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천문학자의 '청계천 연가'

전파망원경 만들기 위해 전자상가 드나든 사연


서울대 대학원 천문학 박사과정에 있는 이정원(오른쪽) 씨와 김창희 씨가 전파망원경의 수신기 실로 수신기를 장착할 금속판을 옮기고 있다.


“30년 전만 해도 청계천에서 무얼 파는지 아는 게 힘이었습니다.”

한국형 인간형로봇 ‘휴보’의 아버지인 오준호 KAIST 기계공학과 교수는 휴보를 개발할 당시 청계천의 전자상가에서 다리품을 팔았다. 로봇에 맞는 커넥터(전선 연결기구)나 전선케이블을 구하러 다녔던 것. 사실 청계천은 ‘대한민국 과학실험장비 1번지’다. ‘주사터널링현미경’(STM)을 개발한 국양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세계 최초로 ‘뿌리는 바코드’를 개발한 최진호 이화여대 나노과학부 교수 등이 청계천을 자주 찾던 과학자들이다. 또 국내 천문학자들이 전파망원경을 완성하는 과정도 청계천에서 시작됐다. 그들의 발자취를 쫓아가보자.

청계천 대한민국 과학실험장비 1번지
 

01 선후배 사이인 정원 씨(오른쪽)와 창희 씨가 청계천 전자상가를 둘러보고 있다. 골목골목 누비다 보면 없는 게 없다. 창희 씨는“무얼 하든 정원 선배에게 물을 수 있어 좋다”고 말한다.


청계천 3가에서 4가 쪽으로 가다 보면 세운교가 있다. 복원공사를 마친 청계천에는 다시 맑은 물이 흐르지만 다리 근처 세운상가는 과거에 비해 규모가 줄면서, 부품만 있으면 대포뿐 아니라 탱크도 만들 수 있다던 옛 명성을 잃은지 오래다.

여기저기 기웃기웃. 두 남자가 오전 일찍부터 청계천 세운상가 일대를 골목골목 누비고 있다. 서울대 대학원 천문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이정원(36) 씨와 김창희(32) 씨. 비교적 큰 매장에서 전자부품을 고르고,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만한 구멍가게에서 필터나 둥그런 고무링을 살펴본다. 둘은 탱크보다 더 큰 구경 6m짜리 전파망원경에 들어갈 부품을 찾고 있다. 학부 시절부터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은 관악산 중턱에 서울대 전파천문대를 건설하던 때 주변의 전파 잡음이 얼마나 되는지 함께 조사했고 대학원에서 전파망원경의 주요장비를 개발했다. 특히 선배인 정원 씨는 100GHz 대역의 우주전파를 수신하는 장비(100GHz 수신기)를 만들었다.
 

02 두 사람이 함께 전파망원경에 들어갈 전자부품을 고르고 있다.


“처음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했죠. 간단한 스위치도 시장에서 어떤 종류를 쓰는지 몰라 청계천 상가마다 돌아다니다가 많이 파는 부품으로 골랐어요. IC, 저항, 콘덴서를 청계천에서 구입한 뒤 4층짜리 인쇄회로기판에 꽂아 필요한 회로를 구성했답니다.”

정원 씨는 10년 전부터 청계천을 찾고 있다. 부품을 구입할 뿐 아니라 가공을 의뢰한 적도 있다. 100GHz 수신기에서 전파검출장치를 비롯한 주요장치를 듀어(단열용기)로 감싼 뒤 진공으로 유지하고 -269℃까지 냉각해야 미약한 우주전파를 잘 잡아낼 수 있다. 기체 헬륨을 이용해 이 온도까지 단계적으로 냉각하는데, 중간 단계에 열 전달을 막기 위한 박판의 재료가 중요하다.
 

03 여러 가지 트랜스포머(변압기)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정원 씨.


“열 전달이 적은 물질이 기판에 쓰이는 에폭시수지예요. 청계천에서 에폭시를 구입했는데, 에폭시는 알루미늄보다 가공하기 힘들죠. 깎다 보면 가루가 많이 생기고 잘못하면 깎는 공구의 날도 나가기 때문에 다들 고개를 젓더군요. 겨우겨우 20만원 정도 주고 수동 밀링머신이 있는 공작소에 가공을 맡겼죠.”
 

04 맘에 드는 ‘잡음 제거 필터’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창희 씨.


문래동 설계도 한참을 들여다보다
 

04 정원 씨와 창희 씨가 밀링머신의 엔드밀(절삭공구)이 금속 재료를 자동으로 깎는 장면을 신기한 듯 보고 있다.



사실 정원 씨가 가공을 주로 부탁한 곳은 청계천이 아니라 문래동이다. 문래동 철재종합상사 주변은 비교적 깔끔하게 정리된 청계천 전자상가와 달리 1980년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대형 접시안테나에 들어온 우주전파를 수신기까지 전달하기 위해서는 금속 거울과 렌즈가 필요했어요. 먼저 알루미늄 거울을 2장 깎으려고 문래동에 왔죠. 거울 설계도를 들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가공을 부탁했는데, 거절당하기 일쑤였죠. 마침 저거면 되겠다는 생각이 든 기계가 있는 집을 발견하고는 주인아저씨에게 하루 공임보다 더 많이 드리겠다며 설득을 했어요. 주인아저씨는 설계도를 한참 들여다본 뒤 승낙하시더군요.”
 

01 정원 씨가 수신기 앞에 들어가는 렌즈의 설계도를 보며 설명하고 있다. 02 두 사람이 수신기를 에워쌀 용기로 쓸 만한 원통파이프를 고르고 있다. 03 원통파이프를 용접하는 장면.


그 가계에는 자동화된 CNC 밀링머신이 돌아가고 있다. 컴퓨터에 원하는 형상을 입력하고 기계에 재료를 물린 다음 작동스위치를 넣으면 엔드밀(절삭공구)이 돌아가며 가공한다. 잘 보니 재료와 엔드밀 사이에 냉각액을 계속 뿌려준다. 열을 식히고 윤활작용을 하는 게 목적이란다.

“알루미늄으로 타원거울을 2개 깎는데 성공했지만 렌즈는 축 대칭이라 선반(소재를 회전시키며 가공하는 공작기계)이 있는 다른 가공집에 가야 했죠. 거울을 깎았던 주인아저씨의 소개로 조그만 컴퓨터가 붙어 있는 선반이 갖춰진 집으로 갔어요. 거기서 테플론 표면에 규칙적으로 홈을 낸 렌즈를 깎았죠. 이렇게 하면 반사를 줄이면서 우주전파를 한번 더 모을 수 있답니다.”

천장이 높아 작은 가게를 2층으로 꾸민 그 집에 들어서자 주인아저씨가 “드디어 박사가 됐냐?”며 정원 씨를 반갑게 맞이한다. 정원 씨는 아직 박사 학위를 받지 못했다는 말은 못하고 가볍게 인사만 한다.

그는 2000년 자신이 개발한 100GHz 수신기를 장착한 전파망원경으로 오리온대성운을 관측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뒤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잠시 휴학해야 했다. 그러다가 2004년 학교로 돌아와 연구에 매진한 끝에 박사 학위를 받을 날을 눈앞에 두고 있다.
 

05 밀링머신으로 깎은 재료를 가리키는 정원 씨. 기름때가 묻어 지저분한 이 기계가 그래도 컴퓨터에 원하는 형상을 입력하면 알아서 만들어 주는 이 가게의 보물이다. 06 주인아저씨와 반갑게 악수하는 정원 씨. 몇년 전 전파망원경의 수신기 앞에 들어갈 알루미늄 거울을 깎기 위해 설계도를 들고 문래동을 배회하다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떠오르는 듯하다.


전파망원경 수신기는 업그레이드 중
 

01 정원 씨와 창희 씨가 서울대 공작실에서 재료를 가공하느라 분주한 모습. 02 수신기 일부에 들어가는 전원장치에 납땜하는 02학번 김현정 씨. 그는 지난해 학부 개인 연구를 하느라 청계천에 드나들며 부품을 구입했다.


서울대 기숙사를 지나 순환도로를 돌다 보면 ‘전파천문대’라는 푯말이 보이는 오솔길이 나온다. 굽이굽이 오르던 길이 끝나는 곳에 커다란 접시안테나가 달린 전파망원경이 우뚝 서있고 그 앞에는 정원 씨와 창희 씨가 몸담고 있는 전파천문대 건물이 있다.

후배 창희 씨는 이 골목 저 골목을 뒤져야 하는 복잡한 청계천 전자상가보다 현대식 건물에 층층이 정리가 잘 돼있는 용산 전자상가를 선호하는 ‘신세대’다. 그는 1.4GHz 수신기에 들어가는 ‘저잡음 증폭기’를 제작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작은 회로(30×90mm)에 트랜지스터칩(300×300μm; 1μm=10-6수식m)을 미세도선으로 연결하는 과정에서 이천 하이닉스 반도체공장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창희 씨는 대학원 시절 조교를 맡았을 당시 학부 여학생들한테 꽤나 인기가 있었다. 02학번 학부 1학년 여학생 4명이 그를 만나러 천문대까지 몰려들었고 대학원실 자리배치도에서 그의 위치에 누군가 하트를 그렸는가 하면, 학부생이 함께 쓰는 컴퓨터 배경화면에는 누군가 그의 사진을 깔아놓았다고 한다.
 

03 금속판을 망원경의 수신기 실로 힘겹게 끌어올리고 있는 정원 씨.


전파천문대에 들어서면 실험실에서 커다란 원통형 수신기와 한창 씨름하고 있는 정원 씨를 만날 수 있다. 전파망원경에서 기존 100GHz 수신기를 떼어다가 100GHz와 230GHz 겸용 수신기로 업그레이드하는 중이다.

“이번에는 수신기에 들어가는 각종 장비와 100개가 넘는 정밀부품을 설계한 뒤 가공은 일괄적으로 선배 회사에 맡겼죠. 그 덕분에 일일이 돌아다니는 수고는 덜었답니다(웃음). 반도체 제작용 정밀 장비를 썼다고 하더라고요.”

정원 씨는 그동안 천문대에서 밤낮으로 피땀 흘려 새로 제작한 수신기를 곧 망원경에 부착해 테스트할 예정이다. 결과가 잘 나와야 할 텐데. 그래야 고대하던 박사학위를 거머쥘 뿐 아니라 우주에서 별이 탄생하고 죽어가는 과정의 신비를 한꺼풀 벗기는데 일조할 수 있을 테니까.
 

04 박용선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가 곧 완성될 100GHz·230GHz 겸용 수신기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을 격려하고 있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07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현진
  • 이충환 기자

🎓️ 진로 추천

  • 천문학
  • 기계공학
  • 전자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