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컬 평점 ★★★★★ 프랑스판 호접지몽(胡蝶之夢)
영화 줄거리
세계적인 프랑스 패션 잡지‘엘르’의 편집장인 쟝 도미니크 보비. 그는 동거녀 이네스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둔 가장이다. 바람둥이였던 아버지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듯 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하며 살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20일 뒤 의식을 찾았지만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왼쪽 눈꺼풀 뿐. 그는 왼쪽 눈의 깜박임만으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 영화 ‘잠수종과 나비’는 쟝 도미니크 보비(1952~1997년)의 동명 자서전(한국어 제목 ‘잠수복과 나비’)에 기초한 실화로 전신마비에 걸린 한 남자가 눈꺼풀의 깜박임만으로 책을 써낸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에서 그는 침대에 누워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자신을 잠수복을 입은 채 깊은 바다에 빠져있는 사람으로 비유한다. 하지만 바다 속의 엄청난 압력에 못 이겨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뿐 결코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몸은 침대에 묶여 있지만 그는 스스로 한 마리의 나비가 돼 아무도 가보지 못한 세상으로 상상의 나래를 편다. 마치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장자가 꿈속에서 나비가 돼 꽃 사이를 훨훨 날아다닌 것처럼 말이다.
‘잠수종과 나비’는 주인공의 꿈속으로 관객을 초대하는 데 성공해 제60회 칸영화제 감독상(2007년), 제65회 골든글로브 최우수 감독상과 최우수 외국어영화상(2008년)을 휩쓸었다.
인간의 뇌는 컴퓨터 마더보드
영화는 전신마비에 걸린 주인공이 한쪽 눈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의 병명은 보고 듣고 생각할 수는 있어도 몸은 움직일 수 없는 감금증후군(Locked in Syndrome). 담당 의사는 현대의술 덕분에 생명을 부지할 수 있다며 격려하지만 정작 보비는 이 꼴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라고 자신을 살렸냐며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가 세상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쪽 눈꺼풀을 깜박이는 것이다. 눈꺼풀을 한 번 깜박이면 ‘그렇다’, 두 번 깜박이면 ‘아니다’라는 의사를 표현할 수 있지만 성격 급한 그에게는 이마저도 형벌처럼 느껴진다.
담당 의사는 그의 병이 컴퓨터로 따지면 마더보드의 특정 부위가 손상을 입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중앙처리장치(CPU), 마이크로프로세서 등이 모여 있어 컴퓨터의 모든 장치들의 데이터 입출력을 원활하게 처리하는 마더보드는 인간에게 뇌와 같다. 주인공은 뇌의 특정 부위를 다친 것이다.
인체의 모든 장기와 근육은 신경의 지배를 받는다. 장기나 근육을 다치면 그 부분만 손상된다. 하지만 뇌를 직접 다치거나 뇌와 말단 기관을 연결하는 신경이 손상되면 결과적으로 말단 기관까지 손상된다.
뇌는 크게 대뇌(정신 기능), 소뇌(운동 기능), 뇌간(심장 박동, 호흡 관장)으로 나뉜다. 만약 대뇌와 소뇌가 손상됐다면 식물인간이 된다. 정신과 운동 기능이 사라져 움직일 수 없지만 심장은 살아있기 때문에 식물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만약 이 상태에서 뇌간이 손상되면 환자는 스스로 호흡할 수 없어 사망한다.
많이 알려진 뇌사(腦死)의 경우 뇌의 모든 부분이 손상된 상태를 일컫는데, 당장은 심장이 뛰고 있지만 이미 뇌와 말단 기관 사이의 연결이 끊겼기 때문에 대개 뇌사 판정을 받으면 2주 안에 환자가 사망한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앓는 감금증후군은 대뇌와 소뇌는 정상이고 뇌간의 일부가 손상된 상태로 식물인간과 정상인의 중간이라고 보면 된다.
한 가지 옥에 티를 지적하자면 주인공의 치료법이다. 영화 중반 물리치료사가 수영장에서 보비를 안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장애환자의 재활을 돕는 수중치료다. 하지만 보비의 경우 감금증후군이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는 팔다리 근육이 없으므로 수중치료를 받는 설정은 어색하다. 또 오랫동안 몸이 마비 상태면 팔다리 근육이 위축되므로 주인공의 우람한 팔다리는 의학적으로 적합하지 않다.
영화 초반 쟝 도미니크 보비는 한쪽 눈에만 의지해 세상을 본다. 하지만 원래 그에게는 뿌옇게 보이지만 시력이 있는 다른 쪽 눈이 있었다. 그의 담당 의사가 매정하게도 다른 쪽 눈은 쓸모없다며 꿰매버리기 전까지는. 의사라면 마땅히 이 눈을 고쳐 그가 볼 수 있도록 해줘야하지 않았을까?
눈꺼풀을 꿰매야하는 이유
눈이 2개인 이유는 다른 각도에서 비춰지는 화면이 뇌에서 하나로 합쳐져 물체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넓은 시야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될 수 있으면 두 눈의 시력을 유지하는 편이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가 보비의 한쪽 눈을 꿰맨 일은 오히려 보비를 위해서였다.
말초신경은 크게 뇌에서 직접 나오는 뇌신경과 척수에서 나오는 척수신경으로 나뉜다. 우리 몸의 뇌신경은 총 12개가 있는데, 각각은 눈, 코, 귀 등 감각기관과 얼굴과 목의 운동, 감각을 지배한다.
주인공의 경우 눈꺼풀을 올리고 눈동자를 움직이는 3번 뇌신경(동안신경)은 멀쩡한 데 비해, 눈꺼풀을 닫고 얼굴 표정을 나타내는 7번 뇌신경(안면신경)의 일부가 마비됐다. 이 때문에 한쪽 눈을 늘 뜨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눈이 금방 건조해져 각막이 손상되고 최악의 경우 실명까지 초래한다. 쟝 도미니크 보비의 한쪽 눈이 뿌연 이유는 각막이 손상됐기 때문이다. 정상인은 눈꺼풀을 깜박이면서 눈 전체에 눈물을 발라주기 때문에 얇은 눈물막이 10초 이상 각막을 덮고 있어 각막의 손상을 막는다.
가령 오랫동안 컴퓨터 화면을 보면 눈꺼풀을 자주 깜박이지 않아 안구가 건조해지기 쉽다. 작은 눈꺼풀의 움직임이 의외로 큰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의사가 주인공의 한쪽 눈꺼풀을 꿰맨 이유도 눈꺼풀을 움직일 수 없어 장기적으로는 눈에 손상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혀가 폐를 보호한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증세가 조금씩 호전되면서 혀를 움직일 수 있게 된다. 비록 완벽하게 말을 할 수 없지만 침을 삼키거나 신음처럼 들리는 짧은 발음도 구사한다. 작은 발전이지만 그를 지켜보는 의료진은 환자가 좋아졌다며 환호한다. 혀를 움직인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코로 숨을 쉬지만 입으로도 숨을 쉬고 있다. 사실 코와 입은 겉으로 보이는 입구가 다를 뿐 목에서는 하나의 입구로 합쳐진다. 해부학적으로는 이 부위를 인두(pharynx)라 부른다. 입으로 삼킨 음식은 인두를 통과해 식도를 거쳐 위에 전달되고, 코로 들이마신 공기는 인두를 통과해 후두를 거쳐 폐로 간다. 후두덮개는 음식이 혀를 통과하는 것과 동시에 후두 입구를 닫는다. 음식물이 폐로 들어가는 현상을 막기 위해서다. 혀가 폐를 보호하는 셈이다.
만약 음식물이 폐로 들어가면 흡인성 폐렴에 걸린다. 이는 치사율이 높은 병이다. 정상인의 경우 손가락을 입안에 넣으면 구역질이 나는데, 이는 구역질반사(gag reflex)로 약물이나 정신적인 자극 또는 혀 뒤편을 자극할 경우 인두 근육이 수축하면서 일어난다.
9번 뇌신경(설인신경)이 손상될 경우 구역질반사가 일어나지 않아 의사는 이 검사를 통해 후두덮개 기능이 정상인지 판단한다. 뇌가 손상된 환자는 후두덮개의 움직임이 불완전해 입으로 음식을 먹기 힘들다.
이 때문에 의학적으로는 쟝 도미니크 보비가 혀를 움직이기 전까지 코에 플라스틱 관을 꽂아 식사를 해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영화 내내 보비의 코에 관을 꽂은 장면이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