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멋진 파란 하늘 위로~ 나르는 마법 융단을 타고~”. 가수 자우림의 히트곡 ‘매직 카펫 라이드’의 첫 소절이다. 인하대 기계공학과 김재환 교수는 이 노래를 이렇게 바꿔 부른다. “이렇게 멋진 파란 하늘 위로~ 나르는 마법 종이를 따라~”. 김 교수가 개발 중인 ‘나는 마법 종이’(flying magic paper)를 마법 융단에 빗댄 것.
압전효과와 이온전이효과
그러니까 종이다. 신문에, 잡지에, 소설책에, 복사용지에 그리고 1000원짜리 지폐에 사용되는 그 흔한 종이다. 그런데 이런 평범한 종이가 하늘을 난다. 그것도 스스로 말이다. 뉴욕타임스 2006년 7월 11일자는 “종이가 ‘똑똑한’ 물질임이 밝혀졌다”며 김 교수와의 인터뷰 내용을 자세히 실었다. 종이가 어떻게 이런 ‘마법’을 부리는 걸까. 아니, 김 교수는 종이에 어떻게 이런 ‘마법’을 걸었을까.
시작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1999년 우연히 껌종이에 전기를 걸었는데 종이가 부르르 떨렸다. 이유가 궁금했던 그는 화학공학과, 제지과 교수들에게 자문을 구했지만 만족스런 답을 얻지 못했다.
당시 김 교수 본인이 추측한 답은 정전(靜電)효과였다. 종종 프린터에서 용지가 걸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종이에 전기장이 걸려 금속 원통(드럼)에 들러붙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책받침을 옷에 문지른 뒤 머리에 대면 정전효과로 머리카락이 일어서는 것과 같은 원리다. 정전효과 때문에 종이가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프린터에 걸린 용지는 드럼에 들러붙어 있을 뿐 팔랑거리진 않는다. 그렇다면 정전효과는 아니라는 얘기다.
그 때부터 김 교수는 원인을 찾기 위해 종이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일일이 전기를 걸어봤다. 흔한 복사용지부터 마분지, 셀로판지, 한지까지 종이 종류만 60여가지였다.
2000년과 20001년 그는 국제학회에서 이 실험 결과를 정리해 발표했다. ‘종이가 전기로 움직인다’는 흥미로운 주제에 학계의 관심이 쏠렸다. 특히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김 교수의 연구 내용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2001년 그는 두 차례에 걸쳐 NASA를 방문해 자료 조사와 실험을 진행했다.
2002년 초 김 교수는 드디어 해답의 실마리를 찾았다. 종이 속에 든 셀룰로오스의 특별한 구조 때문에 종이가 움직일 수 있었던 것. 셀룰로오스는 결정구조와 비결정구조가 사슬처럼 반복해서 이어져 있다. 김 교수는 “결정구조에서는 ‘압전효과’가, 비결정구조에서는 ‘이온전이효과’가 나타나 종이가 움직인다”고 설명했다.
압전효과란 기계에너지와 전기에너지가 서로 변환하는 작용이다. 쉽게 말해 외부에서 압력이나 진동(기계에너지)을 가하면 전기가 생기고 전기를 흘려주면 진동이 생기는 효과다. 이때 압력이나 진동을 가하면 전기를 생성하는 물질이 압전체다. 종이에서는 셀룰로오스가 이런 압전체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온전이효과는 셀룰로오스 내부의 결정구조와 비결정구조 사이에서 움직이는 전하를 힘으로 바꿔 종이를 떨게 한다. 즉 셀룰로오스의 비결정구조에 있는 수산기(OH)는 이온들과 쉽게 결합하는데, 종이에 전기를 걸면 이 이온들이 전기장을 따라 움직이면서 셀룰로오스 안의 물분자를 끌고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종이가 파르르 떨린다.
2003년 김 교수는 ‘생체모방종이작동기연구단’을 꾸려 셀룰로오스의 이런 특이한 성질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가 ‘종이로봇’이다. 종이로봇은 싼값으로 대량 제작할 수 있기 때문에 우주실험에 적합하다. NASA는 값비싼 탐사선 대신 값싼 종이로봇을 대량으로 화성이나 목성, 토성에 보내 탐지와 정찰 임무를 맡길 계획이다. 현재 연구단은 NASA와 함께 나비나 벌레처럼 움직이는 종이 로봇을 개발 중이다.
플라워 스피커부터 똑똑한 대일밴드까지
기본 아이디어는 셀룰로오스 함량이 높은 종이에 전기를 흘려 로봇이 움직이도록 한다는 것. 문제는 전기를 얻을 동력이다. 종이가 가볍고 약하다 보니 배터리처럼 무거운 장치를 달 수 없다. 연구단은 배터리를 다는 대신 종이 표면에 전파를 전기로 바꾸는 전자회로와 전파를 감지하는 안테나를 붙이고, 외부에서 종이로 쏜 전파를 안테나가 수신해 전자회로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을 연구 중이다. 반도체 칩 대신 ‘종이 칩’을 만드는 셈.
연구단은 종이 위에 전자회로를 만드는 방법을 최근 개발했다. 반도체 칩을 만들 때는 대개 실리콘 웨이퍼 위에 전자회로를 깎아내는 리소그래피 공정이 사용된다. 하지만 종이에서는 이 공정을 사용하기 어렵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스탬핑 기술이다. 마이크로 크기의 전자회로 패턴을 만든 뒤 스탬프를 찍듯 이를 종이 위에 프린트한다. 김 교수는 “수 나노미터 수준의 간단한 ‘종이 칩’을 개발해 내구성을 테스트하고 있다”고 밝혔다.
‘플라워 스피커’도 연구단의 야심작 중 하나다. 말 그대로 꽃 모양의 스피커를 만들겠다는 것. 전기가 흐를 때 종이의 셀룰로오스가 떨리면서 스피커 역할을 한다. 연구단의 실험 결과 종이 스피커는 5~10V 정도의 작은 전압으로도 소리를 낼 수 있다. 이 정도면 아이팟이나 MP3플레이어처럼 휴대용 기기의 스피커로 쓰기에는 무리가 없다.
연구단은 오는 4월 창의연구단 성과전시회에서 가로 10cm 정도의 직사각형 스피커를 공개할 예정이다. 김 교수는 “원이나 삼각형 등 다양한 형태의 종이 스피커를 개발해 ‘플라워 스피커’를 만들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이밖에 종이 전자태그(RFID)도 김 교수가 의욕적으로 개발 중인 기술이다. 셀룰로오스는 인체에 접촉했을 때 부작용이 없어 생체적합성이 뛰어나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에서는 셀룰로오스로 인공피부와 인공혈관을 만드는 등 의학 연구가 활발하다.
김 교수는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의학용 종이 전자태그를 고안했다. 예를 들어 셀룰로오스 막 안에 약물과 센서를 넣었다가 병사가 총상을 입으면 약물이 자동으로 상처부위에 투입되는 ‘똑똑한 대일밴드’를 만들 수 있다. 여기에 간단한 전자회로까지 넣으면 환자의 상태가 원격으로 의료진에 전달되는 전자태그 역할을 겸한다. 김 교수는 “이 기술에 대한 국제특허를 출원했다”며 “현재 상용화시키는데 필요한 연구비를 지원받기 위해 미국의 모처에 제안서를 냈다”고 말했다.
‘셀룰로오스 지능재료 연구단’이라 불러주오
“세계에서 셀룰로오스를 지능재료로 개발하는 유일한 연구단이 되자.” 김 교수가 연구단 식구들에게 늘 하는 얘기다. 실제로 셀룰로오스를 조작해 ‘나는 종이’를 연구 중인 곳은 세계적으로 생체모방종이작동기연구단이 유일하다. 그래서 김 교수는 만약 지금 다시 창의연구단 이름을 지으라면 ‘셀룰로오스 지능재료 연구단’으로 하고 싶다.
지난해 발간된 책 ‘셀룰로오스: 분자와 구조생물학’(Cellulose: Molecular and Structural Biology)에 실린 그의 글에도 ‘지능재료로서의 셀룰로오스’란 제목이 붙어 있다. 이 책은 세계적인 의학전문출판사인 스프링거에서 발간한 것으로 미국 텍사스 오스틴대의 말콤 브라운 주니어 교수를 포함한 전세계 셀룰로오스 ‘대가’들이 참여했다. 한국 학자로는 김 교수가 유일하다.
그는 “창의연구단에서 개발한 원천 기술을 토대로 산업에 응용할 수 있는 셀룰로오스 기반 기술을 개발할 것”이라며 포부를 밝혔다. 연구단이 셀룰로오스에서 ‘금맥’을 캐낼 그날을 기대한다.
Interview 김재환 단장
“‘마법 종이’ 꼭 만들 겁니다.”
2002년 여름, 한국은 월드컵 열기로 뜨거웠다. 하지만 김재환 단장은 몸도 마음도 한국을 떠나 있었다. 그에겐 셀룰로오스 외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미국 동부의 유명 대학 도서관들을 돌며 셀룰로오스에 관한 자료는 모두 긁어모았다. 복사한 자료를 쌓은 높이가 1m를 넘었다.
귀국한 뒤에는 자료를 공부하느라 밤을 지새기 일쑤였다. 도대체 왜 종이가 움직이는지 스스로 만족할만한 답을 얻기 전에는 맘 편히 잠을 잘 수 없었다. 셀룰로오스의 구조가 처음으로 밝혀진 때가 1980년대였으니 당시에는 셀룰로오스 전문가라도 모르는 내용이 많았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그는 생물 서적과 화학 논문을 뒤지며 셀룰로오스의 구조부터 반응, 추출과 제조 방법까지 섭렵했다.
셀룰로오스를 이렇게 파고 든 데는 이유가 있었다. 2002년 초 그는 ‘전기종이’를 연구하겠다며 창의적연구진흥사업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종이가 왜 떨리는지 묻는 심사위원들에게 흡족한 대답을 하지 못해 고배를 마셨다. 그때만 해도 셀룰로오스 때문이라는 정도 밖에 몰랐다. ‘재수’를 결심한 그는 결국 2003년 ‘압전효과’와 ‘이온전이효과’라는 구체적인 이유를 밝혔고, 지금까지 6년째 창의연구단을 이끌고 있다.
김 단장은 국내 과학고 학생들뿐 아니라 미국과 인도에 있는 고등학생들에게 종종 e메일을 받는다. 주로 전기종이 실험을 했는데 잘 안된다며 자문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 때마다 김 단장은 친절히 답장을 한다. 그리고 “‘왜’라는 질문을 가지고 현상을 보면 새로운 답을 찾을 수 있다”며 학생들을 격려한다.
‘전기종이’ 연구를 시작한지 올해로 정확히 10년째. 김 단장은 “지난 10년보다 앞으로 10년이 더 기대된다”며 “세계에서 최초로 ‘마법 종이’를 꼭 개발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