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엉~, 엄마가 돈가스를 먹자고 해서 갔는데 알고 보니 병원에 간 거였어요.”
지난 9월 TV에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 방송인 노홍철 씨가 최면 상태에서 어린 시절을 떠올리다 눈물을 펑펑 흘렸다. 그의 잠재의식 속에 20년 가까이 자리 잡고 있었던 ‘공포’의 대상은 다름 아닌 주사기였다.
주사기가 무서워 병원가기를 두려워했던 일은 누구나 갖고 있는 어린 시절 추억. 하지만 이런 현상이 어른이 될 때까지 계속 이어지면 ‘주사공포증’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주사공포증이 있는 환자는 주사 맞기를 강력하게 거부하며 주사를 맞다가 구토를 하거나 혈압이 급격히 떨어져 쇼크에 빠지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어른 10명 중 1명꼴로 주사공포증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랴? 주사기가 무서워 치료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 과학자들은 다양한 약물전달시스템(Drug Delivery System, DDS)을 개발해 주사바늘에 대한 공포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있다.
공포 덜어준 나비 바늘?
주사기는 1853년 프랑스의 의사 찰스 프라바즈가 처음 만들었다. 그는 동맥류(동맥벽이 손상되거나 혹처럼 불룩해지는 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약물이 든 통에 바늘을 붙여 만든 주사기를 이용해 환자의 혈관에 약물을 주사했다. 그 뒤 주사는 환자가 약을 삼킬 수 없는 경우뿐만 아니라 약이 소화액에 의해 변질되거나 점막에 상처를 줄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게 약물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자리매김했다.
주사는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뾰족한 바늘이 몸속에 들어갈 때의 통증 때문에 사람들에게 여전히 공포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뉴멕시코대의 윌머 시빗 교수팀은 이런 공포감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주사바늘을 나비나 꽃 또는 웃는 표정으로 장식한 뒤 주사를 맞는 환자들의 반응을 살핀 것.
실험 결과 장식을 한 주사기를 사용했을 때 주사에 대한 공포가 약 20% 줄었다. 시빗 교수는 “이런 장식이 주사바늘에 대해 각인된 기억과 정서적 반응 사이의 연결고리를 약화시킨 결과”라고 주장했다. 이 연구결과는 가정의학회지 2006년 8월호에 실렸다.
하지만 바늘에 예쁜 장식을 해서 심리적인 공포감을 잠시 줄일 수는 있어도 주사를 맞을 때 통증은 실제로 줄여주지 못한다. 어차피 맞아야 하는 주사라면 횟수라도 최대한 줄일 수 없을까.
보통 주사액에 사용되는 단백질은 하루 안에 몸 안에서 모두 분해돼 흡수되기 때문에 치료효과를 지속적으로 얻기 위해서는 주사를 매일 맞아야 한다. 하지만 인터페론 같은 약물의 단백질 분자에 인체에 해가 없는 폴리에틸렌글리콜(PEG)이나 히알루론산(HA) 같은 고분자를 붙여 주사하면 약물의 크기가 커져서 혈관 안에서 머무는 시간을 늘일 수 있다.
게다가 PEG와 HA는 약물이 효소와 반응하는 일을 방해해 약물이 서서히 분해되고 약효도 더 오래간다. 스위스의 제약회사 로슈(Roche)는 C형 간염 치료제인 인터페론-α에 PEG를 붙여 일주일에 한번 주사를 맞는 ‘페가시스’라는 의약품을 개발했다.
또 폴리락타이드-글리콜라이드(PLGA) 같이 몸속에서 서서히 분해되는 고분자 나노 또는 마이크로 입자에 약물을 넣어 약물이 오랫동안 방출되게 만든 의약품도 있다. 일본의 제약회사 다케다는 전립선암에 치료 효과가 있는 황체형성호르몬을 PLGA 입자 속에 넣어 만든 전립선암 치료제 ‘류플린’을 개발했다. 항암주사 맞는 횟수를 한 달에 한번 또는 세 달에 한번으로 크게 줄였다.
잉크 분사하듯 주사 놓는 스마트패치
주사 맞는 횟수를 줄이는 방법도 좋지만 길고 뾰족한 바늘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방법 자체를 바꿀 수는 없을까. 지난 9월 컴퓨터와 프린터 제조 회사로 잘 알려진 HP는 가로세로가 2.5cm에 불과한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처럼 생긴 칩에 150개의 미세한 바늘과 약 400개의 약물통을 붙인 ‘스마트패치’라는 새로운 개념의 주사기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스마트패치에 붙어있는 미세한 바늘은 지름이 1μm(마이크로미터, 1μm=${10}^{-6}$m)밖에 되지 않아 피부에 찔렀을 때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미세 바늘 위쪽에 있는 약물통에는 마이크로칩이 연결돼 있어 약물의 용량과 투입할 시기를 조절한다. 마치 잉크 카트리지에서 잉크를 분사할 때와 같은 원리다. 휴렛팩커드는 2010년까지 스마트패치를 상용화할 예정이다.
금속성 바늘이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사람은 미국의 의료기기 회사 테라젝이 개발한 ‘드럭맷’이라는 패치가 적당하다. 드럭맷은 미세한 바늘을 패치에 붙여 만든 약물전달시스템으로 휴렛팩커드의 스마트패치와 비슷하다. 하지만 드럭맷의 바늘은 스마트패치와 달리 금속 대신 몸 안에서 분해되는 생분해성 고분자 셀룰로오스 아세테이트로 만들었다.
이 패치를 피부에 붙이면 셀룰로오스 바늘이 피부 안에서 분해되고 그 안에 들어있던 약물이 몸 안으로 전달된다. 이 패치는 에이즈 치료 백신이나 인플루엔자 백신을 몸 안에 주사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에는 바늘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약물전달시스템도 등장하고 있다. 즉 약물을 집어넣은 매우 작은 장치를 몸속에 삽입하는 방법이다. 한 번 삽입하면 3달 정도 주사를 맞지 않아도 된다. 미국의 다국적제약사인 존슨앤드존슨의 ‘듀로스’가 대표적인 예다.
듀로스는 약 4cm의 길이의 길쭉하게 생긴 관으로 한 쪽 끝을 반투막으로 막아 놓고 다른 한 쪽에는 아주 작은 구멍을 만들어 놓은 장치다. 약물을 전달하는 데는 삼투압의 원리를 이용한다. 관 중간에 피스톤을 두어 두 부분으로 나누고 반투막 쪽에는 몸의 농도보다 높은 농도의 수용액을, 반대편에는 약물을 넣고 작은 구멍을 뚫었다.
이 장치를 몸속에 삽입하면 몸 안의 체액과 반투막 안쪽 수용액 사이에 농도 차가 생기고 농도가 더 낮은 체액이 반투막을 통해 장치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면 장치 중간의 피스톤이 약물이 들어있는 쪽으로 이동하며 약물이 작은 구멍을 통해 방출된다.
하지만 약물이 방출되는 속도가 일정치 않아 초기에는 약물이 지나치게 많이 방출되는 경우가 있다. 필자와 포스텍의 김진곤 교수팀은 nm(나노미터, 1nm=${10}^{-9}$m)크기의 구멍이 뚫린 고분자막을 이용해 약물이 일정하게 방출되는 인체삽입형 약물전달시스템을 개발했다. 약물이 방출되는 구멍의 크기를 약물 분자의 크기와 비슷하게 맞추면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일정한 속도로 빠져나오듯 약물이 방출된다.
진단부터 치료까지 ‘손톱 크기 병원’
미세한 바늘을 이용한 패치형 주사로부터 몸 안에 심는 임플란트 주사까지. 전통적인 주사바늘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최근 정보통신(IT), 생명공학(BT), 나노기술(NT)이 어우러져 환자의 몸 상태를 진단한 다음 필요한 약물을 몸 안에 고통 없이 전달하는 시스템이 개발되고 있다.
미국 MIT의 로버트 랭거 교수는 1999년 가로세로 수cm 크기의 칩에 수십μm 크기의 우물을 수없이 만들고, 여기에 약물을 담은 뒤 금 막으로 코팅한 인체삽입형 약물전달시스템을 개발했다. 전기신호로 금 막을 파괴해 몸 안에 약물을 방출하는 원리다. 미국의 의료기기 회사 마이크로칩은 여기에 바이오센서 기능을 추가해 환자의 상태를 분석하고 이에 맞춰 전기신호로 약물을 자동으로 방출하는 똑똑한 약물방출시스템을 개발했다. 머지않아 의사의 진단도 주사기도 필요 없는 ‘손톱 크기의 병원’을 우리 몸에 항상 지니고 사는 시대가 올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