쭉 뻗은 도로 위에 아지랑이가 넘실댄다. 아지랑이 너머에서 육중한 차체와 가죽으로 장식된 모터사이클이 당당하게 질주해온다. 그 모습이 아지랑이와 겹쳐져 마치 환상 속 모습을 보는 듯하다. 지난 5월 2일, 강원도 속초에서 열린 ‘코리아 내셔널 H.O.G(Harley Owners Group) 랠리’에서는 천 명의 할리데이비슨 라이더가 도로를 ‘접수’했다. 이들의 어깨 위엔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있다는 자부심과 두근거림이 놓여 있다. ‘소리만 듣거나 디자인만 봐도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을 단번에 구별할 수 있다’는 이들의 자부심 뒤에는 할리데이비슨의 개성을 100년 이상 지켜온 디자인 감각과 기술력이 자리한다. 즉 할리데이비슨은 디자인과 기술이 만들어 낸 ‘문화 아이콘’인 셈이다. 그 결과 할리데이비슨은 구매자 100명 중 85명 이상이 만족하는 상품이 됐다. 이들의 인기 비결은 무엇일까. 할리데이비슨의 매력은 ‘Look, Sound, Feel’ 세 단어에 있다. 모터사이클의 중심 프레임에 전통기술과 최신기술을 입힌 디자인(Look). 라이더의 피를 끓게 하는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엔진 소리(Sound). 마치 말을 타는 느낌을 주는 독특한 진동감(Feel)이 그것이다. 할리데이비슨 동호회 H.O.G. 코리아 챕터의 장원기 회장은 “엔진음, 사나이다움, 디자인에 대한 만족감이 한데 어우러진 것이 인기 비결”이라고 말했다.
Look_디자인에 기술 입힌 프레임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은 디자인을 정한 뒤 그 위에 기술을 입힌다. 미국 본사의 제품 개발 센터장이자 모터사이클 스타일링 책임자인 윌리 데이비슨은 12명의 스타일리스트와 300명의 산업디자이너를 고용했을 정도로 디자인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할리데이비슨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쓰던 군용 모터사이클의 디자인을 계승하면서 최신기술을 녹여냈다. 할리데이비슨코리아 고객지원팀 강성봉 과장은 “복고풍 디자인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다”며 “디자인이 감성을 자극한 예”라고 전했다. 핸들과 앞바퀴를 연결하는 ‘프론트 포크’에 군용 모터사이클의 상징인 견고한 스프링을 달았다. 스프링은 충격을 흡수한다. 흔히 최신형 오토바이는 바퀴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오일 완충제와 스프링을 함께 장착한다. 오일이 프론트 포크의 구멍을 드나들며 충격을 효과적으로 흡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2월에 출시된 모델 ‘크로스본’은 스프링만으로 충격을 흡수한다. 강 과장은 “역학적인 움직임만으로 진동을 제어하므로 다른 브랜드의 모터사이클보다는 운전자가 느끼는 진동이 큰 편”이라고 말했다.
최근 할리데이비슨은 디자인에 변화를 꾀했다. 할리데이비슨코리아 마케팅팀 안정현 차장은 “할리데이비슨은 40대의 남성팬이 가장 많다”며 ‘V-로드’ 시리즈는 젊은 층을 공략해 팬 층을 넓히려는 노력”이라고 설명했다. 이 모델은 엔진을 프레임으로 감싸 외부로 드러냈다. 아찔할 정도로 매끄러운 프레임은 배기관으로 이어져 뒤로 쭉 뻗었다. 프레임의 선전 덕분에 V-로드는 2001년 탄생한 이래로 ‘세계 모터사이클 기자상’ 등 28개의 상을 휩쓸었다.
이중 대다수가 디자인에 관련된 상이었을 정도로 할리데이비슨의 변화는 주목을 받았다. 아찔한 곡선은 물의 압력이 빚어낸 ‘작품’이다. 연장이나 기계로 쇠를 구부리면 이음매가 매끄럽지 않고 쇠의 조직이 파괴되거나 프레임이 뒤틀릴 수 있다. 이를 보완한 것이 하이드로포밍(hydroforming) 기법이다. 틀을 만든 뒤 프레임을 넣고 원하는 부위에 고압의 물을 뿌려 부드럽게 구부린다. 적은 비용으로 프레임을 더 가볍고 강하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Sound_말발굽? 심장 박동? 포테이토?
‘할리데이비슨’하면 덥수룩한 턱수염을 기르고 징이 박힌 가죽 재킷을 입은 라이더가 웅장한 엔진음과 배기음을 배경으로 황야를 질주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배경음악은 ‘다그닥’ 힘찬 말발굽 소리 같기도 하고(한국인에게) ‘포테이토’란 단어를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미국인에게). 언어에 따라 소리가 달리 들려도 할리데이비슨의 엔진 소리가 거친 것만은 분명하다.
독특한 엔진음은 45° 각도로 배열된 두 개의 V자 실린더가 엇박자로 만들어내는 화음이다. 엔진은 보통 앞 실린더가 점화(폭발)한 뒤 뒤쪽 실린더가 폭발한다. 뒤쪽 실린더가 언제 점화되느냐에 따라 엔진의 소리가 결정된다. 보통 모터사이클 엔진은 뒤쪽 실린더가 정확하게 360° 돌 때마다 점화된다. 그런데 할리데이비슨의 엔진은 두 번째 실린더가 420° 돈 뒤 점화된다. 첫 음과 두 번째 음이 약간의 간격을 두고 리듬을 만들어낸 것이다. 마니아들은 할리데이비슨 엔진의 연소 주기가 인간의 심장 박동과 유사해 ‘인간적인 기계’라고 생각한다. 라이더는 엔진의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심장까지도 빠르게 뛰는 듯한 흥분을 느낀다.
그런데 최근 국제 소음기준이 강화되면서 말발굽 소리가 위기에 부딪히기도 했다. 시끄럽다는 이유였다. ‘소리에 죽고 소리에 사는’ 할리데이비슨은 말발굽 소리를 지키기 위해 소음연구센터를 만들었다. 말발굽 소리는 유지하면서 데시벨(dB)을 낮추도록 소리를 디자인했다. 국제 소음 기준은 유럽의 규정을 따르는데, 올해부터 모터사이클에 ‘유로-3단계’가 적용되면서 모터사이클의 최대 소음이 79dB로 제한됐다. 엔진의 소음이 80dB 이상이었던 할리데이비슨에 비상이 걸렸다. 80dB은 지하철 승강장 중간지점에 서서 들리는, 열차가 승강장에 진입한 직후의 소음과 맞먹는다.
할리데이비슨은 어떻게 소음을 79dB 수준으로 낮췄을까. 우선 배기구의 소음을 줄이기 위해 배기구 내부에 망을 겹겹이 쌓았다. 배기가스가 망에 걸러지면서 배기구를 통과할 때 소음이 줄었다. 엔진의 일부도 너트로 죄었다. 엔진 내부의 빈공간은 진동을 증폭시킨다. 공명현상으로 생기는 알루미늄 판의 진동이 실린더 점화 진동과 맞아떨어지면 보강간섭이 일어나 소음이 배로 높아진다. 엔진 내부 빈 공간을 볼트로 죄면 공명현상이 완화되고 엔진 부속품의 진동도 준다.
Feel_러버 마운트로 디자인한 진동
할리데이비슨 라이더들은 할리데이비슨의 매력으로 말 타는 느낌을 꼽는다. 최근 모터사이클과 자동차업계는 운전자가 시동을 걸었는지 모를 정도로 진동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주행 안정감을 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할리데이비슨은 오히려 엔진의 고유 진동을 보존한다.
모터사이클은 두 가지 방법으로 진동을 흡수한다. ‘카운터 발란스’(counter balance) 방식과 ‘러버 마운트’(rubber mount) 방식이 그것이다. 카운터 발란스 방식은 엔진이 폭발하면서 아래쪽으로 힘을 줄 때 카운터 발란스가 위쪽으로 크기가 같은 힘을 준다. 힘이 반대방향으로 작용하므로 서로 상쇄돼 라이더에게 진동을 전하지 않는다.
러버 마운트 방식은 프레임과 엔진 사이에 러버 마운트라는 고무를 넣어 엔진에서 발생하는 진동을 흡수한다. 그 결과 차체로 가는 진동이 줄어든다. 두 방법을 모두 쓰면 라이더는 진동을 거의 못 느끼지만, 할리데이비슨은 러버 마운트 방식 한 가지만을 고집한다.
카운터 발란스를 쓰지 않은 탓에 할리데이비슨의 엔진은 프레임에서 2~3cm 떠 있는 것 처럼 보일 정도로 힘차게 흔들린다. 강 과장은 “라이더가 즐겁게 탈 수 있도록 일부러 진동을 남겨놓는 셈”이라며 “러버 마운트가 간접 진동을 줘서 라이더는 말 타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첨단 디지털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말을 타고 달리는 것 같은 원초적인 즐거움과 바람을 가르는 주행의 기쁨을 제공하는 할리데이비슨의 매력은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는 쿠바의 혁명가 체게바라의 생애가 모터사이클을 배경으로 그려진다. 그는 거친 세상의 풍파를 개혁하기 위해 모진 애를 쓰는데, 그때마다 그의 곁엔 모터사이클이 함께한다.
모터사이클의 자유분방함과 터프함에서 그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할리데이비슨이 거친 진동과 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어쩌면 거친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꿈’을 이뤄주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체게바라가 모터사이클로 현실 너머 이상향의 꿈을 이뤘듯, 할리데이비슨도 앞으로 얼마다 더 많은 사람의 ‘꿈’을 이뤄 줄지 궁금하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검은 가죽으로 폼 나게
아스팔트가 이글거리는 뜨거운 여름. 검은색 가죽 재킷을 입은 할리데이비슨 라이더는 아스팔트 도로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하늘에서 내리쬐는 태양빛에 어질하다. 앞에서 바람이 불어와도 재킷 안은 땀과 열로 뒤범벅이다.
할리데이비슨은 2008년 여름 쿨링팩 재킷을 출시한다. 매쉬 섬유(그물 모양의 직물)가 내장된 가죽재킷에 쿨링팩을 4개 넣었다. 쿨링팩은 물과 만나면 흡열반응이 일어난다. 이 원리를 이용해 쿨링팩을 물에 담근 뒤 짜내고 재킷 내부에 넣으면, 피부에 맞닿은 쿨링팩이 체온을 떨어뜨린다. 가죽재킷의 가슴 쪽 지퍼를 열어 몸 안으로 바람을 들여보내면 더욱 시원하다.
라이더들은 비가 오는 장마철에도 검은색 가죽옷을 고집한다. 눈이 펑펑 내리는 한겨울에도 마찬가지다. 2003년 출시된 ‘FXRG 재킷’은 비오는 궂은 날씨에도 라이더의 품위를 지켜준다. FXRG 재킷은 ‘프리-슈링크’ 방식을 사용했는데, 가공하기 전 가죽을 압축해 섬유조직 밀도를 2배 이상 높였다. 일반 가죽은 가죽의 틈새로 물이 스며들면 틈새가 벌어져 물이 더 많이 스며든다. 결국 재킷은 물에 젖고 모양이 변형될 수 있다. 그러나 FXRG 재킷은 가죽의 밀도를 높였기 때문에 가죽의 틈새로 물이 들어오더라도 조직의 틈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물에 젖지 않는다.
겨울용 열선 재킷을 입으면 추위에도 끄떡없다. 재킷 안감에는 열선이 깔려있다. 재킷의 플러그를 모터사이클 전원에 꼽으면 마치 전기장판을 끌어안은 듯 재킷 내부가 따뜻해진다. 라이더는 열의 강도를 조절할 수도 있다. 열선 재킷은 60데니어(섬유의 굵기, 1데니어는 450m인 실의 무게가 0.05g일 때의 굵기) 나일론으로 섬유가 조밀하게 엮여있기 때문에 재킷 안으로 바람 한 점, 비 한 방울 들어가지 않는다. 한겨울에도 칼바람을 가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라이더의 힘이 여기서 나온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