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제가 정우주인으로 선발 됐다구요?”
지난 9월 5일 새벽 5시. 러시아 스타시티의 우주인 숙소에서 고산(31) 씨가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백홍열 원장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잠을 깼다.
지난해 12월 25일 이소연(29) 씨와 최종 후보에 선정된 뒤 지난 3월부터 6개월간 러시아 현지훈련과 국내실험평가를 거쳐 한국최초우주인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이었다. 그동안 함께 고생한 이 씨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이렇게 기쁜 일이 또 있을까.
두 후보는 곧바로 자동차로 1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모스크바의 주러 한국대사관을 찾아 김우식 부총리겸 과학기술부 장관을 대신한 이규형 대사로부터 정·부후보 선정서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고 씨는 “무척 기쁘며 중요한 임무를 맡은 만큼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 하겠다”며 “개인적인 명예를 넘어 우리나라 우주개발사업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보탬이 되겠다”고 밝혔다.
예비우주인으로 선정된 이 씨는 “지금까지 열심히 했으니까 서운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고산 씨가 대한민국 최초 우주인이라는 ‘골’을 넣을 수 있게 멋진 어시스트를 하겠다”고 말했다.
한국 최초 우주인이 받을 대우는?
고 씨는 한영외국어고를 나와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에서 인지과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삼성종합기술연구원에서 인공지능을 연구하다가 우주인에 도전해 3만6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정후보로 선발됐다. 지난해 최종후보 2명을 선발했을 때는 이소연 씨의 점수가 더 높았지만 러시아 현지 훈련과 국내과학실험 임무 훈련에서 고 씨가 더 나은 평가를 받았다고 알려졌다.
고 씨가 내년 4월 국제우주정거장(ISS)에 올라가 성공적으로 실험임무를 마친다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36번째로 우주인을 배출하고 11번째로 우주과학 실험을 한 국가가 된다. 이후 고 씨는 앞으로 이뤄질 유인우주개발사업에 직접 참여하고, 우리나라 우주개발을 짊어지고 갈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줄 과학문화사업에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고 씨는 ‘한국최초우주인’이라는 역사적인 의미 부여와 함께 사회로부터 받는 대우도 달라진다. 현재 고 씨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일반 연구원 신분으로 연봉 6000~7000만원 정도를 받는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우주비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선임연구원으로 승진해 연봉이 8000만원 이상으로 오를 전망이다.
현재 유럽우주인의 연봉 수준인 9만6000유로(약 1억1000만원)보다는 적지만 NASA 우주인들이 받는 연봉인 9만달러(약 8100만원)와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업’ 외에 출판이나 광고 출연으로 생기는 부수입이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또 세계 각국의 최초 우주인이 사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례를 견줘보면 고 씨의 의지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의 폭은 얼마든지 넓어질 수 있다.
방직공장의 직원이었던 러시아의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는 1963년 여성 최초로 우주에 갔다온 뒤 1974년 러시아(옛소련) 최고회의 간부로 선출됐고 체코의 첫 우주인 블라디미르 레메크는 1978년 체코 공산당을 대표해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몽골의 첫 우주인 주그데르데미딘 구락차와 프랑스의 첫 우주인 클로디 에뉴레는 각각 국방장관과 과학기술부장관 자리까지 올랐다. 또 영국의 마스 과자회사 연구원이었던 헬런 샤먼은 1991년 우주에 다녀온 뒤 영국 왕실로부터 명예기사 작위를 받고 5년 동안 과학 홍보활동을 한 뒤 현재 셰필드대 교수로 있다.
달 착륙 신화의 주인공, 올드린의 충고
정우주인으로 선정됐다고 해도 고 씨가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훈련 과정에서 부상을 입거나 발사하기 며칠 전에 감기라도 걸리면 예비우주인에게 자리를 내 줘야 하기 때문이다. 한 번 발사하는데 1000억 원이 드는 소유즈 로켓에 타려면 그만큼 자기 관리에 힘 써야 한다.
실제로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2003년 6월 예비우주인이었던 돈 페팃과 폴 록하트를 각각 베테랑 우주인인 도널드 토마스와 구스 로리아를 대신해 우주왕복선에 태웠다. 우주인이었던 토마스는 NASA가 사생활보호 차원에서 정확한 원인을 밝히지 않은 의학적 문제 때문에, 그리고 로리아는 집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사고로 입은 경미한 부상 때문에 우주왕복선을 탈 수 없었다.
NASA에서 발사를 한 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서 두 사람이나 교체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지만 충분히 훈련된 예비우주인이 있었기 때문에 재빨리 우주인을 교체해 일정을 맞췄고 주어진 임무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미국과 러시아는 우주개발사업 초기부터 항상 예비우주인을 선발해 정우주인이 우주선에 탑승하기 전까지 똑같은 훈련을 받게 하며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왔다. 러시아에서는 지난 25년 동안 정우주인과 예비우주인이 교체된 일이 두 번 있었다.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우주선을 개발했는데 우주인 때문에 일정에 차질을 빚는다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우주인과 예비우주인에게 발사 직전까지 똑같은 훈련을 시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9월 10일 한국을 방문한 에드윈 올드린도 두 사람에게 ‘팀워크’를 강조했다. 올드린은 1969년 닐 암스트롱과 함께 미국 달탐사선 아폴로 11호를 타고 인류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한 우주인으로 1953년 한국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어 유달리 한국에 애정이 많다.
그는 첫 한국 우주인에 뽑힌 고 씨에게 “우주선을 타고 우주에 올라가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세계가 열린다”며 “이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기 위해서는 예비우주인과의 팀워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밝혔다.
달착륙선에서 먼저 내린 암스트롱에 가려 ‘2인자’ 인생을 살았던 올드린은 특히 예비우주인으로 선정된 이 씨에게 애정 어린 충고를 잊지 않았다. 그는 “암스트롱과 나도 아폴로 8호가 발사될 때 예비 우주인이었다”면서 “고 씨가 힘들 때 밀고 끌어주는 중요한 책임을 맡았음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사람 문제 생기면 팀이 통째로 바뀌어
고 씨와 이 씨는 ISS 운영에 참여하고 있는 15개 국가 대표들로 이뤄진 다자간승무원운영위원회(MCOP)의 승인을 거쳐 각각 러시아 우주인 2명과 탑승팀, 예비팀을 이뤄 2008년 3월까지 훈련을 받는다.
고 씨와 함께 탑승팀을 이루는 러시아 우주인은 선장 세르게이 볼코브와 비행엔지니어 코노넨코 올레그로 선정됐다. 볼코브는 전직 전투기 조종사로 우주체류시간만 390일이 넘는 러시아의 우주영웅인 아버지의 대를 이어 첫 우주비행에 나선다. 올레그는 기계공학을 전공한 자동화시스템 전문가로 역시 이번이 첫 비행이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최기혁 우주인개발단장은 “탑승팀 훈련에 참여한 우주인 3명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예비팀으로 한꺼번에 교체된다”며 “고 씨와 이 씨 모두가 최선을 다 해 주기를 당부한다”고 말했다.