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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건반을 사랑한 물리학자 김지수

LG화학기술연구원 정보전자소재연구소 연구원

“쇼팽을 좋아합니다. 작품마다 풍부한 감수성이 배어 있으니까요.”
그랜드 피아노와 드럼이 있어 저녁 시간에는 연주도 감상할 수 있다는 대전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LG화학기술연구원 정보전자소재연구소 김지수 박사는 턱시도 차림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익숙한 곡을 들려달라는 기자의 부탁에 김 박사는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남자 셋(김 박사, 기자, 사진작가)이 와서 스파게티를 먹으며 수다를 떨더니 한 사람이 나갔다 턱시도로 갈아입고 들어오자 호기심이 극에 다다른 주위 사람들은 피아노 선율에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연주가신가 보네요. 멋있어요.”

5분 정도 걸린 연주가 끝나고 다음으로 역시 쇼팽의 ‘스케르쪼 2번 내림나단조’를 연주한다. 테라스의 자리로 돌아간 기자는 약간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실내에서 들려오는 선율에 귀 기울였다. 김 박사의 연주가 가을을 재촉한 듯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테라스 가득 내려와 앉았다.

예쁜 선생님한테 개인 지도 받아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습니다. 1주일에 두 번씩 선생님이 집에 오셔서 가르치셨죠.”

김 박사는 예술이 흘러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인기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원작자인 소설가 김성종 씨인데 아버지가 소설을 집필하는 모습은 어린 아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미술을 전공한 어머니도 틈틈이 작품활동을 하며 아이의 감수성을 풍부하게 했다.

피아노 선생님이 무척이나 예뻤기 때문일까. 보통 남자 아이들이 1, 2년 하다가 그만 두는 것과는 달리 김 박사는 해가 지날수록 피아노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예고에 진학할 목표를 세우고 더욱 열심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만난 물상선생님이 제 삶의 방향을 바꿔놓았죠. 과학이 예술 이상으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주변의 자연 현상을 우아한 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그런 패턴을 찾아낸 과학자들이 위대해 보였다. 결국 피아노 레슨을 그만두고 보통 학생들처럼 생활한 김 박사는 일반고를 거쳐 서강대 물리학과에 들어갔다.

아버지의 영향이었을까? 평소 언어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영국문화원에서 영어와 영국 문화를 접했고, 그러던 중 영국문화원이 주최한 유학박람회에서 브리스톨대에 지원해 입학허가를 받았다. 결국 영국으로 유학해 물리학을 전공하고 케임브리지대로 옮겨 물리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4년 LG화학에 입사해 대전으로 왔습니다. 연구소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어느 날 문득 다시 피아노를 치고 싶다는 열망이 몰려왔습니다.”
침례신학대 교회음악과 교수로 있던 유명 피아니스트인 한정강 씨를 찾아가 가르침을 부탁했다. 30세 젊은 과학자의 열정에 흥미를 느낀 한 교수는 김 박사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2005년부터 현재까지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계속되고 있다. 김 박사는 주말이면 한 교수 댁을 찾는다.

“지난해 한 교수의 문하생들이 ‘대덕연구단지 연구원들을 위한 피아노연주회’를 열었습니다. 6명 가운데 저만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었죠.”
쇼팽의 스케르쪼 2번을 연주한 김 박사는 10분 남짓한 이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수개월동안 주말마다 아침 8시에서 밤 10시까지 연습했다고 한다.스케르쪼(scherzo)는 이탈리아어로 ‘농담’이란 뜻으로 극적이고 기교적인 피아노 곡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한편의 ‘희극’ 같다는 김 박사는 쇼팽의 곡 가운데서도 스케르쪼를 특히 좋아한다.

“점심, 저녁 식사 시간을 빼고 피아노 앞에 붙어 있었죠. 20년 가까운 공백이 있었음에도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연주회의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 김 박사는 무사히 연주를 마칠 수 있었다.

음악이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 넓혀

“쇼팽이 남긴 악보는 하나지만 이를 해석하는 건 연주자의 몫입니다. 과학도 마찬가지 같아요. 자연현상은 하나지만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냐에 따라서 남이 알아채지 못하는 비밀을 발견할 수 있지요.”

김 박사는 정보전자소재연구소 컬러필터팀에서 근무하고 있다. LCD의 색을 내는 패널을 개발하는데 김 박사는 차세대 LCD 제조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LCD 화면을 자세히 보면 크기가 머리카락 두께보다도 작은 조각 즉 픽셀로 나눠져 있다. 맨눈으로 보면 반투명한 검은색 판이지만 확대해서 보면 마치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검은색 격자를 사이에 두고 빛의 3원색인 빨강(R), 초록(G), 파랑(B) 픽셀이 규칙적으로 배열돼 있다.

“픽셀 하나의 크기는 수십 μm(마이크로미터,
1μm=10-6m)로 머리카락 두께보다도 얇습니다. 현재는 반도체 식각에 쓰이는 방식으로 패널을 만들죠.”
즉 먼저 기판 전체에 검은색 안료를 바르고 패턴에 해당하는 부분에 빛을 쪼여주면 기판과 안료가 화학결합을 한다. 그 뒤 용매로 씻어내면 검은색 창틀 같은 패턴이 남는다. 그 뒤 빨간색 안료를 바르고 위의 과정을 반복한다. 녹색, 파란색도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4번에 걸쳐 색을 입히다보니 비용도 많이 들고 용매 때문에 환경오염에 대한 부담도 만만치 않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김 박사는 컬러 판화를 찍듯 색이 놓이는 위치에만 해당 색을 프린트하는 기법을 개발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안료도 아끼고 이를 씻어내는 과정도 필요 없기 때문에 생산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다.

아직까지 프린팅 기법으로 LCD 패널 생산을 상용화한 곳은 없다. “패널을 확대해보면 아직 세밀한 부분에서 결함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는 게 저희 과제죠.” 케임브리지대 박사과정에서 표면화학을 전공한 김 박사는 고체와 액체가 만났을 때 일어나는 다양한 표면현상을 연구했다. “기판이라는 고체에 안료를 분산시킨 액체를 찍는 과정을 조절하려면 물질의 물리적 특징을 이해해야 합니다. 동료 대부분은 화학자인데 저는 학부 때 물리학을 전공해 서로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봅니다.”

현재 프린팅 기법은 LCD 패널뿐 아니라 태양전지, 반도체 회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되고 있다. 김 박사는 우리나라야말로 프린팅의 원조라고 생각한다. 바로 인쇄술이 프린팅을 이용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수년 전 일본 과학자들이 프린팅의 역사에 대해 발표를 하는데 인쇄술을 논할 때 구텐베르크로 시작하더군요. 우리나라 직지심경이 70년이나 앞서있는데 말이죠.”

김 박사는 우리 선조들이 표면현상에 대해서도 탁월한 통찰력이 있었다고 말한다. 금속활자의 경우 그냥 먹을 칠하면 먹의 표면장력이 커 글자 위에 먹이 잘 퍼지지 않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피마자기름을 섞어 표면장력을 낮춘 ‘유연먹’을 써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

틈틈이 외국 작품 번역

김 박사가 ‘주중에는 연구, 주말에는 피아노’ 생활만 하는 건 아니다. 입사하자마자 LG화학기술연구원 직원들이 시골초등학교를 찾아다니며 과학체험학습을 지도하는 ‘주니어 공학기술교실’에 참여해 2년 동안 활동했다.
“아이들과 전자 기타를 만들었습니다. 막대기에 줄을 달고 이리 저리 전선을 연결하고 나서 소리가 울리자 아이들이 아주 좋아하더군요.”

지난해 말 태안반도 원유 유출 사고가 났을 때도 동료 연구원들에게 메일을 보내 20여명이 현지에 다녀오기도 했다. “화학 분야의 일을 하면서 유기용매 냄새에 익숙한 저희도 태안에 도착했을 때 밀려오는 석유 냄새에 움찔했습니다. 지금은 많이 회복됐다니 다행입니다.” 김 박사 일행은 만리포에 비해 방제 손길이 덜 미친 천리포에서 작업했다. “모래를 파보니 검은층과 흰층이 교차된 모습이 마치 ‘티라미슈 케익’처럼 보이더군요.”이번 사태로 환경을 생각하지 않는 과학과 기술은 존재할 수 없음을 절감했다고 한다.

이처럼 바쁜 와중에 김 박사는 틈틈이 아버지를 돕는 보조작가로도 활약하고 있다. 1992년 부산 해운대구에 세계 유일의 추리문학 전문도서관인 ‘추리문학관’을 열어 관장으로 있는 김성종 작가는 여전히 창작열이 왕성하다. 2006년에는 세계 최초로 미국의 911테러를 소재로 한 추리소설 ‘봄은 오지 않을 것이다’를 발표했는데, 김 박사는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911테러 관련 정보를 수집한 뒤 번역해 아버지에게 제공했다고 한다.

또 영미권의 문화나 사회에 대해서도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김 박사는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을 존경한다. “오바마 후보가 이렇게 유명해지기 전 그의 자서전 ‘Dreams from My Father’를 읽고 감명을 받아 번역할까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서가 나왔더군요.” 이처럼 과학과 예술, 정치까지 인류가 이뤄놓은 문화 전반에 관심이 많은 김 박사는 누구보다도 알차게 삶을 살아온 게 아닐까.
“요즘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KBS교향악단 같은 곳과 협연을 할 기회가 올지도 모르죠.” 이 한곡에 희로애락 같은 인생의 모든 측면이 담겨있다며 김 박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재치만발 돌발문답 3
소설보단 피아노가 쉬워


1. 김정원이나 임동혁 같은 연주자를 보면서 중학교 때 피아노를 그만둔 걸 후회한 적은 없었나?
가끔은 예고 진학을 포기한 걸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 길로 갔다면 피아노 연주자로 성공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곡가가 되지 않는 이상 무언가를 창조하는 삶을 살지는 못할 것이다. 과학자는 세상의 법칙을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것을 만드는 창조적인 직업이다. 따라서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

2. 주말을 바쳐가면서까지 피아노를 계속하는 건 연주자로 데뷔하려는 생각도 있는 게 아닌가?
솔직히 그렇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도 온 영국 성악가 폴 포츠는 휴대전화 판매원을 하면서도 노래연습을 계속했고 그래서 기회를 잡았다. 나도 1년 내내 연습한다면 협연을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지 않을까?

3. 아버지 김성종 작가는 유명한 추리소설가다. 소설을 쓸 생각은 없는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창작 과정을 지켜보고 무척 힘든 일이라는 걸 알았다. 소설은 허구지만 개연성이 있어야 독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으므로 끊임없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나로서는 소설 창작은 엄두가 안 나고 대신 번역에는 관심이 많다.

생생현장 따라잡기
LG그룹 회장 앞에서 솜씨 발휘


피아노를 조금 칠 줄 안다는 것이 ‘예기치’ 않는 일을 낳기도 한다. LG그룹은 매년 연구개발 분야에서 우수한 업적을 낸 팀을 뽑아 시상하는데 올해는 지난 4월 내가 일하고 있는 LG화학기술연구원에서 시상식이 열렸다. 그런데 행사 며칠 전에 본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저, 김 박사님이시죠?”
“그런데요.”
“이번에 기술원에서 연구개발상 시상식이 열립니다.”
나는 사뭇 긴장했다. ‘혹시 내가 지난 5년간 몸담았던 프린팅 연구가 드디어 결실을 보나?’ 그런데 웬걸, 다음 말이 걸작이었다.
“그날 피아노 연주 좀 해 주세요.”
실망이었다. 하지만 나 같은 조무래기가 그룹 회장님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을 또 언제 뵈랴. 그래서 결국 공연제의를 수락했다. 공연에 앞서 연주할 곡을 소개하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여기서 내가 잠깐 다른 이야기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연구원이 왜 음악을 하냐고 묻습니다. 음악은 제게 다양한 시각을 갖게 해 줍니다. 이런 다양한 시각을 가졌던 사람은 비단 저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를 창립하셨던 구인회 창업주께서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오늘은 비록 연주자의 한 사람으로 이 자리에 섰지만 다음엔 수상자의 한 사람으로 이 자리에 설 것을 약속드립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나는 그날 연주보다도 내가 한 이 멘트 때문에 회사에서 유명해졌다. 부산의 한 작은 점포에서 여성용 크림을 사기그릇에 넣어 팔다가 이것이 잘 깨지는 걸 고민하던 구인회 창업주는 플라스틱 용기를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룹의 모태인 ‘락희화학공업사’(현재 LG화학)가 탄생한 배경이다. 또 당시 ‘미제’ 일색이었던 트랜지스터라디오를 국내 최초로 만들어 팔기 시작하면서 ‘금성사’(현재 LG전자)를 태동시켰다. 그는 다양성을 추구했고 새로운 아이디어에 과감히 투자한 우리나라 최초의 벤처기업가였다.

대학원생 두 명이 차고에서 시작해 시가총액 150조원의 종합검색업체로 성장한 ‘구글’과 매킨토시의 실패로 자기 회사에서 쫓겨났다 애니메이션 회사 ‘픽사’로 영화업계를 평정하고 복귀해 ‘아이팟’을 세계에 유행시키며 재기에 성공한 ‘애플’의 스티브 잡스의 예에서 보듯이 모험심과 투지, 그리고 개척정신이야말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필요하지 않을까.

2008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대전=강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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