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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8일 포항의 날씨는 그야말로 찜통더위. 블록공중합체 자기조립 연구단을 찾아 포스텍 캠퍼스를 가로질러 오느라 헉헉거리는 기자에게 시원한 음료를 내밀면서 김진곤 단장은 웃음 지었다. 사실 지구에 닿는 태양 에너지 1시간 분량이면 1년 동안 인류가 쓰는 에너지를 충당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화석연료에 의지하고 있는 우리는 고유가에 몸살을 앓고 있다. 지천에 널려있는 태양에너지를 그저 바라만 보는 이유는 아직까지 화석에너지보다 경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유가가 급등해 비용 차이가 많이 좁혀졌고, 태양에너지를 이용하는 기술이 좀 더 발전한다면 경제성 측면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기술 가운데 하나가 이번에 블록공중합체 자기조립 연구단이 개발에 성공한 고밀도 나노막대 제조 기술이다.
알아서 기둥 만드는 고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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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단이 만든 나노막대 하나의 지름은 머리카락의 4000분의 1에 불과한 20nm(나노미터 1nm=10-9m)이고 길이는 100nm 정도다. 이런 막대를 빽빽이 배열했는데 1cm2 당 1000억~1조개나 된다. 전자현미경으로 찍은 나노구조물 표면 사진을 보면 넓적한 빗 판 위에 빗살이 촘촘히 꽂혀있는 모양이다. 도대체 어떻게 나노막대를 이렇게 많이 꽂을 수 있을까? 1초에 10개를 꽂을 수 있다면(나노막대를 집어서 꽂을 수 있는 도구가 있다고 가정하고) 1조 개를 꽂으려면 1000억 초, 즉 3170년이나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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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막대가 빽빽이 꽂혀 있는 전자현미경 사진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기자에게 김 단장이 미리 준비한 자료를 내민다. ‘블록공중합체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라는 제목의 인쇄물로 블록공중합체 자기조립 연구단의 연구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자기조립이라면 블록공중합체가 스스로 어떤 구조를 만든다는 말일까?
“맞습니다. 블록공중합체라는 고분자가 스스로 조립돼 나노기둥을 만들 수 있는 틀이 됩니다.”
중합체 즉 고분자는 작은 단분자 수백~수천 개가 서로 연결된 사슬 같은 모양을 한 구조다. 칫솔부터 페트병까지 널리 쓰이는 플라스틱은 모두 중합체로 이뤄져 있다. 생명체의 정보를 담고 있는 DNA나 RNA 사슬도 물론 중합체다.
블록공중합체란 두 가지 이상의 중합체가 서로 연결돼 있는 특별한 경우. DNA 사슬 한쪽 끝에 RNA 사슬이 붙어있다면 DNA-RNA 블록공중합체가 되는 셈. 블록 즉 덩어리는 한 가지 분자로 이뤄진 중합체 부분을 말한다. 그런데 왜 굳이 번거롭게 블록공중합체를 만들까? 두 가지 중합체를 따로 만들어 섞어주면 되지 않을까?
“블록공중합체의 유용성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서로 성질이 다른 둘 또는 그 이상의 중합체를 떨어지지 못하게 꼭 붙여놨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 독특한 나노구조물을 만들죠. 이런 상태가 더 안정하기 때문입니다.”
물을 좋아하는 중합체와 물을 싫어하는 중합체가 서로 붙어있는 블록공중합체를 생각해보자. 만일 이들이 따로 따로 중합체를 이루고 있다면 서로 섞이지 않고 비중에 따라 두 층으로 분리될 것이다.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들이 분자차원에서 블록공중합체로 서로 묶여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 중합체를 이루는 단위 분자의 모양이나 한 블록이 차지하는 부피에 따라 여러 구조가 나올 수 있다.
예를 들어 A, B 두 블록의 크기가 비슷한 블록공중합체(A-B)는 서로 나란히 배열해 판을 만드는 경향이 크다. 이 판이 위아래가 뒤집힌 판과 서로 맞닿아 있는 층상구조가 된다. 서로 같은 블록 단위끼리 가까이 있어야 더 안정하기 때문이다. 블록공중합체 크기는 보통 10~50nm이므로 이렇게 만들어진 구조는 바로 나노구조물이 된다. 블록의 구조나 크기를 조절하면 다양한 형태의 나노구조물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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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산으로 만든 나노 거푸집
연구단에서는 이처럼 다양한 구조를 보이는 여러 블록공중합체를 만들었다. 연구단 실험실은 여러 팀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 중 한 곳이 블록공중합체를 합성하는 실험실이다. 이곳은 여느 유기화학합성 실험실과 비슷한 분위기가 난다. 이번에 나노막대를 만들 때 이용한 ‘폴리스틸렌 폴리메틸메트아크릴레이트 블록공중합체’(PS-b-PMMA)도 실험실에서 직접 만들었다.
표면을 플라스틱으로 코팅한 유리기판 위에 단일중합체인 폴리메틸메트아크릴레이트(PMMA)와 블록공중합체(PS-b-PMMA)를 적당한 비율로 혼합해 코팅하면 스스로 가장 안정한 구조를 만든다. 즉 PMMA 기둥을 PS-b-PMMA가 둘러싼 형태가 나온다. 이렇게 만든 뒤 PMMA만 선택적으로 녹이는 초산에 담그면 PMMA가 녹으며 빠져나가 기둥 자리가 빈다. 나노 거푸집이 만들어진 셈이다.
이 자리에 전도성 고분자인 폴리피롤을 만들어 빈 공간을 채운다. 석고 틀 속에 석고를 부어넣는 것과 마찬가지다. 끝으로 유기 용매인 톨루엔을 뿌리면 기둥을 둘러싸고 있는 PS-b-PMMA가 녹아내리고 전도성 고분자 폴리피롤로 된 나노기둥만 남는다. 결국 블록공중합체는 나노구조물을 만들기 위한 틀로 쓰인 셈이다.
“이렇게 나노막대를 만들면 매끈한 필름일 때보다 표면적이 훨씬 늘어납니다. 게다가 20nm 지름 안에서 전도성 고분자 막대기가 자라기 때문에 전도성 고분자 사슬이 막대방향으로 아주 잘 배열돼 전기전도도가 높아지는 것이지요.”
이처럼 블록공중합체는 다양한 나노구조를 만들 수 있게 하는 틀로써도 쓸모가 많다. 연구단이 블록공중합체를 이처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노련한 조련사의 경지에 오르게 된 데에는 그 동안 블록공중합체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단을 시작하기 전인 지난 2002년 김 교수팀은 특정한 온도 범위에서만 나노구조를 갖는 블록공중합체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 ‘네이처 머트리얼스’에 실었다. ‘PS-b-PnPMA’라고 불리는 이 물질은 상온에서는 별다른 구조를 띠지 않지만 138.7℃가 넘으면 스스로 나노구조를 형성하고 224.1℃를 넘으면 다시 무질서해진다.
김 단장은 “이처럼 새로운 특성을 발견한 것을 비롯해 지금까지 블록공중합체 연구에 많은 진전이 있었다”면서도 “블록공중합체 점성을 비롯한 물성을 예측하는 이론이 아직 나와 있지 않은 상태”라고 덧붙였다. 앞으로 연구단이 도전해야할 과제 역시 만만치 않다며 김 단장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인터뷰_김진곤 단장
기초 튼튼해야 혁신적 연구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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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개월 전 목디스크 증상이 생겨 한동안 고생했다는 김 단장은 박사과정 때부터 20여년 간 블록공중합체 연구에 매달려온 이 분야의 전문가다. 최근 ‘매크로모리큘러 리서치’라는 고분자 분야 저널에 ‘자기조립 블록공중합체: 덩어리에서 얇은 막으로’라는 제목의 26쪽짜리 리뷰논문을 싣기도 했다.
“이 분야를 제대로 연구하려면 화학은 물론 물리학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다보니 공부해야 할 게 끝이 없네요.”
김 교수는 나노분야 뿐 아니라 그 기초가 되는 양자 이론 강의도 맡고 있다. 학생들도 물리학과나 화학과에 개설된 강좌보다 그의 강의를 더 좋아한다고. 그래서인지 김 교수팀은 실험 결과를 이론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연구단의 연구결과가 고분자 분야 저널 뿐 아니라 권위있는 물리학 저널인 ‘피지컬 리뷰 레터스’같은 곳에도 실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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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효율적인 약물전달장치를 만드는데도 나노구조물이 쓰일 수 있다. 일정량의 약물이 나오는 약물전달장치를 몸속에 넣으면 당뇨병 환자도 6개월은 인슐린 걱정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일정량이 나오게 하는 게 무척 어렵다는 것. 현재 연구단은 약물보다 지름이 1.6~ 1.8배쯤 되는(7~8nm) 나노 기공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일정량씩 나오는 걸 떠올리면 됩니다. 현재 동물을 대상으로 효과를 실험하고 있습니다.”
블록공중합체 실용화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김 단장의 열정이 한 여름 더위보다 뜨겁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