마 ‘괴담’의 진원지가 된 것 같아.

2003년 세계적 과학저널인 ‘네이처’에 흥미로운 논문이 한 편 실렸어. 이 논문은 내가 유전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했지. 세로토닌 전달에 관여하는 단백질인 5-HTT 유전자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이 중 한 형질(s형)을 지닌 사람은 다른 형질(l형)을 지닌 사람에 비해 자살할 확률이 3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거든. 심한 경우 5배까지도 높았다고 해.

놀라운 결과인 건 맞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기도 하구. 게다가 현재까지 조사된 결과에 따르면 나를 가진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자살할 위험이 20배나 높다고 해. 자살한 사람들에 대해 심리학적 부검을 해보면 많게는 88%까지 나를 갖고 있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 말이야.

하지만 확대해석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나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이 자살로 죽는 경우는 6명 중 1명꼴이래. 15%가 넘으니 굉장히 높은 수치긴 하지. 그런데 의사선생님들은 어떤 점을 더 걱정스러워하는지 알아? 자살한 이들 중 나를 치료하려고 병원에 다닌 사람은 3분의 1도 채 안 된다는 거야.

이유는 여러 가지야. 내가 병이라고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개인사를 시시콜콜히 얘기하기 싫어 꺼리기도 하고, 병원을 찾는 일이 어색해 차일피일 미루기도 하고. 그런데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도 치료를 계속하면 80%까지 자살 충동을 줄일 수 있대. 희망적이지?

아, 환경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잊지마.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사귀던 사람과 헤어지거나, 직장을 그만두거나 이런 일상의 사건도 내가 밖으로 나오는 원인이 될 수 있어.

그래서 의사선생님들은 치료할 때 환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상황인지 고려해 치료한대. 나 때문에 고통이 너무 심한 사람에겐 일단 약물치료를 한다더군. 그런 다음에 심리상담을 해. 절반가량은 5~6번만 상담을 받아도 좋아진다고 하니 해볼 만하지?

나는 다른 사람을 전염시키진 않지만 치료하지 않고 놔두면 증상이 심해진다는 의미에선 ‘우울 바이러스’나 마찬가지야. 이제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 받고 자살과 나의 악연을 끊어주지 않을래?

‘악플’ 100개는 수면제 100알과 맞먹어
휴. 드디어 이 녀석이군. ‘악플’ 말야. 이 녀석 얘길 안 하고 넘어갈 수 없네. 내가 이 녀석 때문에 요즘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으니 말야. 고(故) 최진실 씨도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근거 없는 소문 때문에 말 못할 정도로 괴로워했다고도 하고. 그런데 ‘악플’을 읽을 때 심리적인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

한 심리학자는 이렇게 설명하더군. ‘악플’ 자체보다는 그 글을 읽을 때 어떤 상황인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이야. 대낮에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해봐. 그런데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난데없이 욕을 하는 거야. 그러면 기분이 어떨까? 기분이 평소와 같은 상태라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지나칠 테고, 기분이 좀 안 좋다면 굉장히 화가 나겠지.

인터넷에서 ‘악플’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야. 특히 연예인은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는지 민감해. 그런데 밤에 혼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자신에 관한 악의적인 글을 읽는다면 어떻겠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고 욕하고 오해한다고 생각하기 쉽지. 심리학적으로는 ‘자기검열’ 상태가 된다고 해. 그래서 “잠들기 전 ‘악플’ 100개를 읽는 일은 수면제 100알을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만큼 치명적이야.

그런데 여기에다가 평소에 나로 인해 고통 받고 있었다고 생각해봐. 우울함을 떨치기 위해 술이라도 마셨다고 해보자고. 알코올은 분해되면서 아세트알데히드로 바뀌는데, 이 아세트알데히드가 뇌에서 화학작용을 일으켜 내 상태를 악화시킬 수 있어.

‘최진실법’을 만든다고 이런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진 않아. 가장 좋은 방법은 현실공간과 사이버공간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거야. 대한민국은 특이하게도 사이버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현실공간의 일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 그러다 보니 사이버공간에서 오고 가는 이야기가 결국은 자살이라는 엄청난 화를 부르기도 해.

혹시 주변에서 유난히 기운 없이 축 처져 있는 친구가 있다면 이렇게 해봐. 그 사람의 얘기를 경청하는 거야. 얼마나 가슴 아프냐, 동조해주고 논쟁은 절대 피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법은 없는지 같이 해결책도 찾아보고. 나는 완치되긴 어렵지만 얼마든지 호전될 수 있어. 호전된 기간이 길어져서 1년, 2년, 3년 이렇게 되면, 혹시 알아? 내가 너희에게서 완전히 사라질지.

우울증 체크리스트

아래 항목 중 5개 이상 증상이 적어도 2주동안 나타난다면 주요우울장애를 앓을 가능성이 있다.

1.하루 대부분을 우울하게 보낸다.
2.즐겁고 행복한 감정이 눈에 띄게 준다.
3.식욕이나 체중, 또는 둘 모두 급속도로 줄거나 는다.
4.거의 매일 잠을 못 이루며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반대로 너무 많이 잔다.
5.초조하거나 감정에 변화가 없다.
6.무기력하고 피곤하다.
7.항상 죄책감이 들거나 한심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8.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 힘들다.
9.죽음이나 자살을 계속해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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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이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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