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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 맛 결정하는 ‘황금비’

떫은맛은 사라지고 단맛과 신맛은 절묘한 조화

빨갛게 잘 익은 사과에 절로 손이 간다. ‘수확의 계절’ 가을에는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과일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누구나 한 번쯤 과일을 산 뒤 겉보기에 맛있을 것 같은 과일이 생각과 달라 후회한 경험이 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처럼 과일을 고르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과일의 ‘외모’다. 최근 일부 대형마트에서는 당도측정계로 당도를 확인하거나 시식을 한 뒤 과일을 구입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윤택이 흐르고 색이 선명한 과일을 선호한다. 눈으로 먼저 ‘맛’을 보고 과일을 고르는 셈이다. 어떤 과일이 맛있는 과일일까. 과일의 속살을 들여다보자.

 


‘거무튀튀한’ 사과가 맛있다?


과일의 색을 좋게 하려면 과일을 재배할 때 일정기간 봉투를 씌워 햇빛을 막아야 한다. 엽록소 생성을 막기 위해서다. 과일이 익어가며 본래의 색을 나타내는 과정은 단풍이 드는 과정과 비슷하다. 단풍잎은 녹색의 엽록소가 파괴된 뒤 숨어있던 붉은색과 노란색이 나타난 것이다. 이 색들은 안토시아닌이나 카로티노이드 같은 색소가 만든다.

봉투로 햇빛을 차단하면 과일 표면의 엽록소가 줄어든다. 성숙기가 되면 과일은 자연히 기체 형태의 식물 호르몬인 에틸렌(C2H4)을 발생시켜 엽록소를 파괴하고 안토시아닌이나 카로티노이드를 활성화한다. 그런데 이때 봉투를 씌워 엽록소가 줄어든 사과나 포도는 색이 더 선명해진다.

그러나 햇빛을 차단하는 일은 과일에게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햇빛을 차단하면 과일의 성숙이 지연돼 당도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 윤익구 박사는 “봉투를 씌우면 과일의 색이 고르고 병충해 피해를 덜 받는다”며 “표면이 매끈해 보기에는 좋지만 당도가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유기산과 비타민 함량도 낮아져 봉지를 씌우지 않은 사과에 비해 맛이 떨어진다. 윤 박사는 “맛있는 사과를 고르려면 겉보기에만 좋은 것보다는 껍질이나 표면이 다소 거칠어도 자연 그대로 약간 거무튀튀한 색을 띠는 사과를 고르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할 과일이 또 있다. 포도를 잘 살펴보면 하얀 가루가 묻어 있는 경우가 있다. 일반적으로 이 가루를 보고 농약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가루는 포도가 함유한 당분이 밖으로 나와 굳은 과분(果粉)이다. 과분에는 몸에 좋은 효모가 많아 포도주를 담글 때도 도움이 된다. 하얀 가루가 많은 포도는 최상등급으로 분류돼 가장 비싼 가격에 팔린다.

과일의 맛이나 성분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지만 보기에 안 좋다는 이유로 팔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배에서 일어나는 ‘동녹’과 ‘과피흑변’이다. 동녹은 황금배와 같이 껍질이 황금색으로 변하는 배가 성숙기 동안 비나 바람에 의해 입은 작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며 생긴 얼룩이다. 쇠가 녹슬 때 색이 적갈색으로 변하는 현상과 비슷하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과피흑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신고배에서 많이 발생하는데, 배를 0°C 가까운 온도에 보관할 때 껍질에 있는 페놀류 물질이 저온에 반응해 검은색으로 변하며 나타나지만 맛과 영양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신맛과 떫은맛 사라지는 건 생존전략


그렇다면 맛있는 과일은 어떤 과일일까. 먹었을 때 달다고 느끼는 정도는 과일마다 다르다. 일반적으로 사과는 당도가 12°Bx(브릭스, 1°Bx=과일 100g에 녹아 있는 당분 1g) 이상이 돼야 맛이 좋다. 배는 12~15°Bx, 복숭아는 10~12°Bx, 포도는 15~16°Bx이어야 달다고 느낀다.

하지만 달기만 하다고 무조건 맛있는 과일은 아니다. 설탕을 한 스푼 가득 떠먹었을 때 맛있다고 느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단맛과 신맛이 적당히 조화를 이뤄야 좋은 맛을 낸다. 이런 황금비율을 당산비(당함량/산함량)라 한다. 사과의 경우 가장 달다고 느끼는 종은 당산비가 41 이상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사과인 후지는 당산비가 36 정도다.



그런데 당과 산의 함량은 과일이 익는 과정에서 계속 변한다. 일반적으로 과일은 초기에 산이 많아 신맛이 강하지만 익어 가면서 산이 줄어들어 수확기에는 먹기에 가장 좋은 양만큼만 남는다. 반면 당분은 초기에는 거의 없다가 수확기에 급격히 늘어난다. 과일에 포함된 탄수화물이 당분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과일 대부분은 수분 다음으로 탄수화물을 많이 갖고 있다. 사과의 약 85%가 수분이고 11~14%가 탄수화물이다. 신맛을 내는 사과산과 구연산은 0.2~0.8%가 들어 있다. 과일이 성숙하면서 탄수화물은 분해돼 포도당과 과당으로 변한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탄수화물이 당으로 변할 때 중심부가 먼저 변한 뒤 껍질 쪽은 나중에 당으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아직 덜 익은 풋사과를 먹을 때 껍질 부근보다 씨앗이 있는 중심부가 더 달콤한 이유다. 단것을 좋아하는 해충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단맛을 안에 ‘품고’ 있다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과일이 성숙하면서 일어나는 또 다른 변화는 떫은맛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떫은맛은 탄닌이라는 폴리페놀 성분이 혀 점막의 단백질과 수소결합을 해 점막이 수축될 때 느끼는 일종의 감각이다. 떫은맛이 사라지는 이유는 탄닌이 알데히드, 펙틴과 결합하며 고분자물질로 변해 물에 녹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혀는 탄닌과 결합하지 못하기 때문에 떫은맛을 느끼지 못한다.

과일이 뒤늦게 단맛이 생기고 신맛과 떫은맛이 사라지는 이유는 뭘까. 당분 함량이 낮고 떫은맛을 내는 과일은 맛이 없기 때문에 새나 곤충도 잘 먹지 않는다. 과일이 완전히 성숙할 때까지 보호하려는 자연의 섭리가 숨어 있는 셈이다.

 


단감을 연시로 만드는 에틸렌


과일을 더 달콤하게 만들 방법은 없을까. 2006년 미국 조지아대 케시 테일러 교수는 과일의 당분을 높일 수 있는 독특한 방법을 고안했다. 나무껍질을 한 줄 벗긴 뒤 허리띠와 같은 플라스틱 띠로 나무를 묶어 당분의 이동통로인 체관을 압박하는 것. 대부분의 과일 나무는 당분의 일부를 저장하기 위해 뿌리로 이동시킨다. 그런데 이렇게 체관을 압박하면 당분이 뿌리로 내려가지 못하고 대부분 열매로 이동한다.

‘키 큰 사람이 싱겁다’는 말도 과일에겐 맞지 않다. 일반적으로 크기가 큰 과일은 더 많은 양분과 당분을 포함하고 과육도 부드러운 경우가 많다. 배나 사과를 자르면 안쪽에 씨가 있는 과심이 있다. 과심은 종자를 보호하고 광합성에서 받은 양분을 전달하는 통로 역할을 하는 부분인데, 딱딱해서 거의 먹지 않는다.



그런데 과심은 과일 크기와 상관없이 같은 품종 사이에서 크기가 모두 비슷하다. 결국 과일이 커지면 그만큼 먹을 수 있는 부분이 커지는 셈이다.


과일 크기는 세포 수와 세포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과일은 꽃이 핀 뒤 2달이면 세포 수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 이때부터는 세포의 부피가 커진다. 그래서 과일을 크게 만들려면 미리 세포 수를 늘려야 한다.


경기도농업기술원 박건환 연구사는 “당도도 높고 크기도 큰 과일을 만들려면 꽃이 핀 뒤 꽃의 수를 적당히 줄이거나 한 가지에 열리는 과일의 수를 조절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른바 양분 ‘몰아주기’인 셈이다. 꽃과 과일 수를 줄이면 하나의 과일에 더 많은 영양분과 당분을 전달할 수 있다.

과일이 익어가는 동안 발생하는 에틸렌도 과일의 맛을 좋게 한다. 에틸렌은 세포벽 구성물질인 펙틴을 분해하는 효소를 활성화시켜 과일을 무르게 만든다. 딱딱하던 단감이 연시가 되는 이유도 에틸렌이 세포벽을 분해하기 때문이다. 가령 덜 익은 바나나에 에틸렌을 쐬어주면 녹색이던 바나나가 노랗게 변하며 당분 함량이 올라간다.

그러나 에틸렌은 과일의 노화도 촉진한다. 일반적으로 잘 익은 과일은 에틸렌을 많이 발생시킨다. 특히 사과는 에틸렌 발생량이 많은 과일이다. 표면에 상처가 생긴 과일이나 물러지기 시작한 과일도 에틸렌 발생량이 많다.

이런 과일은 주변의 다른 과일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따로 보관해야 한다. 사과 한 개가 상하면 주변의 다른 과일이 연이어 무르거나 썩는 이유도 사과가 내놓은 에틸렌이 노화를 촉진하기 때문이다. 배처럼 원래 에틸렌 발생량이 적은 과일은 사과와 같이 저장하면 금방 상한다.

 


사과의 탄수화물이 당분으로 변하는 과정



탄수화물에 요오드 용액을 떨어뜨리면 남색으로 변한다. 탄수화물(남색)이 당(하얀색)으로 변할 때 사과의 중심부가 먼저 당으로 변한 뒤 껍질 쪽은 나중에 변한다. 사과가 익을수록 중심부터 당분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1~6 차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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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이준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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