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체는 뭘까? 정답은 원자 한 개다. 원자는 전자를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일렬로 나열하면 전기가 흐른다. 1995년부터 원자를 도선으로 사용하는 나노전기회로 실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최근에는 삼성전자를 포함한 국내외 여러 기업이 회로선폭을 수소원자 지름의 3 배인 0.3nm(나노미터, 1nm=10억분의 1m)까지 줄이는 데 도전하고 있다. 회로선폭을 줄이면 고집적 고효율의 차세대 반도체를 만들 수 있다. 원자가 가진 전자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면 ‘꿈의 컴퓨터’로 불리는 양자컴퓨터도 만들 수 있다.
‘파동-입자 이중성’의 새로운 발견
KAIST 양자전도이론연구실은 1nm~1μm(마이크로미터, 1μm=100만분의 1m)의 미시세계에서 전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연구한다. 미시세계에서 전자는 양자역학을 따르기 때문에 거시세계에서와 다르게 움직인다. 예를 들어 도체에서 전압과 전류는 비례하기 때문에(옴의 법칙) 전압을 높이면 전류가 증가한다. 그러나 나노미터 같이 작은 세계에서 전압을 높이면 전류가 계단식으로 증가한다.
양자전도이론연구실 심흥선 교수와 박사과정 윤석찬 씨는 전압을 높일 때 전자가 지닌 파동과 입자의 성질이 계속 바뀐다는 연구 결과를 물리학 분야 권위지인 ‘피지컬 리뷰 레터스’ 5월 16일자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반도체에 사용되는 도선에걸리는 전압 변화 따라 간섭무늬가 점점 작아져서 완전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현상을 관측했다. 파동-입자 이중성에 따르면 전자는 파동처럼 행동하다가도 전자의 위치를 확인하는 순간 야구공과 같은 입자의 성질을 갖는다.
대부분 과학자들은 전압을 높이면 전자의 입자성이 더 강해질 것으로 예상했다. 전자들 사이에는 척력이 작용하는데 전압을 높여 도선에 흐르는 전자가 많아지면 전자 사이에 작용하는 힘이 커진다. 따라서 전자가 서로의 위치를 파악하기 쉬워져 입자성이 커지는 원리다.
그러나 심 교수팀의 연구에서는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왔다. 반도체에 사용되는 가는 도선의 전압을 10-5eV(전자볼트)까지 높일 땐 전자의 입자성이 강해져 파동이 갖는 특성인 간섭무늬가 사라졌다. 그런데 전압을 조금 더 높였더니 파동성이 강해져 간섭무늬가 다시 나타났고 초기 전압의 3배로 높이자 간섭무늬가 다시 사라졌다. 이 현상은 파동-입자 이중성을 단순히 적용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
심 교수는 “이번 발견이 양자효과가 크게 나타나는 저온상태에서 전자의 움직임과 특성을 밝히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고온에서는 전자의 운동에너지가 증가해 활발히 움직이기 때문에 양자효과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양자컴퓨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전자의 움직임과 양자효과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전압의 크기에 따라 파동성과 입자성을 보이는 전자의 특성을 이해하는 일이 양자 컴퓨터를 개발하는 데 출발점인 셈이다.
이런 연구 성과를 내기까지 철저히 개인 연구를 요구하는 심 교수의 독특한 지도방식이 한 몫 했다. 심 교수는 학생마다 다른 연구 과제를 준다. 대부분의 연구실이 한 연구 과제에 연구원을 여러명 배치해 시너지 효과를 내는 방식과는 정반대다.
“수학 문제를 같이 풀면 실력이 늘지 않아요.”
특정 물리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떠올려 시스템을 고안하고 수치를 해석하는 이론 물리학은 수학 문제를 푸는 과정과 비슷하다.
“개인이 하나의 주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연구하는 경험을 쌓아야 독립적인 이론 물리학자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양자전도이론연구실 연구원들은 며칠씩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일도 많다. 개별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생활패턴이 모두 달라졌기 때문이다. 박사과정 이승섭 씨는 “밤새 연구를 하다 아침에 집으로 들어가며 동료의 얼굴을 잠깐 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 달에 한 두 번씩 진행하는 자체 세미나와 발표는 오랜만에 연구원들이 다 모이는 자리이자 다른 연구원들의 연구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이다. 이론 물리학 분야 최신 연구를 한자리에서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전자처럼 양자 물리학에 분야에서 ‘톡톡’ 튀는 성과를 내기 위해 양자전도이론연구실은 오늘도 밤새 불을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