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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초상


34.....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멋진 사랑과 모험이 끝나고 나면, 작가는 주인공이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적는다. 나머지 시간은 마치 덤이라는 듯, 보지 않아도 훤히 안다는 듯, ‘그리고’란 세 글자가 갖는 힘은 이야기를 단정히 접을 만큼 강했다. 그러나 나는 어느 것 하나도 접을 수 없었다. 래빗이 내게 작별을 고했지만, 나는 그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정치를 그만둔 뒤에도 그의 곁에 머물겠다는 약속 말이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치매 전문 미술치료사. 길을 걷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꾸벅꾸벅 졸다가 휴대전화가 울리면 후다닥 달려가서 받고는 그대로 영안실까지 달려가는 일상.

래빗이 하야하는 장면도 종합병원 영안실 밖 쉼터에 놓인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다. 그가 내게 작별 인사를 한 뒤 꼭 석 달 만이다. 내 귀가 먼저 그의 낮고 넉넉한 목소리를 알아차렸다. 그는 ‘대통령을 물러나며 국민께 드리는 글’을 천천히 읽고 있었다. 눈가엔 습관처럼 미소가 머물렀지만 입가엔 침이 흐르고 찡그린 오른 뺨이 편치 않았다. 하야를 알리는 글을 읽기 위해 몇 시간이나 카드를 넘기고 외우고 또 넘겼을까. 간단한 하야 성명만 내도 될 일이건만 조명 내리쬐는 브리핑실로 래빗을 이끈 것은 로즈의 욕심 때문이다. 최대한 동정 여론을 조성하기 위함이었다. 래빗의 목소리가 귀를 찌른다.

“…국민 여러분! 저는 비록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지만… 우리나라의 번영을 위해 이 목숨 다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뒤로도 연설은 이어졌지만 나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두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 턱을 따라 목덜미로 내려왔다.
래빗! 당신 곁으로 갈게요. 래빗!

35.....

래빗을 만나고 싶어 그가 입원 중인 종합병원으로 향했지만 면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전경들이 병원 바깥을 에워쌌고 경호원이 층마다 배치됐다. 래빗의 병실은 22층 꼭대기라고 한다. 면회가 거절돼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나 역시 하루하루 출근하듯 병원에 들렀다. 그렇게 또 한 달이 갔다.

언젠가부터 래빗이 직접 스케치한 그림이 1층 로비 시계탑 아래 놓였고 사람들은 오며 가며 그림 아래에 꽃을 놓고 쾌유를 빌었다. 그 그림을 보는 순간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바다였다. 바람 잦고 섬 아름다운 남해 밤바다!

부두에는 코끼리처럼 크고 뚱뚱한 상선들이 기우뚱 흔들렸다. 그 배들을 바라보는 남녀의 뒷모습이 그림 왼쪽 아래를 차지했다. 그 밤이었다. 우리가 입을 맞춘 밤. 내가 그의 곁에 영영 머무르겠다고 맹세한 밤.

병세가 악화돼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는 소식이 오늘 아침 뉴스에 나왔다. 저 그림은 언제 그렸을까? 내게 이별을 통보하기 전날일까? 아니면 내가 쫓겨난 다음 날? 그도 아니면 대통령에서 물러나고 병원에 입원한 날인가?

병원을 나섰다. 전경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걸어 나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나를 래빗에게 미술치료사로 소개했던 감석경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 박사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왜 그래? 거기 어디야?”

“나 이대론 안 돼요. 나 이대론 안 돼. 나 이대론….”

36.....

감 박사는 래빗을 면회해도 소용없다고 했다. 주치의인 자신은 물론이고 아내인 로즈조차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래빗을 만나야 한다. 병세가 심상치 않다면 오늘 만남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선거 유세 때문에 로즈가 바쁘긴 해도 언제 불쑥 올지 몰라. 그땐 정말 큰 낭패를 볼 거야.”
“상관없어요. 래빗에게 가요.”

“네가 그렇게 사모하는 그 래빗이 내게 특별히 부탁했어. 정신을 완전히 놓기 전에 말이야. 너만은 절대로 병실에 들이지 말라 했어.”
“…래빗에게 가요.”

“꼭 바닥까지 가야겠어? 좋았던 순간만 간직하고 살아가도 되잖아?”
“약속했어요. 약속했다고요.”

곁에 있겠다고. 끝까지 떠나지 않겠다고.

간호사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감 박사 뒤를 따라 22층으로 올라갔다. 경호원들은 감 박사에게 가볍게 목례한 뒤 길을 터주었다. 나는 시선을 내린 채 감 박사의 엉덩이만 바라보고 걸었다. 병실 옆에 있던 경호원이 한 걸음 나섰다. 곁눈으로 살피니 문신미술관에서 내 팔을 붙든 바로 그 경호원이었다. 나는 감 박사 옆으로 슬쩍 비켜서며 차트로 얼굴을 가렸다. 경호원은 두어 걸음 더 나를 따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멈췄다.

방으로 들어섰다. 창틀에 놓인 하트 모양 가습기부터 눈에 들어왔다. 나는 서둘러 침대 곁으로 뛰어갔다. 거기, 래빗이 있었다. 환자복으로도 감출 수 없을 만큼 야윈 몸이다.

“래빗!”
이마에 손바닥을 얹고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깊이 잠든 듯했다.
“나에요. 래빗. 내가 왔어요. 눈 좀 떠봐요. 제발!”
래빗의 양볼이 움찔 떨렸다. 그리고 천천히 눈두덩이 흔들렸고 속눈썹이 올라갔다. 검은 동공이 보였다.

“래빗!”

그의 시선으로 들어가기 위해 엉거주춤 허리를 굽혔다. 그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그의 손을 쥐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그의 턱 바로 위까지 얼굴을 갖다 대도 그는 나를 의식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허허롭게 창가 어딘가에 머물 뿐이다.

“시력을 거의 잃었어.”

감 박사가 등 뒤에서 내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나는 그 팔을 뿌리치며 다시 그 가슴에 뺨을 댔다.

“래빗! 나예요. 보이진 않더라도 내 목소린 기억하죠? 당신의 T라고요.”

침대 아래 철퍼덕 앉아서 한참을 울었다. 눈물이 흐르지 않을 때까지 울었다. 한숨이 절로 나올 때까지 울었다. 그래도 래빗은 깨어나지 않았다. 침대 밑으로 눈이 갔다. 거기, 스케치북이 네댓 개 놓였다. 래빗이 좋아하는 푸른 스케치북이었다. 래빗은 이 병실에서 기억을 잃고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그림을 계속 그렸던 것이다. 픽병에 걸려 천재적인 예술 감각을 선보이는 환자들도 병이 진행됨에 따라 감수성도 영감도 사라진 채 욕망만 남는다고 했다. 그런데 래빗은 욕망만 남은 순간에도 붓을 들었던 것이다. 스케치북을 펼쳐 래빗의 마지막 그림들을 보려 했다. 래빗은 어쩌면 내가 병실로 찾아오리라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가야 해. 로즈야!”

창가에 서서 아래를 살피던 감 박사가 다급하게 내 팔을 잡아끌었다.

“이걸, 이 스케치북이라도 가져갈래요.”

“안 돼. 스케치북 들고나가다간 곧바로 걸릴 거야. 서둘러. 벌써 엘리베이터를 탔을 거야.”

스케치북을 놓고 감 박사와 함께 방을 나섰다. 문을 여는 순간 고개를 돌려 래빗의 침대를 찾았다. 역시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안녕! 내 사랑.

37......

래빗의 부고를 접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나는 경기도 성남에 있는 요양원에서 픽병에 걸린 서른두살 먹은 트럭기사의 그림을 보는 중이었다. 그 기사는 자신이 10년 동안 몰던 트럭을 칠이 벗겨지거나 돌멩이에 맞아 흠이 생긴 부분까지 세밀하게 옮겼다. 태어나서 펜화는 처음 그린다는 사내였다.

나는 사내의 눈부신 솜씨에 탄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슬펐다. 반복은 이렇듯 슬픈 것이다.

사내는 갑자기 자신에게 내린 재능을 뽐내기라도 하듯 밤을 새워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겠지. 진작부터 화가의 피가 몸속에 흐르고 있었던 것처럼, 툭툭 아무렇지도 않게 우주의 비밀을 화폭에 옮길지도 몰라. 그러다가 어느 날 밤손님처럼 찾아들었던 재능이 더 이상 자신에게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지. 깨달음 뒤론 망각이 찾아들어 그림을 그리며 행복했던 시간을 모두 지워버리지. 열정을 바쳐 그린 그림들이 내 것이 아닌 누군가의 것인 듯 낯설고, 그렇게 매일 낯설음이 쌓이다가 마지막 순간을 맞는 거지. 래빗처럼!

사내가 트럭을 완성하고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서울 나들이를 가려고 탔던 시외버스를 그리기 시작할 즈음 휴대전화가 진동으로 울렸다. 믿지 않겠지만 그 진동음을 듣는 순간, 나는 래빗의 얼굴을 떠올렸고 내 뺨에선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감석경 박사가 담담하게 래빗의 마지막을 전했다. 고통 없이 깊은 잠을 자듯 피안의 세계로 건너갔다고.
 

| 여인의 마지막 초상 | 종이에 오일 파스텔, 34×45cm


38.....


“그이는 평생 저만 사랑했답니다. 몹쓸 병에 걸려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이어갈 때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와 병실에서 마지막 순간을 기다릴 때도, 제가 선거를 치르느라 바빠서 병실을 지키지 못했을 때도, 손에 힘이 없어 선 하나 제대로 긋지 못할 때도, 그이는 나를 그렸죠. 그 놀라운 사랑이 제게 큰 힘이 됩니다. 비록 저는 이번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반드시 그이의 사랑을 발판으로 삼아 재기하겠습니다. 오늘 그이의 유작전을 열게 된 것도 그 사랑을 국민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 위함입니다. 자, 이제 다음 그림을 보러 가시죠. 그이가 유독 좋아했던 남해바다를 담은 그림들이 옆방에 가득 있답니다.”

로즈가 말을 마치고 옆방으로 향했다. 취재진을 비롯해 그녀의 극성스런 지지자 팔십여명도 여왕벌을 따르는 일벌들처럼 우르르 걸음을 옮겼다.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뒤 로즈가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였다. 검은색 투피스는 미망인의 슬픔을 잘 담고 있었다. 선거 완패 이후 은퇴설까지 나돌았지만 로즈는 래빗의 유작전을 열며 건재를 과시했다. 그녀다운 계산이고 그녀다운 욕심이었다.

전시실엔 나만 남았다.

로즈의 눈에 띌까 싶어 챙 넓은 모자에 색안경까지 쓰고 왔지만,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말하느라 바쁜 로즈는 지지자들 맨 뒤에 섞여 있는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여인의 마지막 초상!

그림 제목을 먼저 읽었다. 그리고 그림에 담긴 몇 개의 선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평생 잊기 힘든 몇 개의 선이 있다.

여인의 초상…이라고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이 단순한 선들!

그것은 여인일 수도 있지만 코끼리, 비행기, 구름, 꽃 어느 것이나 가능했다. 위에서 아래로 둥글게 그은 선들을 얼굴 윤곽이라고 볼 수 있지만 얼마든지 다른 해석도 가능했다.

그러나 나는 저 그림이 여인의 초상임을 안다. 그리고 래빗이 마지막으로 사랑한, 그림 속의 여인이 로즈가 아니라 바로 나란 것을 안다. 내 방 침대 옆 벽에 걸린 넉 장의 초상화 다음에 바로 저 그림이 놓여야 한다는 것도 똑똑히 안다. 극사실주의를 방불케 하는 첫 그림에서부터 겨우 선만 몇 개 남은 마지막 그림까지, 사랑의 기억이 점점 옅어질수록 그는 나와 보낸 순간들을 붙잡으려 애쓴 것이다.
마지막 여인의 초상은 래빗이 내게 보낸 마지막 연서(戀書)였다.

나는 그림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서며 속삭였다.

“잘할게요…. 당신 생각하느라 건강 해치지도 않고, 끼니 건너뛰지도 않고, 미술 치료사의 삶을 접지도 않고… 당신을 기억하며… 잘할게요. 걱정 말아요.”

39.....

평생 잊기 힘든 몇 개의 선이 있다.

누구는 그 선을 상처로 간직하고 살지만 누구는 그 선을 더 나은 곳으로 안내하는 생명줄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미술 치료를 병행하면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은 몇 개의 선이 누군가의 기억에 오래 머물러 되살아나고 되살아난다면, 인생 그것을 그림으로 받아들인다면, 내 작은 노력도 헛되지 않으리라.

봄여름가을겨울, 스케치를 시작할 때마다 한 남자의 선들을 품는다. 내 그림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그는 나와 함께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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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김탁환 교수
  • 진행

    최여정
  • 진행

    김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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