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0일 필자를 포함한 KAIST 문화기술대학원팀은 이란행 비행기에 올랐다.
기원전 4세기 초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불태운,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에 가기 위해서였다.
우리 일행의 방문 목적은 페르세폴리스의 디지털 복원을 위한 현장 답사.
불타고 남은 페르세폴리스 유적을 1930년대부터 연구해온 미국 시카고대 동양학연구소와 이란의 문화유적관리기관인 파샤가르드 리서치 재단의 고증 자료를 토대로 2500년 전 페르세폴리스를 디지털로 되살려보기 위해서다.
설렘 반 걱정 반으로 도착한 페르세폴리스 유적지에서 느낀 생생한 감동을 지상(紙上)에 전한다.
모든 길은 페르세폴리스로 통한다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왕조는 아시리아를 격파하고 오리엔트를 통일했다. 이로 인해 페르시아는 로마제국보다 먼저 세계 최초의 대제국이 됐다. 지중해와 이집트에서 서아시아를 지나 인더스강 유역까지 페르시아의 영토는 방대했다.
당시 페르시아의 황제는 다리우스 1세. 그는 제국을 20개 지역으로 나눠 통치했다. 그가 가장 역점을 둔 사항은 교통과 유통. 전국의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를 닦았다. 이 길을 통해 황제의 명령이 들고 났다. 경제와 문화가 오가는 고대의 고속도로였던 셈이다.
그래서 페르시아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를 두고 ‘모든 길은 페르세폴리스로 통한다’는 말이 나왔다. 기원전 330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페르시아가 멸망할 때까지 약 200년 동안 페르시아는 세계의 중심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페르세폴리스 유적을 보면 이집트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오리엔트 대륙을 지배했던 페르시아가 관용과 융합을 내세워 정복지의 종교와 관습, 문화를 존중했음을 짐작케 한다.
페르시아가 약 200년 동안이나 방대한 오리엔트 대륙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포용 정책 덕분이었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일찍이 “페르시아만큼 외국 관습과 문화를 기꺼이 받아들인 나라는 없다”고 말했다.
1. 만국의 문 : 23개 지역의 사절단이 페르시아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통과했다. 2. 아파다나 : 페르세폴리스의 핵심 건물로 각국의 사신들이 페르시아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던 곳이다. 3. 다리우스 궁 :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다리우스 1세의 궁전이다. 4. 크세르크세스 궁 :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황제가 건축했다. 5. 보물창고 :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 하에 있는 지역에서 걷어들인 공물을 보관했다. 6. 백주의 궁 : 100개의 기둥으로 이뤄진 회의실. 각국의 사신들과 페르시아 사령관이 왕을 접견하고 연회를 열었다.
부글부글 끓는 ‘문화 용광로’
페르세폴리스 궁전의 화려한 건축은 그리스의 열주식 기둥부터 이집트의 석조 건축, 바빌로니아의 벽돌 축조, 그리고 인도의 지붕 양식이 한데 녹아 새롭게 탄생했다. 페르세폴리스는 당대 전 세계 문화가 하나로 집결돼 부글부글 끓어 오른 ‘문화 용광로’였던 셈이다.
기원전 330년 페르세폴리스가 파괴될 때까지, 궁전에 머물렀던 페르시아 황제와 신하, 병사와 사제, 사신들 그리고 낙타와 말, 소와 어린 양은 지금도 벽면 조각으로 남아있다. 장인들의 섬세한 손길이 빚어낸 조각들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와 인사를 건넬 듯하다.
관모가 이색적인 스키타이인, 인도에서 온 간다라인, 그리스식 복장을 한 이오니아인, 고수머리가 사실적으로 묘사된 이디오피아인 등 세계 곳곳에서 온 사신들이 궁전 입구 ‘만국(萬國)의 문’에 줄지어, 페르세폴리스의 주인 다리우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꼿꼿이 서 있는 조각도 인상적이다. 그리스 반도와 지중해를 건너 인도에 이르기까지 무려 23개 민족에 영향을 끼친 다리우스 황제의 권력이 새삼 놀랍다.
황제를 알현하는 장소인 ‘아파다나’는 황제 권력의 상징처럼 보인다. 아파다나는 1만 여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모일 수 있을 정도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당시 기술로 어떻게 이렇게 큰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이런 높은 가치 때문에 페르세폴리스는 1979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실크로드 타고 이어진 한국과 이란의 우정
페르세폴리스는 현재 이란에 속한다. 이라크와 비슷한 나라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미국이 지목한 소위 ‘악의 축’으로 불리는 나라. 치안이 불안할 것 같지만 막상 이란에 도착했을 때 그런 느낌은 받지 못했다.
오히려 이란은 우리 일행을 반겼다. 한국 드라마 ‘대장금’의 시청률이 90%에 이를 정도로 현재 이란에서는 한류 열풍이 거세다. 이란 어린이들은 우리가 한국인이란 이유만으로 ‘양금이’(대장금)를 외치며 사인을 요청하는 등 친근하게 대했다.
사실 한국과 이란은 이미 1200년 전 실크로드를 통해 문화를 교류한 경험이 있는 사이다. 신라의 수도 경주의 괘릉에는 페르시아인을 묘사한 조각상이 있고, 신라의 유리잔과 은제 그릇 같은 유물도 페르시아에서 들여왔다. 통일신라의 승려 혜초는 페르시아를 답사하기 위해 경주를 출발해 이란에 도착했다.
서울에는 테헤란로가 있고 테헤란 북부에는 서울 거리가 있다. 잊혔던 신라와 페르시아, 한국과 이란의 ‘우정’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디지털 복원, 어떻게 이뤄지나
디지털 복원은 사라지거나 훼손된 문화유산을 디지털로 재현하는 방법이다. 과거에 존재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유형의 문화재나 사람들의 경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무형의 문화재를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원형대로 복원한다. 페르세폴리스 사례를 들어 디지털 복원 과정을 소개한다.
1단계〉 자료 조사
페르세폴리스 복원에 필요한 기초 자료를 조사한다. 1930년대 페르세폴리스 유적을 발굴, 조사한 미국 시카고대 동양학연구소의 당시 발굴 과정 보고서와 도면을 일차적으로 참고했다. 또 독일의 건축학자 크레프트가 1970년대 그린 페르세폴리스 실측도를 기본 자료로 삼았다. 오른쪽 사진은 크레프트 박사의 실측도다.
2단계〉 콘티 작성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디지털 영상을 만들기 위한 콘티를 작성한다. 이 단계에서 디지털 스토리텔링 기법이 들어가는데, 쉽게 말해 시나리오를 2차원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2단계는 전체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유적지 영상을 콘티대로 찍기 때문이다. 그래서 콘티는 ‘디지털 복원의 청사진’으로도 불린다.
3단계〉 유적지 촬영
콘티를 바탕으로 현재 남아있는 페르세폴리스 유적을 고해상 HD 캠코더로 촬영한다. 현재 남아있는 유적의 모습이 2500년 전 페르세폴리스의 원래 모습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유적지의 구석구석을 한 군데도 놓치지 않고 정밀하게 촬영해야 하는 고난도 작업이다.
4단계〉 3D 컴퓨터그래픽 작업
HD영상을 토대로 컴퓨터그래픽 작업으로 페르세폴리스를 3차원 영상으로 구현한다. 이 과정이 끝나면 HD영상에 페르세폴리스의 3차원 컴퓨터그래픽 영상을 절묘하게 합성해 전체 복원 영상을 만든다. 이렇게 하면 디지털 복원 작업이 마무리된다.
5단계〉 전시
문화유산을 디지털로 복원하는 이유는 결국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따라서 디지털 복원 영상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보여주는지도 디지털 복원의 성패를 좌우한다. 페르세폴리스의 경우 4월 22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유물전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에서 대중에 공개된다. 디지털로 복원된 페르세폴리스의 옛 모습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