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다윈도 깜짝 놀랄 부리의 진화

먹이 따라 부리 모양도 가지각색

먹이를 먹을 때 뿐 아니라 털을 다듬거나 둥지를 짓고 적과 싸우거나 짝짓기를 할 때도 없어서는 안 되는 새의 기관은?

답은 부리다. 날개와 함께 새를 규정하는 중요한 신체기관인 부리는 ‘다용도칼’처럼 새가 생존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일들을 도맡고 있다. 조그만 참새 부리부터 커다란 황새 부리까지 크기와 모양도 가지각색이다. 이 모두는 종의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한 진화의 결과. 부리는 다공성 턱뼈 위에 케라틴 성분의 얇은 뿔 같은 층이 덮여있는 기관이다. 하늘을 날아야하므로 육상 동물처럼 속이 꽉 찬 뼈로 이뤄졌다면 무게중심이 안 맞아 날아오르기도 전에 앞으로 꼬꾸라질지도 모른다. 새 얼굴의 매력 포인트인 부리의 천태만상을 들여다보자.
 

40년 탐사 끝에 남미 베네수엘라에서 발견된 뒷부리숲새(수컷).


대나무 쪼개기 편한 뒷부리

지난 2004년 남미 베네수엘라의 숲속에서 희한한 생김새를 한 새가 발견됐다. ‘뒷부리숲새’(recurve-billed bushbird)가 그 주인공. 부리를 위아래로 뒤집어 붙인 모습의 뒷부리숲새의 존재가 처음 확인된 건 1965년 남미 콜롬비아다. 당시 안데스 산맥의 한 숲에서 이 새를 봤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그 뒤 40여 년 동안 콜롬비아 숲을 뒤졌지만 새를 찾는데 실패했다. 그러다 2004년 영국 매세이대 조류학자 크리스 샤페 교수가 이끄는 탐사대가 콜롬비아와 안데스 산맥으로 이어져있는 베네수엘라의 한 숲에서 마침내 발견한 것. 탐사대는 말로만 듣던 숲새의 부리를 보고 경악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녀석들은 어떻게 이런 부리모양을 하게 됐을까.

콜롬비아대 게리 스틸레스 연구팀은 숲새의 부리모양은 대나무 대 속에 살고 있는 벌레를 효과적으로 잡아먹기 위한 형태라고 2007년 ‘콜롬비아 조류학’지에 보고했다. 연구자들은 숲새가 살고 있는 대나무 종류인 ‘카리조’ 숲을 면밀히 관찰했다. 카리조 줄기는 속이 비어있는데 건기에도 물을 머금고 있어 벌레들의 안식처다. 뒷부리숲새는 커다란 엄지발가락으로 사람이 손으로 잡듯이 대나무대를 꼭 잡고 버티고 서서 부리로 줄기에 구멍을 낸 뒤 부리를 집어넣고 낫질을 하듯이 위로 쳐서 줄기를 쪼개 안에 숨어있는 벌레를 잡아먹었다. 윗부리가 둥그렇고 아래쪽으로 휘어진 형태보다 폭이 좁고 일자로 곧게 뻗은 형태가 이런 방식에는 훨씬 효과적인 셈. 윗부리는 휘는 방향이 바뀌었지만 당연히 콧구멍은 여전히 남아있다.

우리나라에도 부리가 위로 휘어진 새가 있다. 뒷부리도요나 뒷부리장다리물떼새가 그 주인공. 이 녀석들은 부리가 얇고 길어 뒷부리숲새처럼 ‘사진조작’ 같은 느낌이 들 정도는 아니지만 특이한 형태임은 분명하다. 뒷부리장다리물떼새가 긴 부리를 물에 담그면 위로 휘어진 부리 앞쪽이 물과 거의 수평하게 잠기는데 물떼새는 부리를 좌우로 움직여 얕은 물에 사는 갑각류나 곤충을 잡아먹는다.

공중제비의 유래

무협영화의 주인공들은 공중제비를 식은 죽 먹기처럼 한다. 보통 사람은 공중제비 즉 텀블링을 한 번 하고나면 별이 보일 정도로 어질어질하다. 공중제비란 말은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제비를 보고 만든 말. 지금은 도심에서 제비를 거의 볼 수가 없지만 예전에 제비가 흔했을 때는 골목길을 돌다가 갑자기 날아드는 제비에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제비는 이런 놀라운 비행솜씨 덕분에 날아다니는 벌레들을 공중에서 사냥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비행고수라도 부리가 좁고 많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벌레를 놓치기 쉬울 것이다. 조류학자인 국립환경과학원 박진영 박사는 “제비의 부리는 옆에서 보면 짧지만 정면에서 보면 넓적하게 생겼고 크게 벌릴 수 있어 벌레를 잡을 수 있는 확률을 높였다”며 “부리 옆에는 빳빳한 털이 나있어 비행 중에 여기에 걸린 날벌레들도 잡아먹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도심에서 제비를 볼 수 없는 것도 이런 먹이포획 습성 때문이다. 제비가 맘껏 날 수 있는 공터가 점점 줄어드는데다 물웅덩이나 수풀 같은 날벌레 서식처가 거의 사라져 결국 제비가 떠나게 된 것.

반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텃새인 참새는 도심에서도 아직까지는 종종 볼 수 있는데 특정한 먹이를 아주 효과적으로 먹게 부리가 진화한 대신 다양한 먹이를 먹을 수 있게 ‘절충한’ 형태라서 환경변화에 적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 박사는 “참새 부리는 끝이 약간 뾰족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약간 두툼한 모양을 하고 있다”며 “그 결과 봄에서 가을 사이에는 주로 벌레(부리가 뾰족할수록 유리)를 먹고 가을에서 봄까지는 주로 식물의 씨앗(부리가 두툼할수록 유리)을 먹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참새가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 텃새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다.

부리가 두꺼워 무는 힘이 강한 대표적인 새로는 앵무새를 들 수 있다. 앵무새는 호도 같은 견과류도 깨뜨려 먹을 수 있다. 철사를 끊거나 구부리는 공구인 펜치 옆모습이 앵무새 얼굴을 닮은 게 우연은 아니다.
 

위아래가 어긋난 솔잣새 부리는 솔방울 속 씨앗을 먹는 데 유용하다.


‘주걱’ 부리 저어새 비웃지마라!

공구도 용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있듯이 부리도 먹이 종류에 따라 극단적인 형태를 띠기도 한다. 윗부리와 아래부리가 서로 엇갈린 솔잣새가 대표적인 예. 솔잣새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소나무나 잣나무의 씨앗을 먹고 산다. 그런데 씨앗이 솔방울 속에 박혀있기 때문에 평범한 부리라면 솔방울 껍질을 뜯어내고 나서 안의 씨앗을 부리로 집어먹어야 한다. 반면 솔잣새는 껍질 틈 사이에 부리를 박고 나사처럼 돌려 속으로 밀어 넣어 열매를 먹는다. 그럼에도 사람의 눈에는 마치 덧니가 난 것처럼 보여 부자연스럽고 새도 불편할 것 같다.

“사람의 시각에서 보면 굉장히 불편해 보이는 부리 모양도 해당 종에게는 생존에 유리한 구조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박진영 박사는 또 다른 예로 저어새를 든다. 기다랗고 끝이 넓적한 주걱 같은 부리가 달린 저어새는 같은 황새목에 속하는 우아한 황새와 비교하면 다소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넓적한 부리가 얕은 물에 사는 물고기나 갑각류를 잡아먹을 때는 무척 유용하다. 부리를 물에 담궈 좌우로 휘젓다가 부리에 닿은 물고기를 얼른 잡아 먹는데는 끝이 뾰족한 부리보다 넓적한 부리가 안성마춤이다. 박 박사는 “최근 개체수가 급감한 저어새를 보고 원시적인 부리 형태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며 “저어새의 부리가 정말 생존에 불리했다면 이미 멸종해버렸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주로 강 하구나 갯벌을 서식처로 삼는 저어새가 사람의 활동으로 삶의 터전이 줄어들며 위기를 겪는 것이라고.

남미에 서식하는 큰부리새도 극단적인 부리진화의 일면을 보여준다. 몸의 절반이 부리일 정도로 커다란 부리는 가분수의 전형이다. 만일 부리가 포유류의 뼈처럼 속이 꽉 찼다면 큰부리새는 제대로 서지도 못할 것이다. 큰부리새는 밀림 속에서 과일을 먹고 사는데 빽빽한 잎을 헤치고 과일에 접근하는데 커다란 부리가 유용하다. 물론 부리 속은 대부분 텅 비어있다.
 

산까치는 발과 부리를 이용해 다양한 매듭을 만들어 완벽한 집을 짓는다. 산까치가 만든 매듭 5가지.


손보다 섬세한 산까치 부리

부리는 먹이를 먹는 것 말고도 다양한 역할을 한다. 손대신 부리를 놀려 정교한 매듭을 짓는 산까치(weaver)가 대표적인 예. 매듭을 엮어 만든 산까치 집은 바구니 공예 작품처럼 보일 정도로 완벽하다. 건축과 환경 분야 저술가인 존 니콜슨은 그의 책 ‘동물 건축가’에서 “산까치는 동물의 세계에서 가장 솜씨 좋은 건축가”라며 “이들은 풀 한 가닥을 다리로 잡고 부리로 다른 풀을 물어 매듭을 만들어 낸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산까치가 집을 만들 때 쓴 매듭을 보면 ‘매듭 강사’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다.

우리나라 천연기념물인 황새는 커다란 부리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친척뻘인 백로나 두루미보다 큰 먹이를 먹을 수 있다. 그런데 황새의 부리는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로 소리를 내는 기관. 황새는 울대가 없기 때문에 목에서 소리를 낼 수 없다.
대신 커다란 부리를 “딱딱” 맞부딪쳐 소리를 낸다. 황새 연구가인 한국교원대 생물교육과 박시룡 교수는 “황새는 구애를 하거나 자기 영역을 방어할 때 부리를 부딪쳐 독특한 패턴의 소리를 낸다”고 설명했다. 사람으로 치면 손뼉을 쳐서 신호를 보내는 셈이다. 한편 부리끝 부분까지 신경이 퍼져있어 부리에 닿는 것들을 지각한다. 박 교수는 “황새는 부리 끝으로 맛을 안다”며 “뿌연 물속에 있는 먹이를 잡으려면 부리가 민감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윈 진화론을 이해하는 열쇠

1835년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에 도착한 26세의 찰스 다윈은 먹이 종류에 따라 14종의 핀치 부리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윈의 핀치’로 불리는 이 새에 대한 관찰은 다윈이 훗날 ‘종의 기원’에서 자연선택에 따른 진화론을 펴는데 영감을 줬다.

갈라파고스 군도의 작은 화산섬인 다프네섬에서 33년 동안 핀치를 연구하고 있는 부부 조류학자인 미국 프린스턴대의 피터 그란트 교수와 아내 로즈마리 그란트는 2006년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서 다윈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짧은 시간 안에 부리가 진화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소개했다. 연구자들이 처음 다프네섬에 발을 들였을 때는 주로 씨앗을 먹는 중간크기의 땅 핀치와 선인장의 열매와 꽃가루를 주식으로 삼는 선인장 핀치 두 종류가 살고 있었다. 땅 핀치는 부리가 두툼하고 선인장 핀치는 뾰족하다. 둘은 먹이가 달라 평화롭게 공존했다. 그런데 1982년 새로운 종의 땅 핀치가 다프네섬에 날아들었다. 이 녀석은 덩치가 이미 살고 있던 땅 핀치의 두 배나 됐기 때문에 주로 큰 씨앗을 먹는데 개체수가 점차 늘어 2003년에는 350마리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해 심한 가뭄이 닥쳐 식물이 제대로 씨앗을 맺지 못했고 땅 핀치 사이에 먹이 경쟁이 치열해졌다. 결국 이듬해 초에 수를 헤아린 결과 큰 땅 핀치는 150마리, 중간크기의 땅 핀치는 235마리만이 살아남았다. 2004년에도 가뭄이 계속되면서 큰 씨앗이 고갈돼 사망률도 급증했다. 이듬해 조사 결과 큰 땅 피치는 13마리만 살아남아 멸종 위기에 처했고 중간크기의 땅 핀치도 83마리만 남았다.

연구자들은 2005년 살아남은 중간크기의 땅 핀치 부리 크기를 조사해봤다. 그 결과 평균 10.6mm로 2003년의 11.2mm보다 5% 줄어들었고 두께도 8.6mm로 이전의 9.4mm보다 9% 줄었다. 중간크기의 땅 핀치 가운데 큰 씨앗을 먹는데 유리한, 부리가 큰 그룹은 큰 땅 핀치와 경쟁으로 대부분 죽었지만 작은 씨앗을 먹는데 적합한 부리가 작은 그룹은 상대적으로 생존율이 높았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죽은 새들의 위를 부검한 결과 모두 텅 비어 있었다”며 “먹이 수급 변화나 다른 종의 존재로 인한 굶주림이 한 종의 진화 방향을 결정짓는 강력한 요인임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설명했다.
 

정상적인 오리(1)와 메추라기(2) 태아의 부리. 배아의 부리 형성을 조절하는 신경능세포를 바꿔치기한 오리(3)와 메추라기(4)는 서로 상대의 부리에 더 가까운 형태를 띤다.


유전자 발현 패턴이 부리 모양 결정

부리의 다양한 모양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지난 2004년 미국 하버드대 의대 발생생물학자인 클리포드 타빈 박사팀은 씨앗을 깨먹는데 적합한 둥근 부리를 지닌 땅 핀치 3종과 과즙을 먹는데 알맞은 뾰족한 부리를 지닌 선인장 핀치 3종의 부리 발생과정을 비교했다. 연구자들은 부리 발생 조직에서 뼈형태형성단백질4(BMP4)의 발현 패턴이 차이가 있음을 확인했다. 즉 땅 핀치의 경우 BMP4가 발생 초기에 더 많이 만들어졌다. 한편 같은 집단에 속하는 3종 사이에도 BMP4의 발현 패턴이 조금씩 달라 부리 형태의 미묘한 차이를 만들었다.

결국 새로운 형태의 부리는 새로운 유전자가 생겨서 나타나는 게 아니라 기존 유전자의 발현 시기와 수준의 변화로 나타난 결과다. 환경에 맞춰 부리 모양이 빨리 진화할 수 있었던 것도 유전자 발현 패턴 변화를 통해서 가능했던 셈이다. 핀치처럼 같은 부류에 속하는 새들 뿐 아니라 서로 거리가 먼 새들의 전혀 다른 부리 모양도 유전자들의 발현 패턴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200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 질 헬름스 교수팀은 배아 조직 이식으로 메추라기의 부리를 지닌 오리와 오리 부리를 지닌 메추라기를 탄생시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연구자들은 수정 뒤 36시간이 지난 배아에서 부리를 형성한다고 추정되는 조직인 신경능세포(neural crest cell)를 떼어내 서로 바꿔치기했다. 그 뒤 11일이 지나 형태를 갖춘 태아를 조사한 결과 각자 상대편의 부리 모양으로 발생했음을 확인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처럼 전혀 다른 형태의 부리가 만들어지는데 공통의 유전자들이 관여한다는 점. 다만 개별 유전자가 발현하는 시점이 달라 메추라기의 경우 오리보다 부리가 빨리 성숙한다. 연구자들은 “이번 연구결과는 신경능세포가 자율적으로 인접 조직의 유전자 발현을 조절해 부리의 모양을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찰스 다윈은 1859년 출판한 ‘종의 기원’에서 품종에 따라 형태가 다양한 비둘기 부리를 조사한 뒤 “이런 변화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확연히 드러난다”며 “하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겠다”고 썼다. 그로부터 150여년이 지나서야 다윈의 궁금증에 대한 실마리가 풀린 셈이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08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진행

    남현지
  • 강석기 기자

🎓️ 진로 추천

  • 생명과학·생명공학
  • 환경학·환경공학
  • 지구과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